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학당 교장이 혁신 리더…가능할까?"

[주간 프레시안 뷰] 2003년 '환생경제' 연극의 교훈

<환생경제>의 추억

한나라당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나라당 소속의 국회의원실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비공개 의원총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보통은 줄여서 의총이라고 부릅니다. 의총이 비공개로 바뀌면 일단 기자들이 쫓겨나고 당직자들은 남은 사람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합니다. 간혹 기자들이 의원실 직원인 척 하면서 남아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장 안 모든 사람들의 신원 확인이 끝나고 나면 책임을 맡은 당직자가 원내대표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원내대표는 문이 잠겼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비공개 의총을 시작합니다. 당내 사안이든 당 밖의 사안이든 그 때부터는 발언에 거침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 임기를 막 시작한 노 대통령에 대해 대부분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듣기에도 거북한 비아냥거림과 하대로 일관했습니다. 여야 관계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이런 깜냥도 안 되는 인물에게 국정을 맡길 수 있는가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2003년 초에 한나라당 비공개 의총에 참석해보셨던 분들은, 아마 그때부터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가감 없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대선 패배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화를 내다보니 나중에는 막말도 서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의총을 하면서 대통령을 국정의 파트너는 물론이고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명백해졌습니다.

17대 총선에 참패한 직후인 2004년 8월, 한나라당 의원 24명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한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이 연극에서 극중 부녀회장(박순자 의원)은 '노가리'에게 "육실할 놈", "개잡놈",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불알 값을 해야지", "죽일 놈",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등의 욕설을 합니다.

대통령에 대한 불온한 생각만 해도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요즘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만, 총선에서 패배한 소수야당이 선거 직후에 저 정도의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에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집니다. 하지만, 한나라당 비공개의총에 참석해 본 사람에게 <환생경제>는 크게 놀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정도 이야기는 술자리에 몰래 모여 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의원들의 전체 회의에서 늘 해왔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어떻게 저토록 저열하게 비하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연이은 선거 패배 후에 큰 상실감을 갖고 있던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는, '연극'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분명히 큰 카타르시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선거도 끝났으니 말입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4년 8월 전라남도 곡성에서 <환생경제> 공연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규율이 있는 정당과 없는 정당

그런데 <환생경제> 사건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참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3년 이후 약 1년간 수많은 의총에서 국민들이나 기자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발언들이 오갔고, 저 연극을 준비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을 텐데, 막상 연극이 막을 올리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제가 열린우리당 소속이 되어서 또 하나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이 당에서는 비공개 의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비공개 의총이란 말 그대로 당내의 민감한 인사, 정책, 정강, 전략에 대해 의원들이 한데 모여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공간입니다. 비공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당에서는 의총장 안에 있던 저 보다 밖에 있는 기자들이 더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한 원인은 속칭 '빨대' 역할을 하는 의원들이 의총 내용을 밖에 나가서 기자들에게 줄줄 읊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던 것이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살살 긁어주기만 하면 이야기가 한없이 나왔던 것이죠.

야당으로서는 49석에서 152석으로 늘어나는 사이에 초선의원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니 정치경험이 미천한 의원들이 실수를 좀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이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제도정치권에 입성한 운동권 출신 의원들의 으스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이런 정도는 봐줄만 합니다.

문제는 두 번째 부류의 의원들이었습니다. 비공개 의총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지 못한 일부 의원들이 아예 기자를 불러다 놓고 브리핑을 해주다시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주로 현안에 있어 강경파들이 온건파들을 비난할 때 이런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구성이나 성격으로 볼 때, 대 야당 관계에서 온건파들은 발언 내용이 공개될 경우에 당연히 비겁한 타협주의자로 몰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의원총회가 원내 최종 의결기구로서의 위상을 사실상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원총회의 최대 장점은 누구나 평등한 발언권을 갖고 당내 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한두 명의 의원이 설득력 있는 발언을 해서 당 전체의 입장을 바꾸는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의회의 기능이 '집행(doing)'이 아니라 '토의(talking)'에 있다고 했는데, 오늘날 많은 국가의 국회의원들은 정당의 거수기 노릇을 할 뿐이라서 이런 기능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나마 말을 통한 정치, 설득의 가능성이 있는 정치는 그나마 살아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의원총회'였습니다. 개개인이 당의 국회의원이자 독립적인 헌법기관으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고, 그것이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발언시간이나 주제에 큰 제한이 없는 공간, 그리고 내부 구성원 이외에 발언의 비밀이 지켜지는 공간이 의원총회장입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일하던 시절 저는 비공개 의원총회를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당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환히 알 수 있고, 그것은 언론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지 얼마 후 상당수 보좌진들이 의총에 참석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재미도 없고, 어차피 언론에 다 정리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의총이 유명무실해지면 무엇이 당내정치를 결정하게 될까요? '계파'입니다.

혁신과 단결은 규율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집권당인 새누리당이 지난 몇 달 간 시끄러웠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세월호 특별법의 시행령과 관련해 정부입법의 문제점을 고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직접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 운운했으니, 그 내부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밖으로 새어나온 험한 이야기는 딱 한 번에 그쳤습니다. 지난 2일 최고위원회에서 김태호 최고위원이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촉구하자 김무성 대표가 "그만해"라고 말하고 나갔고, 뒤따르던 대표 비서실장 김학용의원이 김태호 최고위원에게 "에이, XX야. 그만해!"라고 한 것이 전부입니다.

새누리당이 공식회의석상에서 저 정도면 당이 난리가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자들의 탐문에 따를 것도 없이, 친박이든 비박이든 밤이면 기자들을 불러놓고 일부러 흘리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음해가 다음날 아침이면 '특종'의 이름을 달고 나와야 정상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있던 며칠 전 열린 비상 비공개최고위에서도 고성이 오갔다는 기사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그 고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발언이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 전후에 열린 비공개 의원총회에서도 '박수로 추인했다'는 대체적인 소식만 전해졌지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새누리당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정청래 최고위원이 주승용 최고위원을 상대로 도에 넘는 발언을 했을 때, 문재인 대표는 '그만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뒤이어 유승희 의원이 노래를 부를 때 문재인 대표는 '그만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최재성 의원이 사무총장으로 임명되는 과정에서 김한길 의원은 차마 전직 당대표로서는 할 수 없는 추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뒤에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진 기자들에게 최 의원의 폭행설이 담긴 문자 메시지를 들이댔습니다. 어제 열린 최고위에서는 이용득, 유승희 최고위원이 또 막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언론들은 '새정치, 또 봉숭아학당'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같은 날 오후 문재인 대표는 '모두 혁신하고 함께 단결해서 같이 이깁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단언컨대 분당은 없다. 통합만이 있을 뿐이다. 국민과 호남 민심이 요구하는 것은 당의 분열이 아니다. 제 임기는 총선까지다. 장렬하게 산화할 각오로 총선을 이끌고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총선 결과에 따라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선언은 늦었지만 의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제는 시기를 놓쳐서 떠밀린 선언이기 때문에 더 강한 추가 메시지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기대하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분명해 해둘 것이 있습니다. 혁신과 단결은 규율 없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전에 봉숭아학당의 교장선생님이었던 분이 오후에 단결을 외치는 지휘관 노릇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 당의 규율은 한 번에 세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규율 없는 정당에서는 아무리 통합과 단결을 말로 선언해도 분당과 분열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작은 일에서 규율과 원칙을 세우십시오. 그것이 혁신과 단결을 백번 외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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