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왜 미국에 대한 분노로 불타올랐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15>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스물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의 폭압 정치는 그것과 맞선 운동도 강렬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학생 운동이다. 1980년대 초반 학생 운동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1980년 5·17쿠데타 그리고 광주 학살 위에 들어서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9월 3일과 7일 사이에 전국의 대학들에서 2학기가 시작됐다. 5월 17일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문이 닫혔던 대학들이 109일이 넘는 휴교를 끝내고, 학생들이 다시 학교에 모이게 된 것이다. 그때 대학가 분위기가 얼마나 침통하고 암울했겠는가 하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전두환·신군부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이 돌고 시위가 일어났다. 사복 경찰이 캠퍼스 곳곳에 상주했기 때문에 시위를 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학생들은 들고일어났다. 9월 8일에 이미 경희대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계엄 해제 등을 외치다가 6명이 잡혀갔다. 그 후에도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는데, 특히 10월 8일 한신대에서는 교내에서 농성한 146명이 전원 연행되고 휴교령이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10월 17일에는 고려대에서 500여 명이 참여한 시위가 일어났다. 물론 교내 시위였는데, 이 시위로 46명이 구속됐고 여기에도 바로 휴교령이 떨어졌다. 그 후에도 12월까지 여러 대학에서 시위나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그런 속에서 무림, 학림, 부림이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름만 놓고 보면 무협지에 등장할 것 같은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역량 보존인가 선도 투쟁인가…의견 갈린 학생 운동 덮친 무림·학림 사건

프레시안 : 무림과 학림, 어떤 사건들이었나.

서중석 : 먼저 무림 사건을 보자. 여기서 먼저 언더(under) 지도부라는 걸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일반 사람들한테는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이때는 탄압 때문에 대중적인 활동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비공개로 움직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러면서 언더 지도부라는 게 생기게 된다.

이 시기에 서울대의 언더 지도부는 시위를 자제하고 역량을 보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학생 운동 세력의 가장 큰 임무가 민중적 역량을 강화하고 집단적, 조직적으로 노동 현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위를 자제하면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학생 운동 내에서 상당히 강하게 나오게 된다. 학생 운동 세력이 전체 운동에서 앞장서서 선도 투쟁을 해야 하며, 시위를 자제할 때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비판을 받고 하면서, 역량 보존을 중시했던 이 그룹 쪽에서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래서 1980년 12월 11일 서울대에서 '반파쇼 학우 투쟁 선언'을 뿌리며 시위를 주도했는데, 현장에서 10여 명이 연행됐다.

이걸 계기로 공안 당국은 연행된 사람들을 가혹하게 고문하면서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였다. 그렇게 해서 언더 지도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을 잡아들였다. 이 사건에 공안 당국은 무림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9명이 구속되고 90여 명이 강제 입영됐다.

1980년대에만 나타난다고 할 수는 없어도 1980년대에 들어서 뚜렷하고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이, 노동 운동을 중시하면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주장과 연결된 학생 운동이다. 무림 사건이 주목받은 것은 그러한 주장과 연결해 반전두환·신군부 투쟁을 벌인 학생 운동 사건으로 1980년대에 첫 번째로 크게 터진 게 바로 이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도 무림 사건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무림 사건과 대칭적으로 얘기되는 것이 학림 사건이다. 선도 투쟁을 강조하면서 무림 쪽 언더 지도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나왔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 그게 바로 나중에 학림으로 불리게 되는 이쪽이다. 이쪽 그룹에서는 학생 운동은 선도 투쟁, 정치 투쟁을 통해 문제를 제기해야 하며, 그 성과를 받아 궁극적인 문제 해결을 해야 하는 건 노동 운동 쪽이라고 봤다.

이런 입장을 가진 학생 운동권은 1981년 2월에 전민학련이라고도 불리는 전국민주학생연맹을 결성했다. 그에 앞서 1980년 5월 초, 이때는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데, 이태복 등이 광주의 윤상원이라든가 여러 노동 운동가들과 함께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을 만들었다. 현장 조직이 취약하다는 약점은 있었지만 하여튼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겠다는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던 건데, 전민학련은 그것과 연계된 학생 운동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전민학련은 여러 대학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러다가 1981년 6월 이태복과 이선근이 남영동 치안본부에 연행되면서 학림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이 가운데 이태복은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부산 민주화 운동 세력 겨냥한 조작극, 부림 사건

▲ 부림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 ⓒ위더스필름
프레시안 :
부림 사건의 경우 무림, 학림 사건과 이름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많이 다르지 않나.

서중석 : 부림 사건은 그 사건들하고 성격이 또 따르다. 학림이나 무림의 경우 관계자들이 투쟁을 하려고 했고 실제로 했지만, 부림의 경우 그렇지 않다. 실질적으로 직접적인 시위를 벌이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사건에 휘말렸다.

1981년 5~6월에 부산대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자 당국에서 수사를 벌였는데, 이호철을 주모자로 지목했다. 이 사람이 학림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자 공안 당국은 부산에 있는 민주화 운동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조작극을 벌였다. 그래서 1979년 부마항쟁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사람은 물론이고 부산양서협동조합 조합원, 그리고 학생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는 대학생들까지 싹 잡아들인 다음 심한 고문을 가해 사건을 만들었다. 그게 부림 사건이다.

그 후 이 사건은 2013년에 개봉한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 1000만 명이 넘는데, 거기서 노무현 변호사가 이 사건을 통해 사회 문제에 눈을 뜨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때 문재인, 김광일 변호사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무료 변론을 했다.

프레시안 : 당국은 대학가를 겨냥해 공안 사건을 연이어 터뜨렸지만 그것으로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지 않았나.

서중석 : 학림, 부림 사건 관계자들이 잡혀간 1981년에는 시위가 더 커졌다. 3월 19일 서울대에서 문용식 등 1000여 명이 반파쇼, 이제 이름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민주 투쟁 선언문을 뿌리면서 시위를 벌였다. 3월 30일 성균관대에서도 4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4월 14일에는 서울대에서 유기홍 등의 주도로 시위가 일어났다. 1500명에서 2000명 정도가 참여한 큰 시위였다. 5월과 6월에도 연세대, 동국대, 성균관대, 중앙대,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부산대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다. 부산대에서는 6월 12일에 2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러면서 부림 사건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가운데 5월 27일 서울대 시위는 광주항쟁 희생자 위령제가 저지되면서 일어났다. 광주항쟁과 관련된 유인물은 이미 많이 살포된 상태였고, 드디어 학내에서 위령제를 열려고 하는데 그것이 저지되니까 시위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세 번 외친 후 도서관에서 투신해 사망하게 된다.

1981년 2학기에도 수많은 유인물이 대학가에서 돌았다. 또 1000명 넘게 참여한 시위가 성균관대, 서울대, 연세대에서 벌어지는 등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계속됐다. 그런 속에서 1982년에 학생 운동 또는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준 유명한 '부미방' 사건이 일어난다.

반미와 '광주'를 전면에 내걸고 사회에 충격을 준 '부미방' 사건

▲ '부미방' 사건을 다룬 극단 토박이의 작품 <부미방>.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프레시안 :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1982년 3월 18일 오후 부산 중심지인 대청동에 있는 미국 문화원에서 폭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인근 번화가에는 반외세, 반정부를 주장하는 유인물이 살포됐다. 이 불로 미국 문화원에서 공부하던 한 학생이 사망했다.

이때 살포된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유인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이 땅에 판치는 미국 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 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 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국 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 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 시민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이 유인물에는 이처럼 그 당시 일반 시민들한테는 정말 충격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12일 후인 3월 30일 경찰은 최인순 등 5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2000만 원의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또한 경찰은 문부식, 김은숙 등을 지명 수배했다. 그 이틀 후인 4월 1일 원주 가톨릭교육원에 피신해 있던 문부식과 김은숙이 원주 교구 최기식 신부, 그리고 서울의 함세웅 신부 등의 주선으로 자수했다.

자수하기 직전 문부식과 김은숙은 결혼식을 대신한 예식을 올렸다. 문부식, 김은숙은 이 사건 직후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하기 어려운 상태였는데, 원주 교구에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원주 가톨릭교육원으로 가면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갔던 것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들을 받아주면서 자수할 것을 설득했고, 당국과 이들의 자수 문제를 논의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자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경찰은 원주 가톨릭교육원에 수배자 김현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현장은 광주항쟁이 한창 진행될 때 '전두환의 광주 살육 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만든 사람이다. 이 유인물이 전국에 배포돼 많이 읽혔는데, 특히 전주 교구에서 이걸 적극적으로 배포했다. 그러한 김현장의 은신처를 경찰이 알게 되면서 김현장도 4월 2일 자수 형식으로 검거됐다.

천주교회가 교섭 당국하고, 이건 고위층을 말하는데, 자수 문제를 논의할 때에는 정부가 천주교회 측에 감사하다고 그랬다. 그런데 4월 8일 정부는 최기식 신부 등 5명을 범인 은닉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면서 사태가 더 커졌다.

이렇게 문부식, 김은숙뿐만 아니라 김현장이 구속되고 조금 있다가 최기식 신부마저 구속되는데 그러면서 김현장이 '부미방' 사건의 최고 주동자로 조작됐다. 그러면 김현장과 문부식은 어떤 관계였느냐. 이 사건 전부터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고, 사건 전해(1981년)에 원주 가톨릭교육원에서 만났을 때 김현장이 문부식한테 광주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1980년 12월)에 대해 얘기한 준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김현장이 '부미방' 사건에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현장을 최고 주동자로 조작해 사건을 키운 것이다.

그와 함께 정부 당국과 언론은 천주교회를 상당히 오랫동안 악랄하고도 집요하게 음해했다. 김현장과 천주교회가 마치 공범 관계인 것처럼 덮어씌우고 천주교회가 용공 세력의 은신처를 일상적으로 제공하는 것처럼 중상했다. 그런 식으로 몰아가면서 천주교회 자체가 용공 세력인 것처럼 선전했다. 이때 정의구현사제단을 포함한 천주교회가 정말 굉장한 공격을 당했다.

프레시안 :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자체는 부산에서 일어나기 2년 전에 이미 광주에서도 발생하지 않았나.

서중석 :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은 파장이 컸다. 이 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보수적인 고신대(고려신학대) 학생들이었다는 점도 눈에 띄었지만, 특히 이 사람들이 이렇게 '부미방' 사건을 일으킨 건 광주 때문이었다는 걸 명백하게 들고나왔다는 점이 파장을 몰고 왔다.

광주항쟁, 광주 유혈 사태와 관련해서 1980년 12월에 광주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이 있었지만, 그때는 당국이 오히려 쉬쉬하고 덮어버렸다. 그게 세상에 알려지면 자기들한테 좋을 것 같지 않으니까 그렇게 처리한 것이다. 그런데 '부미방' 사건은 워낙 큰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때려잡는 데나 천주교의 반신군부 세력을 무력화하는 데 아주 중요하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현장을 앞에 내세우고 최기식 신부까지 구속하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문부식의 항소 이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인을 지켜야 할 개가", 여기서 주인은 국민이나 시민을 가리키는데, "되려 주인을 문다면 그 개가 미친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군부가 이 미친개와 무엇이 다른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저는 광주사태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며 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너무나 커다란 비애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부미방' 사건 관련자들은 '특히 미국이 광주사태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느냐. 미국이 광주 학살이라는 비극이 일어나도록 한 것이 아니냐', 그렇게 사고하고 있었다. 그건 광주 미국 문화원에 방화한 사람들도 그랬고, 다른 많은 학생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광주에 출동해 만행을 저지른 계엄군의 광주 이동을 명령한 총책임자가 주한 미군 사령관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때 했었는데, 엄격하게 따지면 잘못 인식한 것이었다.

광주 학살과 미국의 책임 문제, 그리고 20사단 투입을 둘러싼 이유 있는 오해

프레시안 : 작전권을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이 갖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어떤 부분을 잘못 인식했다는 것인가.

서중석 : 광주항쟁 당시 전두환·신군부는 7공수, 11공수, 3공수 부대와 보병 제20사단을 광주에 보냈다. 이 가운데 공수 부대는 말할 것도 없이 주한 미군 사령관과 분리돼 있는,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부대였다. 미국의 직접적인 책임 문제와 관련해 주로 문제가 된 게 20사단인데, 계엄사는 1980년 5월 20일 밤 공수 부대에 이어서 20사단도 광주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20사단은 5월 21일 아침 광주에 도착하는데, 그다음 날(22일) 주한 미군 사령부가 그것에 동의했다. 이 부분 때문에도 광주 학살과 관련해 주한 미군과 미국의 책임을 묻게 된다.

사실 광주 학살과 같은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는데도 미국은 그런 사태를 전혀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학살을 막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한 적이 없다. '양쪽이 한 발짝 물러나 자제하면서 잘 처리해야 한다', 이런 정도의 태도를 취한 걸 빼놓고는 오히려 계엄군 쪽 입장에 서 있지 않았느냐고 볼 수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20사단의 광주 이동, 이건 주한 미군 사령관의 권한 아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광주항쟁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 책을 보면 상당히 놀라운 얘기가 들어 있다. 뭐냐 하면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도 그렇고 글라이스틴 대사 자신도 그렇고 또 미국 국무부나 국방부도 그랬다는 것인데, 한국 쪽의 20사단 광주 투입 요청을 자신들이 승인 혹은 동의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6년에 미국 국방부 변호사들이 '그건 틀렸다. 한국군 쪽에서 주한 미군 사령부에 통보만 하면 되는 사항이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에 그렇게 틀을 만들어놓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런 세부 사항을 심지어 위컴 사령관도 몰랐던 것으로 돼 있다. 미국 국무부, 국방부도 잊고 있었고 글라이스틴 대사도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뉴욕타임스>도 1980년 5월 미국이 한국군을 광주에 출동시켰다며 이 시기에 미국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는데, 여기서도 미국이 승인했다는 식으로 썼다. (1982년 7월 6일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부미방' 사건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썼다. "(1980년 5월) 위컴 장군은 그의 지휘 아래에 있는 한국 군대를 광주 작전을 위해 출동시켰고, 미국 대사관은 사태 중재를 요청하는 반체제 인사들의 말을 거절했으며, 그 이후 미국은 전두환 대통령을 지지해왔다." '편집자')

상황이 이러했으니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더 그렇게 생각했고 또 학생들은 얼마나 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느냐, 이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내가 아까 동의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동의는 찬성한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프레시안 : 작전권이 미군 손에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미군의 승인 없이 20사단을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인가.

서중석 : 그러니까 애초부터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20사단 이동은 통보 사항이고 주한 미군 사령부 쪽에서는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보완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돼 있다.

20사단은 특수 부대다. 다른 부대, 예컨대 12·12쿠데타 때 서울에 들어온 9사단, 노태우가 사단장이던 그 부대와는 성격이 다르다. 20사단은 소요 진압 부대다. 공수 부대에 준하는 면이 있다. 본래 양평에 있었는데, 5·17쿠데타를 앞둔 1980년 5월 15일 전두환·신군부가 20사단의 2개 연대를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걸 광주에 투입한 건데, 어쨌든 20사단은 주로 진압하는 부대로 공수 부대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20사단을 미군의 통제에서 빼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사단 이동은 미국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고 그쪽에 통보만 하면 된다는 게 법적으로는 맞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그때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돼 있지를 않았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볼 때도 그랬고, 또 20사단이 어떤 부대인가를 한국인들이 잘 모르고 있었다.

(광주항쟁 진상 규명 움직임이 활발하던 1988년 이 문제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다. 그해 7월 5일 대정부 질문에서 이에 관한 질의를 받았을 때 오자복 국방부 장관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당시 광주에 투입, 운용되었던 부대는 3개 공수 특전 여단(7, 11, 3여단)과 보병 제20사단이었다. 1978년 7월 28일 한미군사위원회의 전략 지시 1호에 의하면 특전사 예하 3개 공수 특전 여단은 평시 한미 연합사의 작전 통제 부대가 아니며 20사단은 1979년 10·26사태 시에 이미 연합사로부터 작전 통치권을 인수하여 이들 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권은 전적으로 한국군에 귀속(됐다)."

돈 오버도퍼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개의 한국>에 이렇게 썼다. "(1980년 5월 한국군 당국은) 광주를 재탈환하기 위해 20사단을 광주에 파병하기 전 위컴에게 이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이 20사단은 이미 미군의 작전 통제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그런 승인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워싱턴 정부의 의사를 타진한 다음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미군의 통제 하에 놓였던 적이 없는 잔혹한 공수 부대를 파견하느니 20사단을 파견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두환의 정치 선전 기구들은 이 사실을 십분 활용해 미국이 광주항쟁의 무력 진압을 지지했다고 선전했다." 광주 학살과 무관하다는 태도를 미국이 취해왔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긴 하지만, 당시 상황을 조망하기 위해 살펴볼 만한 대목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박정희 세력이 1961년 5·16쿠데타 직후부터 미군의 통제를 받지 않는 부대를 확보하려 했으며 그것을 정권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 1일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를 창설한 것이다. 당시 5·16쿠데타 세력은 서울을 확고하게 방어할 부대를 갖추지 못했던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후 자신들을 보호할 새로운 부대를 만들려 했다. 그와 달리 미군은 쿠데타 세력이 자의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자신들의 작전권을 침해했다고 보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그러한 미군과 협상해 미군의 작전권 회복에 동의하고, 그 대가로 미군의 작전권에 포함되지 않는 부대인 수방사 창설을 얻어냈다. '편집자')

'부미방', 반미 자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다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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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은 그 후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부미방'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미국에 대한 분노,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된 데에는 광주 학살과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그동안 쭉 살펴본 것처럼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한 역할도 작용했다. 무엇보다 레이건이 대통령 취임 후 첫 번째로 부른 사람이 전두환 아니었나. 그런 걸 보면서 학생들이 느낀 분노가 얼마나 컸겠나. 거기에다가 위컴이, 광주에 군대를 파견한 걸 승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던 바로 그 위컴이 한국인을 쥐에 비유하면서 모욕하지 않았나. 그런 것들이 작용하면서 아주 강렬한 반미 의식을 학생들이 갖게 된다.

'부미방' 사건 관련자들은 굉장한 중죄인처럼 다뤄졌는데도 아주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면에서도 1980년대 학생 운동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줬다. 김은숙은 자신의 책에, <불타는 미국>이라는 강렬한 제목이 붙은 책인데, 이렇게 썼다. "나는 미 문화원 방화를 통해 광주사태로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빌어 전두환 군부 정권을 고발하고 싶었다. 전두환을 위해 기도했다고 하는 종교인과 지식인 역할을 못한 지식인들을 이 자리에서 재판부에 고발하고 싶다." 김은숙이 법정에서 이런 얘기를 하자 법정 뒤편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은숙아!" 하고 부르면서 법정 밖으로 나갔다. 딸이 하는 말이 무서워서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심에서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선고를, 김은숙과 이미옥은 무기 징역을 받았다. 나머지 학생들도 중형을 받았다. 2심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사형 선고를 받았고 두 여학생은 징역 10년으로 감형됐다. 최종심에 가서 김현장과 문부식은 감형됐다.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다음 달인 4월 22일 강원대에서 반미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교내에서 성조기를 불사르면서 시위를 벌였다. 반미 시위라는 점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를 외친 점도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부미방' 사건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 가운데 하나의 큰 물결을 이룬 반미 자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학생들한테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단체가 자민투(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인데 자민투 계열은 '반제 민중 민주주의 혁명론'을 주장했다. 이것이 1986년에 들어오면 '민족 해방 민중 민주주의 혁명론'으로 알려지는데, 이 계열이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4주년을 맞는 1986년 3월 18일 학생들 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반전 반핵 평화 옹호 투쟁위원회'를 발족했다. 이날 학생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반전 반핵 양키 고 홈", "민족 생존 위협하는 핵 기지를 철수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북한 핵이 주요 이슈로 부각된 오늘날과 달리 이 시기에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돼 있었다. 미국은 1958년부터 1991년까지 남한 곳곳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이와 관련, 2005년 최성 의원은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자료를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1958~1991년에 주한 미군 기지 16곳에 핵무기가 배치됐다고 밝혔다. 미국이 핵무기를 철수한 직후인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후 북핵 문제가 불거지고 제네바 합의(1994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서 결국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다. '편집자')

그 당시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구호였다. 특히 여당, 권력 쪽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만 야당, 언론에도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이쪽이 조금 있으면 자민투를 발족하면서 6월항쟁 시기에 학생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 학생들의 첫 번째 중요한 모임이 바로 3월 18일에 열렸다는 것은 '부미방'이 이들에게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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