유권자에게 '진짜 정보' 알려준 '막장 공천'

[주간 프레시안 뷰] 민주주의와 멀어진 정당정치, 세 가지 근거

여야의 공천이 아주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새누리당은 유승민을 탈당시키는 데 성공했고, 더불어민주당은 비례대표 공천을 앞두고 당 대표가 칩거 상태에 들어가는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각 정당이 선거를 앞두고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치장하지 않고, 본래의 수준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잘 보여준 셈입니다. 덕분에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에서 각 정당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갖고 선거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총선의 공천과정에서 확실해 진 것이 있습니다. 우리 정당정치가 민주주의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관련해 공천 과정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각 정당 공천과정의 공정성입니다. 두 번째는 비례대표의 구성입니다. 세 번째는 공천의 시기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권력은 대통령에게서 나옵니다

새누리당은 국민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유승민 의원이 가장 크게 잘못한 것은 헌법을 자주 언급한 점일 것입니다. 유 의원은 헌법을 근거로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했지만, 새누리당에서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권력은 대통령에게서 나옵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공천을 줄 수는 없습니다. 조원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잘 지적한대로 헌법 위에 사람관계, 즉 대통령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그 기준에서 볼 때 새누리당의 공천은 비교적 공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두언 의원을 살려 둔 것은 옥의 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의원은 본인의 공천이 확정된 뒤 새누리당 지도부에 대해서는 "비루한 간신들", 공천관리위원회에 대해서는 "유치원 수준"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정 의원이 잘 모르는 점은 대통령이 보시기에 간신이 곧 충신이며, 유치원 수준은 다른 정당들도 매한가지라는 사실입니다.

한국정치의 3대 미스터리, 김종인의 '정무적 판단'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역시 유치원과 어린이집 수준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김종인 대표의 '정무적 판단'은 이제 대통령의 '창조경제', 안철수의 '생각'과 더불어 한국 정치의 3대 미스터리가 되었습니다. 홍창선 공관위원장은 첫 공천 결과 발표장에서 상식 이하의 언행을 하다가 한 기자로부터 "제1야당의 공천이 장난입니까?"라는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기자야말로 탁견을 발휘한 것 같습니다. 제1야당의 공천이 실제로 그랬습니다.

8개 지역구 중에서 3군데 밖에 출마자를 구하지 못한 대구에서 유일한 현역의원 출마자인 홍의락 의원을 컷오프 시켰습니다. 잘못된 것 같다고 말은 했지만 수습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정청래 의원을 컷오프 시킨 후에 해당 지역구에는 정 의원을 탈락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 사람을 공천했습니다.

무엇보다 김종인 대표의 리더십은 민주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습니다. 내용만 다르지 통치의 방식은 권위주의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러 온 의사에 스스로를 비유한 것은 그가 정치에 임하는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이 비유는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에도 등장하는데, 바로 철인통치자의 정치적 성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철인통치자라도 의사와 선장은 또한 다릅니다. 선장은 배를 지휘하지만 배가 침몰하면 선장도 선원들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반면 환자를 살리려고 노력했다가 잘 안 된다고 해서 의사가 환자와 운명을 같이 하지는 않습니다.

김 대표는 당무를 거부하면서 "도움을 주는 것도 도움을 받을 사람들의 자세를 봐서 줄 수 있는 것이지, 도움 받을 자세가 전혀 안돼있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도와줄 순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의사는 마음에 안 드는 환자도 살려야 합니다. 제1야당의 대표가 된 사람이 애당심이나 의무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경망한 말을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례대표를 둘러싼 일련의 파동에서도 김종인 대표가 분노한 원인은 당이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든지 국민의 뜻과 다른 공천을 원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히 나를 이렇게 대접하다니'가 격노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자 비대위원들은 '잘 못 모셔서 죄송하다'며 총사퇴를 결의하고 한밤중에 사과하러 갔습니다. 사태야 어떻게 수습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당사에서 대단히 부끄러운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공공성이 실종된 비례 공천

다음으로 비례대표 공천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양당의 비례대표 공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공공성의 실종'입니다. 여야 모두 이공계 출신의 기업임원과 교수를 1번에 내세웠습니다. 전문성을 갖고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슨 공적 활동을 해 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김종인 대표는 비례 1번에 수학과 교수를 배치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자 내가 얘기해줄게. 1번 택한 사람 왜? 택했는지 알아요. 지금 시대가 옛날이랑 달라요. 최근에 와서 무슨 알파고인가 뭔가 가지고 떠들어 대는데. 앞으로 모든 우리나라 분야 세계 경제상황이 인공지능이니 뭐니 이런 쪽으로만 가는 거 아니야. 컴퓨터나. 전부 다 수학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래서 그 분한테 사정해서. 본인한테 사정해서 모셔온 건데."

사실 이런 정도의 이유로 비례대표 1번을 수학자에게 줄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수준이라면 시류에 편승한 '알파고 공천'이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별 할 말이 없어 보입니다. 새누리당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이라면 사회적 소수자나 장애인, 인권운동이나 사회공헌 분야에서 묵묵히 일해 온 사람을 상징적으로 공천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전문성만 갖추고 공공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그런 전문성은 없느니만 못합니다. 전문성과 더불어 그 사람이 자신의 전문성을 어떠한 공적 활동을 통해 발휘해 왔는가가 정치적 자질로서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례대표 1번 수학교수님이 갖춘 공공성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자료는 '표절 의혹'뿐입니다.

우리 정당들이 비례대표 공천을 하는 사이 미국은 연방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했습니다. 메릭 갈런드 워싱턴 연방순회항소법원장입니다. 이 분이 법률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평가할만한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다만 이 분이 지난 18년 동안 흑인 학생들이 많은 한 초등학교에 격주로 찾아가 자원봉사 교사로 활동해왔다는 점을 보면, 여러 판사들 중에서도 가장 대법관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추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김종인 대표가 1번에 수학자를 공천하는 동안 비례대표에서 농어민후보였던 김현권 씨는 사실상 당선이 어려운 C그룹으로 밀려났습니다. 김현권 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당에서 C그룹이라는 사실을 전화로 공지해 오자 비례대표 경선을 포기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비례대표에 선출방식에 대한 거센 항의 뒤에 칸막이가 없어진 경선에서 김현권 씨는 1위로 당선되었습니다. 혼탁한 공천 싸움에서 유일하게 '공공성'이 발현된 사건이었습니다.

공천을 최소한 선거 6개월 전에 해야

마지막으로 공천 시기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후보자 등록은 투표일로부터 불과 20일을 앞두고 이루어집니다. 사전투표일로부터는 겨우 보름을 앞두고 선거에 나올 후보자가 정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권자가 후보자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선거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역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정치신인이라면 2주간 벌어지는 선거운동과 8쪽 남짓한 홍보물 이외에 그 사람을 평가할 근거가 거의 없습니다. 이래서는 민주적인 선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깜깜이 선거입니다.

그러다보니 학연, 지연, 정당이 투표의 기준이 됩니다. 어차피 사람에 대해 알기가 어려운데 그런 기준으로 투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투표율이 낮고, 그나마 연고와 정당만 보고 찍는 묻지마 투표를 한다는 지적은 하면서도, 후보자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지역별 소선거구제가 한국 정치의 문제라고 자주 지적당하지만, 중대선거구제나 정당비례대표제에 비해 이 제도가 가진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의 거리가 가깝고 가시적 책임성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후보자 공천 시기로는 그런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합니다. 결국 소선거구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선거구제의 원래 뜻을 살리려면 후보자 공천이 선거일에서 최소한 6개월 전에는 완료되어야 합니다. 유권자들이 후보자를 지역에서 6개월 정도 만나고 관찰할 수 있다면, 정당들은 자질 없는 후보를 공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거를 코 앞에 놓고 후보자를 공천하는 것이야말로 유권자를 무시하고 투표율을 낮추고 정치적 무관심을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선거법 개정 논의를 한다면, 이런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어쨌거나 여야의 공천이 잘 되었습니다. 한국정치가 총선 이후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총선 이후가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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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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