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신학생 '단톡방 성희롱' 지인들에 알린 피해자,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받았다

"사회적 평가 저하·비방 목적 인정돼"…정작 가해자는 목숨 끊어 법적 처벌 피해

신학생이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전·현 애인과 미성년자, 연예인과 정치인 등 여성 80여명을 대상으로 2년간 성희롱한 내용 일부와 불법촬영 정황을 지인들에게 알린 피해자의 행위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29일 <프레시안> 취재를 종합하면, 인천지방법원 형사11단독(김샛별 판사)은 지난 10일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단톡방 성희롱 피해자 A 씨에게 벌금 100만 원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A 씨는 지난 2023년 교제 중이었던 신학생 B 씨와의 대화 도중 그가 단체대화방에서 자신을 비롯한 여성들에게 성희롱을 일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밀리터리 덕후(군사 및 무기 정보 애호가)' 20대 남성 6명이 오프라인 만남 등 친목을 위해 2021년 개설한 이 방에서 가해자들은 서로를 'OO동서'라고 부르며 본인이 직접 찍거나 공유받은 여성들의 영상을 올리고 매일같이 품평했다.

B 씨는 단톡방에 A 씨를 촬영한 사진 등의 일상을 올리며 성희롱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 때문에 A 씨는 단톡방에서 'O집', '계X년'으로 불리며 자신도 모르는 새 성적 모욕을 겪고 있었다. 특히 둘이 만난 날의 단톡방은 A 씨를 향한 성희롱으로 가득 찼다. 이밖에도 단톡방에서는 애인과의 성관계 경과를 공유하거나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적 모욕이 2년 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A 씨는 B 씨가 다른 성희롱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거나 공개 사과문을 작성하기를 바랐다. B 씨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격분한 A 씨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소수 지인들에게 단톡방에서 벌어진 성희롱과 불법촬영 정황을 일부 공유하며 "성직자 하겠단 XX가 맨날 이러고 놀고 있었다…불법촬영도 해봤나 보다"라는 글을 공유했다. B 씨는 이후로도 A 씨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다 2023년 7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단톡방 성희롱 피해자 A 씨가 고소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올린 게시물ⓒA 씨 제공

B 씨가 사망한 그해 10월 B 씨 유족은 A 씨가 B 씨를 협박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장을 접수했다. 검찰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과 협박 혐의로 A 씨에게 벌금 100만 원의 구약식 처분을 내렸다. A 씨가 청구해 이뤄진 정식 재판에서 재판부는 협박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는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 씨가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B 씨에게 다소 강한 어조로 사과와 더불어 추가사항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이는 A 씨의 사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B 씨가 별다른 실행에 나아가지 않자 단톡방 사건에 대한 B 씨의 진의에 의문을 품은 피고인이 다소 감정적인 문자메시지를 낸 것으로 보일 뿐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A 씨가 SNS에 올린 게시물에 대해서는 "A 씨가 B 씨의 대화 부분에만 밑줄 등 특별한 표시를 한 점, B 씨가 신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점 등에 비춰 당사자가 B 씨로 특정된다"며 "위 표현은 전체적으로 피해자의 자질과 평판 등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만한 표현으로 인정되며, B 씨가 공적 인물이 아닌 사인에 불과하고 위 내용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인 점, A 씨가 B 씨를 다소 조롱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한 점 등을 종합하면 A 씨가 B 씨를 비방할 목적도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A 씨는 성희롱 피해자가 소수 지인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고 처벌받아야 하는 현실이 절망스럽다는 입장이다. 그는 <프레시안>에 "당시 피해 사실을 외부에 할 수조차 없는 극심한 심리적 고립 속에 있었고, 오직 신뢰할 수 있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과 조심스럽게 내 고통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며 "단지 피해 사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피해자라는 이유로 범죄자가 됐다"고 호소했다. A 씨는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했으며, 검사 측 또한 판결이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2018년 11월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다시세운광장에서 열린 '#미투, 세상을 부수는 말들' 퍼포먼스에서 참가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희롱·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렸다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일은 A 씨만 겪은 것이 아니다. 앞서 '미투(MeToo)' 운동이 활발하던 2018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미투에 동참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는 경우가 잇따랐다. 양육비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법적 절차만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인터넷에 미지급자의 신상을 공개했다가 고소당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법조계에서는 피해자들의 발목을 잡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2018년 4월 현직 변호사, 대학교수 등 330명의 법률가들은 사단법인 오픈넷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존재는 피해자들이 성폭력 등의 피해 사실을 알린 것 자체만으로 오히려 가해자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역고소 당해 수사 대상자가 될 수 있는 위험에 놓이게 하고 실제로도 그러한 위협이 발생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에 있을 용기 있는 내부고발이 위축되지 않도록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국제사회도 한국 정부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수차례 권고해 왔다.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2023년 한국 정부에 명예훼손죄 비범죄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요청했으며, 2015년에는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위원회가, 2022년에는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표현의 자유 제한과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보복성 고소 등을 이유로 폐지 및 개정을 권고했다.

국회에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형법 제307조 제1항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삭제하고 정보통신망법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불법정보 및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하는 형법 개정안 및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지난해 2월 구본창 배드파더스(현 양육비해결하는사람들) 대표의 헌법소원으로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헌법소원 청구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손지원 변호사(법무법인 혁신)는 <프레시안>에 "범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과도할뿐더러 위법성 조각사유인 공익적 목적 또한 재판부에 따라 판단이 다르게 내려지는 상황"이라며 "판단 기준이 애매하고 피해자에게 과도한 형벌을 내릴 수 있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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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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