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는 삼성보다 더 삼성 같은 기업이다. 롯데 직원들도 맞장구 친다. 과감한 연구개발 투자 등 삼성의 좋은 점은 안 닮았다. 대신, 나쁜 면은 더 진하게 닮았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문화, 총수가 전횡하는 황제경영 등이 그렇다.
닮은 점은 그밖에도 많다. 창업주는 특히 그렇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롯데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은 모두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다. 창업 이후에도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일본 식 경영을 배워 적용했고, 일본 기업인들처럼 정치권력을 관리했다.
이런 공통분모는 '만주', '우익', '박정희'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간단히 정리해 봤다.
이병철과 세지마 류조…"삼성 회장과 관동군 참모의 우정"
이병철 회장과 신격호 총괄회장 모두 일본 우익 거물과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이토추 상사 회장과 가까웠다. 이 회장은 세지마 류조를 만난 뒤 "사업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호감을 드러냈다. 자신을 만난 이들은 대부분 돈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세지마 류조는 달랐다는 게다. 이후 이 회장은 세지마 류조의 측근을 삼성물산 고문으로 초빙하는 등 친분 관계를 이어갔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차석,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마친 세지마 류조는 군국주의 일본이 길러낸 최고 엘리트로 꼽힌다. 하지만 대본영 참모로 일하면서 작전 실패가 잇따랏고, 결국 관동군 참모로 좌천됐다. 일본 패전 이후, 소련군 포로가 됐다. 이후 풀려나서 일본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실제론 막후의 로비스트였다. 이병철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강력히 추천해서 1980년대 내내 베스트셀러가 됐던 소설 <불모지대>(야마사키 도요코 지음, 청조사 펴냄)의 실제 모델이다.
박정희 상관 세지마 류조, 서울올림픽 유치와 민자당 출범의 배후
이 같은 이력 탓인지, 세지마 류조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박 전 대통령 역시 관동군 장교 출신이다. 세지마 류조가 박 전 대통령의 상관이자, 일본 육군사관학교 선배였던 셈이다. 박 전 대통령은 만주 군관학교를 나온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다.
5.16 쿠데타 이후, 세지마 류조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박정희 정권 핵심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과도 가까웠다. 이후, 세지마 류조와 그가 몸담았던 이토추 상사는 한국 내의 다양한 이권에 개입했다. 서울지하철 입찰 비리 등이 대표적이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과도 가깝게 지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1990년 3당 합당과 민자당 출범 등의 배경에도 세지마 류조가 있었다. '올림픽 또는 엑스포 등 대형 국제행사를 유치하라'는 아이디어를 전두환 신군부에 전달한 것도 세지마 류조였다. 올림픽 유치를 놓고 서울과 경쟁하던 일본 나고야를 주저앉힌 것 역시 세지마 류조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일본 방문을 앞두고 만난 사람 역시 세지마 류조였다. 당시 히로히토 일왕이 "통석(痛惜)의 념(念)"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과거사 문제를 덮었는데, 세지마 류조가 막후에서 중재를 했다.
삼성과 전두환
세지마 류조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잇는 역할은, 이병철 회장과 권익현 새누리당 상임고문 등이 맡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버지가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서 운영하던 공장 간부였다. 이 회장의 장남 이맹희 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다. 권익현 상임고문은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전두환 및 노태우 전 대통령과 입학 동기다. 권 상임고문은 삼성정밀 전무로 일한 적도 있다.
세지마 류조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처음 만난 장소 역시 삼성 계열사인 신라호텔이었다. 국내 언론 보도는 세지마 류조에게 우호적인 경우가 많았는데, 삼성 계열 매체였던 <중앙일보>가 이를 주도했다.
세지마 류조는 일제의 침략 전쟁 및 식민 지배를 옹호했고, 이런 역사관을 전파하는 단체를 후원했다. 이런 사실들은 1980~90년대 내내 국내 언론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었다. 소설 <불모지대>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미화된 이미지만 있었을 뿐이다.
신동빈 결혼 중매 선 전직 일본 총리
롯데는 삼성보다 한 수 위였다. 창업주와 일본 우익 거물과의 친분이라는 면에서는 그렇다. 신격호 롯데 그룹 총괄회장은 기시 노부스케(본명은 사토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와 아주 가까웠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다. 전쟁 이후 일본 우익의 수장 격이었다.
이밖에도 신 총괄회장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후쿠다 다케오, 오부치 게이조 등 전직 일본 총리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는 신 총괄회장의 차남 신동빈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결혼할 때 중매를 서고 주례까지 맡았다. 당시 결혼식에는 역대 일본 총리들을 포함한 거물 정치인이 대거 참석했다.
재일 조선인인 신 총괄회장이 어떻게 일본 정계 거물들과 친해질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신 총괄회장은 지난 2001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원래 보수 본류의 거두인 기시 선생과 친했다. 그러니 그 후배 되는 분들과도 잘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기시 선생"은 기시 노부스케, "그 후배 되는 분들"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을 가리킨다.
'청년 신격호'는 어떻게 일본 우익 거물과 친해졌을까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와 신격호를 잇는 고리에 대한 설명은 없다. 신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롯데제과를 창업한 게 1948년, 그의 나이 26세였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은퇴한 건 1960년이다. 기시 노부스케와 신격호의 첫 인연은 언제 맺어졌을까.
눈에 띄는 대목은, 기시 노부스케가 외무대신을 지낸 시절(1956~1957년)이다. 전임 외무대신이 시게미쓰 마모루였다. 시게미쓰 마모루 전 외무대신이 신 총괄회장 일본인 부인 외삼촌이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왔었다. 시게미쓰 마모루가 신 총괄회장와 기시 노부스케를 이어줬다는 가정이 나올 수 있다. 신 총괄회장 나이가 30대 중반, 롯데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시게미쓰 마모루와 기시 노부스케가 각료를 지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그럴 듯한 가정이다.
그러나 롯데 그룹 측은 및 신 총괄회장 처가와 시게미쓰 마모루 사이의 인척 관계를 부정한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다.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각했던 일본에서, 차별을 주도했던 우익 정치인들과 '청년 신격호'는 어떻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만주국 경험과 박정희 시대
'만주', 그리고 '박정희'라는 키워드는 또 나온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이듬해 만주국을 수립했다. 사실상 관동군과 만주국 정부는 한 몸이었다. 이병철 회장과 가까웠던 세지마 류조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관동군에서 함께 근무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산업부 차관을 지냈다. 만주국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자체를 자신의 작품으로 여겼다고 한다.
다만,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고위직이던 시절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에서 근무했던 시절은 겹치지 않는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만주국 시절 경험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기시 노부스케의 만주국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을 본 땄다는 지적도 있다. 일반인에 대한 장발 단속 등이 만주국 영향이라는 설명도 있다.
기시 노부스케와 만주국에서 함께 일했던, 이른바 '만주 인맥'은 일본 우익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만주국 관료, 관동군 장교 등으로 일했던 그들은 패전 이후 전범으로 기소됐다. 한때 미국과 전쟁을 벌였던 그들이, 풀려난 뒤엔 열렬한 친미 보수 입장으로 돌아섰다.
'만주 인맥' 후배, 박정희
5.16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만주 인맥'은 한국과 일본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한다. 박 전 대통령 역시 '만주 인맥'이었으니까. 남로당 활동으로 군에서 쫓겨났던 박 전 대통령을 구해준 것 역시 백선엽 전 합참 의장 등 '만주 인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에 '만주 인맥'을 중용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오랫동안 총리를 지냈던 정일권 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가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최규하 전 대통령, 강영훈 전 총리 등이 '만주 인맥'이다.
이병철, 신격호 등 재벌 총수들이 세지마 류조, 기시 노부스케 등 '만주 인맥'의 수장들과 친분 쌓기에 골몰했던 한 이유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만주 인맥' 안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후배 위치였다. 이런 점을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 대표적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측근이던 오노 반보쿠 당시 자민당 부총재는 한국 방문에 앞서 "아들의 화려한 무대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 대통령을 '아들'에 비유한 것이다. 이 발언이 외교적 문제가 됐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이라는 말은 최대의 애정 표현"이라고 고집했다. 결국 그는 발언 취소 없이 한국을 방문해 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했다. 그보다 앞서 그는 독도를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자고도 했다. 이런 발언들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만주 인맥' 안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위치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재벌 총수가 '만주 인맥' 선배와 친분 쌓았던 이유
나라 안에서는 대통령이 '갑', 재벌 총수가 '을'이다. 그런데 '만주 인맥' 안에서는 분위기가 다르다. 재벌 총수는 '만주 인맥' 선배들과 친구다. 대통령은 그 안에서 후배다. 갑을 관계가 미묘하게 변한다. 이병철, 신격호 등은 이런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정치권력을 요리했다.
일본에서 창업했던 롯데 그룹이 한국에 진출한 뒤 누렸던 온갖 특혜는 이런 배경과 떼놓을 수 없다. 일본 우익과의 친분은 한국 군사정부에 대한 영향력이었다.
박정희 딸이 대통령이라서?
그리고 지금, '만주 인맥' 구성원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했다. '만주 인맥'이 한국 정치권력을 장악한 계기였던 5.16쿠데타로부터 반세기 이상 지났다.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됐고, '경제 민주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5.16쿠데타 주동자의 딸이 대통령이 됐지만, '만주 인맥'과는 관계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 머릿속 재벌 총수는, 정치권력 앞에서 벌벌 떨어야 마땅한 '을'일 뿐이다. '만주 인맥' 선배와 친구라서 사정을 봐줘야 한다는 생각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게 박정희 시대와 다른 대목이다.
이런 변화를, 신격호 총괄회장만 모른다.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인데, 왜 롯데 계열사가 세무 조사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듯하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3일 보도자료에서 "세상은 변했고 기업도 변해야 하며, 기업에 투자하는 주주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 총괄회장이 곱씹어볼 만한 문장이다.
정치 민주화, 경제 민주화…세상이 달라졌는데, 신격호만 모른다
신 총괄회장과 가까웠던 기시 노부스케는 '쇼와의 요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쇼와 일왕 시대 가운데 절반은 제국주의 침략 전쟁 시기였다. 나머지 절반은 미국의 보호 아래에서 고도성장을 한 시기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성격이 다른 이 두 시기를 모두 지배했다. 그래서 '요괴'로 불렸다.
신 총괄회장 역시 '요괴'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국 현대사 역시 성격이 다른 몇 토막으로 쪼개진다. 정치적 민주화, 재벌 개혁 요구 등이 분기점이다. 성격이 다른, 여러 시대를 모두 지배하는 '요괴'. 하지만 신격호는 기시 노부스케가 아니다. '요괴'의 시대는 지나갔다. 롯데보다 힘이 센 삼성조차 어느 정도는 새로운 시대에 순응했다. 신 총괄회장은 함께 세상을 요리하던 친구들을 모두 떠나보낸, 쓸쓸한 노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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