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폭염도 지나가고 가을입니다. 올 여름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웠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이제는 차분하게 복기를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올 여름을 달궜던 단어는 단연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였습니다. 지금 새누리당과 정부는 전기 요금 태스크포스 팀(TFT)을 만들어서 개편 안을 논의하고 있고, 야당도 별도의 전기 요금 개편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올 여름에 가정용 누진제를 손보는 것과 함께, 산업용 전기 요금을 대폭 올리는 등 전기 요금 체계 전반을 개편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정부가 어떤 방안을 낼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정부는 산업용 전기 요금을 올리는 것에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전기 요금도 민주주의 문제
전력 산업은 거대한 산업입니다. 한국전력의 1년 매출액은 58조 원이 넘습니다(2015년 기준). 한국전력의 매출은 당연히 소비자들이 내는 전기 요금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문제는 전기 요금 결정 과정입니다. 전기 요금을 결정하는 과정에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그동안 전기 요금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몰랐고, 고지서에 찍힌 요금을 내기만 했습니다. 아마도 '전기 사업법'이라는 법을 읽어본 시민들도 거의 없었을 것이고, 그 법에 따라 전기 요금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아는 사람도 아주 소수였을 것입니다.
'전기 사업법'에 따르면, 전기 요금은 한국전력의 약관으로 정하도록 되어 있고, 약관을 변경할 때에는 전기위원회라는 기구의 심의를 받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인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전기위원회에는 형식적으로는 소비자 단체 대표도 참여하긴 합니다만, 1명뿐인 전기위원회 상임위원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이 겸임하게 되어 있는 등 독립성이 없는 기구입니다. 실질적으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전기 요금은 정부와 한국전력 마음대로 결정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전기 요금 결정 과정에 입김을 행사하는 이해관계 세력은 있었습니다.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을 비롯한 소위 경제 단체들은 산업용 전기 요금을 인상하는 것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전기 요금 체계가 왜곡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전기 요금 개편 논의에도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과정은 아직까지 보이질 않습니다. 새누리당과 정부가 구성한 전기 요금 TFT에서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를 똑똑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발전소·송전탑도 마음대로 짓는 전력 독재
전기 요금만이 아닙니다. 그동안 발전소 짓고, 송전탑 짓는 과정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력 독재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부가 수립하는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이라는 계획에 근거해서 발전소와 송전탑을 짓지만, 그 계획의 수립 과정은 투명하지도 않고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도 없다시피 합니다. 지역 주민들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습니다. 정부가 발전소를 짓기로 하면 짓는 것이고, 지도를 놓고 송전선을 그으면 송전탑 공사가 시작되는 상황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경상남도 밀양, 그리고 경상북도 청도의 송전탑 반대 운동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밀양과 청도에서는 여전히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송전이 시작되면서 피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밀양 주민들은 밀양시청 앞에서 피해 실태 조사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경북 청도의 주민들은 한국전력이 제기한 민사 소송(주민들이 법원의 공사 방해 금지 가처분 결정을 위반했다며 제기한 소송)으로 인해 2억 원이 넘는 돈을 배상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있습니다. 연매출이 58조 원 이상이고 작년에 당기 순이익을 10조 원이나 남겼다는 한국전력이 송전탑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내년(2017년) 7월까지 제8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합니다. 최근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국회에서 그런 일정을 밝혔습니다. 제8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은 2031년까지 전력 수요를 예측하고, 그에 따른 발전소 건설 계획을 수립하는 법정 계획입니다. 이 계획에 따라 석탄화력발전소, 원전과 같은 대규모 발전소를 얼마나 지을지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송전선 건설 계획도 수립됩니다.
작년에 발표된 7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은 문제점 투성이였습니다. 핵발전소(원전)를 추가 건설하고, 20개나 되는 신규 석탄 화력 발전소 건설을 기정사실화하는데 초점을 맞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 국회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은 7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의 문제점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타'만으로 끝나서는 곤란합니다. 그동안에도 수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정부는 꿋꿋하게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를 추가 건설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립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폭염이나 미세 먼지 문제를 생각하면 석탄 화력 발전소는 더 이상 안 짓는 것이 맞습니다. 석탄 화력 발전소는 미세 먼지와 온실 기체(온실 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시설이고, 온실 기체는 기후 변화를 야기해서 더 심한 폭염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전은 사고 위험이나 사용 후 핵연료같은 폐기물 처리 문제를 낳기 때문에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시민들이 참여해서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짤 수만 있다면, 시민들은 전력 수요를 효과적으로 줄이고 재생 가능 에너지를 늘리는 방향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전 세계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런 의사 결정이 안 이뤄지는 이유는 몇몇이 밀실에서 실질적인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입법
그래서 지금은 민주주의를 확보하는 입법이 필요합니다. 전기 요금을 결정할 때, 그리고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짤 때에 정부 관료들과 한국전력, 그리고 이해 관계 집단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유럽에서는 시민 의회(citien’s assembly)같은 방식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안에 대해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단순 여론 조사와 달리,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시민들도 좋은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토론 과정은 누구나 지켜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꼭 시민 의회 방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기 요금이나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이 가능한 과정을 짜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법률로 만들어서 정부가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전기 사업법'을 개정해서 이런 시민 참여의 과정이나 공론화 과정을 명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야당 국회의원들이 해야 할 역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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