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은 2023년 3월 경부터 단체대화방 대화 내용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사과문 작성을 강요하고 이를 어길 시 위 사건을 피해자의 지인 및 학교에 공론화시키겠다고 '가스라이팅'한 결과 우울감 및 불안, 초조, 무기력감, 사회적 위축 등의 증상이 심해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피해자와 연인 관계였던 피고인은 누구보다도 피해자의 위태로운 상태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위와 같은 상황을 이용해 피해자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고, 계속해서 본인의 피해를 보상하라는 듯 피해자에게 견딜 수 없는 압박을 가했습니다.“
"피고인이 전 연인의 지위에서 피해자의 건강과 회복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면, 피고인의 연락에 공포심과 두려움을 느끼는 피해자에게 총 53회에 걸친 협박성 내용의 카카오톡을 전송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디 피고인과 피해 간의 카카오톡 내용을 면밀히 살피시어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피고인이 과거 연인 관계였던 피해자를 협박하며 물질적·정서적으로 착취한 듯한 위 내용은 지난 9월 인천지검이 인천지법에 제출한 항소이유서 일부다. 피고인은 1심에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는 벌금형 100만 원의 집행유예를, 협박 혐의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검찰은 사실오인과 양형부당을 주장하며 피고인에게 더 강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 같은 항소이유서를 받은 피고인 A 씨는 <프레시안>과 만나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집히는 이 현실은 저의 명예와 인격을 깊이 훼손하는 또 다른 폭력"이라고 항변했다. 또한 "내 삶이 더 이상 왜곡된 주장에 흔들리지 않기를, 이 사건이 진실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향으로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A 씨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위 사건 피해자 B 씨를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A 씨는 B 씨와 그의 지인들에게 장기간 단체채팅방 성희롱을 당했으며, 이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자 협박과 고소 등 2차 가해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여성 80여 명 성희롱한 '단톡방 성희롱' 가해자들, 사과 요구한 피해자에게 자살 협박·고소 폭탄
A 씨가 당한 '단톡방 성희롱'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A 씨는 당시 교제 중이었던 신학생 B 씨와의 대화 도중 그가 단체대화방에서 자신을 비롯한 여성들에게 성희롱을 일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성희롱이 벌어진 채팅방은 '밀리터리 덕후(군사 및 무기 정보 애호가)' 20대 남성 6명이 오프라인 만남 등 친목을 위해 2021년 개설한 방이다. 이들은 개설 이래 본인이 직접 찍거나 공유받은 여성들의 영상을 올리고 매일같이 품평했다. 피해 규모는 전·현 애인과 미성년자, 연예인과 정치인 등 여성 80여명에 달한다.
가해자들은 본인들이 단톡방에서 벌이는 성희롱이 밖으로 알려지면 문제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를 'OO동서'라고 부르며 성희롱을 멈추지 않았고, A 씨가 사태를 인지하기 전까지 2년에 걸쳐 애인과의 성관계 경과를 공유하거나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적 모욕을 이어갔다.
이 방에서 B 씨는 A 씨를 촬영한 사진 등의 일상을 올리며 성희롱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때문에 A 씨는 단톡방에서 'O집', '계X년'으로 불리며 자신도 모르는 새 성적 모욕을 겪고 있었다. 특히 둘이 만난 날의 단톡방은 A 씨를 향한 성희롱으로 가득 찼다. B 씨가 A 씨와의 만남을 생중계하며 사실상 성적 모욕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큰 충격을 받은 A 씨는 B 씨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성희롱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하길 바랐다. 그게 어렵다면 공개 사과문이라도 작성하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B 씨는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길까봐 너무 무섭다", "사람들이 다 나를 죽일 것 같다"며 사태를 책임지기를 피했다. 또 그는 A 씨에게 자살 충동을 언급하거나 A 씨의 생일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A 씨는 이 과정에서 종종 B 씨를 만나거나 오랜 시간 전화하면서 그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도록 달랬다. 자살 충동을 호소한 날에는 경찰에 신고하고 지원 제도를 찾기도 했다. A 씨가 B 씨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은 그가 자신의 가해 행위에 온전히 책임지기를 바란 것이지, 연인 관계였던 그가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 씨를 비롯한 성희롱 가해자들은 사과가 아닌 2차 가해를 택했다. B 씨는 2023년 7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유족은 같은 해 10월 A 씨가 B 씨를 협박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장을 접수했다. 다른 가담자들도 A 씨가 다른 성희롱 피해자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A 씨를 고소한 가해자 C 씨는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 무시하고 성폭력 가해자라고 말하는 건 마음의 상처"라거나 "나도 조현병에 자살 이력이 있는데 봐 주면 안 되느냐" 등 A 씨에게 조롱성 메시지를 보냈다. 이어 '사필귀정(모든 일은 결국 반드시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마치 A 씨가 처벌받는 게 정의로운 결말이라는 듯 행동하기도 했다.
성희롱 피해자가 '가스라이팅 살인범' 이라는 검찰
성희롱 피해자가 명예훼손 가해자이자 협박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이 사건은 법정으로 이어졌다. C 씨가 제기한 고소는 무혐의 결정이 나왔지만, 사망한 B 씨의 유족이 제기한 고소는 검찰이 혐의를 인정해 벌금 100만 원의 구약식 처분이 나왔다. A 씨가 청구해 이뤄진 정식 재판에서 재판부는 협박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는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A 씨가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B 씨에게 다소 강한 어조로 사과와 더불어 추가사항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이는 A 씨의 사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B 씨가 별다른 실행에 나아가지 않자 단톡방 사건에 대한 B 씨의 진의에 의문을 품은 피고인이 다소 감정적인 문자메시지를 낸 것으로 보일 뿐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A 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소수 지인들에게 일부 성희롱 가해 내용을 올린 것에 대해서는 "위 표현은 전체적으로 피해자의 자질과 평판 등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만한 표현으로 인정된다"라며 "B 씨가 공적 인물이 아닌 사인에 불과하고 위 내용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인 점, A 씨가 B 씨를 다소 조롱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한 점 등을 종합하면 A 씨가 B 씨를 비방할 목적도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검찰은 협박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재판부 판단이 부당하다며 즉각 항소했다. 검찰의 눈에는 자살 충동을 호소하는 성희롱 가해자를 달래면서도 사과를 통해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 것이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검찰이 인천지법에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보면, 검찰은 A 씨가 B 씨에게 단톡방 성희롱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것을 두고 "피해자(B 씨)로 하여금 하루도 빠짐없이 죄의식을 느끼게 했고 B 씨를 계속해서 사지로 밀어 넣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검찰은 불안을 호소하며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기를 거부하는 B 씨를 돌본 행위에 대해 "반복적으로 학대와 사랑을 번갈아가며 피해자로 하여금 피고인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했다"고 했다.
이밖에도 검찰은 B 씨의 단톡방 성희롱 가해 사실을 "약점"이라고, A 씨가 B 씨에게 수차례 사과를 요구한 것을 "협박"과 "스토킹"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공포심에 고통받는 근원지가 피고인 때문임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피고인은 본인의 잘못을 극구 부인하며 피해자의 건강과 회복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고 주장한다"라며 "(A 씨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범행 이후의 정황도 불량하다"고 지적했다.
"성희롱 가해자의 죽음이 어떻게 피해자 때문인가…검찰 주장은 '피해자다움' 요구하는 것"
A 씨가 B 씨에게 바란 것은 단 하나, 여성 수십 명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저지른 가해 행위에 대한 책임 있는 사과였다. 성희롱 피해자로서 마땅한 요구사항이 가스라이팅과 협박으로 둔갑한 것을 두고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 아래 성희롱 가해자에게 편향된 항소이유서"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프레시안>에 "성희롱(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같은 일을 다시 하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성희롱 가해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제일 먼저 가해자가 범행을 인정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즉각 고소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A 씨는 B 씨에게 한 달 동안 가해 정황과 사과를 요구했다. 안위를 해치겠다고 협박한 게 아니라 '생각만 하지 말고 구체적인 사과 계획을 말하고 실행에 옮겨라'라고 계속 요구한 것"이라며 "이를 가스라이팅이라고 말하는 것은 '통상적인 성희롱 피해자라면 이렇게 주장하거나 요구할 수 없다'라는 편견 속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최 부소장은 B 씨가 사망한 책임을 A 씨에게 돌리는 검찰의 주장이 매우 문제라고 질타했다. 그는 "A 씨에 의해 단톡방 성희롱이 발각되지 않았다면 그 안에서 성희롱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계속해서 피해자들이 양산됐을 것"이라며 "이 모든 사안의 책임은 사망한 B 씨에게 있는 것인데 마치 성희롱 피해자가 가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A 씨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연인이 자신을 상대로 성희롱을 벌이고 있었으며, 사과 요구를 거절한 채 죽음으로 도망쳤다는 점만으로도 일상에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사건 2년이 지난 지금, 가해자의 죽음에 책임지라는 검찰의 주장이 A 씨는 참담할 따름이다.
다음은 A 씨가 검찰의 항소와 관련해 <프레시안>에 보낸 심경 전문이다.
상대 측의 항소 이유서를 접했을 때, 저를 덮친 감정은 말 그대로 참담함이었습니다. 단톡방에서의 성희롱과 모욕이라는 명백한 가해 행위로 시작된 사건임에도, 이제는 제가 ‘가해자의 죽음을 유도한 사람’이라는 부당한 프레임 속에 놓이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집히는 이 현실은 저의 명예와 인격을 깊이 훼손하는 또 다른 폭력입니다.
저는 그 어떤 경우에도 타인의 삶을 조종하거나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저는 시험 전날 새벽에도 자살을 호소하는 전화를 받으면 몇 시간씩 붙잡고 그를 달래주었고,그를 겨우 설득하고 일으켜서 함께 장을 봐주었으며, 그가 끼니를 거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계란 요리 레시피들을 손으로 일일이 적어주기도 했습니다. 자살 충동이 심해보여 위급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는 직접 신고해서 새벽에 집까지 찾아온 경찰들을 만나 조사를 받으며 꼭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지원제도와 치료 정보를 밤새 찾아보고, 병원 내원이나 입원을 수차례 권유하고 설득하며, 어떻게든 살아낼 방도를 함께 찾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사람의 생명은 내 감정이나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는 문제보다 우선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진심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시간들을 겪은 제가, 이제 와 '사랑과 학대를 번갈아가며 가한 사람', '가스라이팅을 통해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이라는 서사로 평가받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왜곡입니다.
더구나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연인이었던 인물은 겉으로는 반성하는 듯 행동하면서도 친구들의 고소 과정에 은밀히 협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보란듯이 제 생일에 맞춰 자살시도를 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성실히 도우려 했던 사람에게 가장 깊이 속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제게 가해자의 역할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사실관계의 전도이자, 온전한 인격적 모독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피해자가 오히려 공격받고 왜곡되는 이러한 프레임은 성희롱 피해를 신고하려는 수많은 이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신호가 됩니다. 저는 이번 사건이 억측이나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오로지 사실과 증거, 그리고 법리에 근거해 판단되기를 바랍니다.
저의 삶이 더 이상 왜곡된 주장에 흔들리지 않기를, 그리고 이 사건이 진실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향으로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