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는 마치 선악의 잣대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이면 나쁜 것이고,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상대방을 두고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집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성남시, 서울시의 청년배당/청년수당을 둘러싼 논란도 그렇습니다. 최경환 부총리를 비롯한 현 정부쪽 사람들은 청년배당/청년수당은 돈으로 청년들의 환심을 사려는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얘기합니다. 그에 대해, 노인들에게 기초연금 주는 것은 포퓰리즘이 아니고, 청년들에게 청년배당을 지급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냐? 라는 반론도 제기됩니다.
사실 포퓰리즘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포퓰리즘의 뜻은 인기영합주의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대한민국의 온갖 부정적 행태는 모두 포퓰리즘입니다. 땅값 올리는 개발 사업 벌이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이고, 비현실적인 지역 발전 공약을 내세우는 것도 포퓰리즘입니다.
포퓰리즘에 대한 의미 풀이를 찾아보면, '비현실적이고 장기적으로 사회공동체에 도입이 안 된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그렇게 따지면 경제성장률 올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벌여서 환경을 파괴하고 예산만 낭비한 4대강 사업, 그리고 사양산업화되고 있는 원전을 건설하기 위해 돈을 뿌려대고 최소 10만 년 이상 보관해야 하는 방사능 물질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입니다.
사실은 노인들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과 청년들에게 지급하는 청년배당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모두가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이런 제도가 너무 늦게 도입되고 있고 논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늦는 바람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공동체가 많이 황폐화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삶의 질'이 높은 웬만한 국가들은 어떤 형태로든 기초연금과 청년배당같은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덴마크, 네덜란드 등의 국가들은 노인들에게 월 100만 원이 넘는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국가들이 청년들에게 여러 명목으로 현금수당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책이 포퓰리즘이라면, 세계에서 행복한 국가들은 모두 포퓰리즘 국가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포퓰리즘'도 마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포퓰리즘' 판정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좀 새로운 얘기만 꺼내면 '포퓰리즘'이라고 하는 정치인들이야말로 나쁜 '포퓰리스트'입니다.
오히려 지금 성남시와 서울시가 설계한 청년배당, 청년수당 정책은 너무 미흡한 것이 문제입니다. 금액도 적고 지급 대상도 적습니다. 이것은 성남시와 서울시의 탓이라기 보다는 지방자치단체가 가진 재정적 능력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책은 결국 국가수준에서 채택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남시의 청년배당과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상당히 다른 정책입니다. 그래서 이 두 정책의 차이에 대해서도 논쟁이 필요합니다.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청년기본소득 개념의 정책입니다. 심사없이 일정 연령대의 청년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중위소득의 60% 이하일 것, 미취업 상태일 것, 사회활동계획을 제출할 것 등의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심사'라는 선별과정을 거쳐서 지급대상자 3000명을 추려내서 월 50만 원을 최대 6개월간만 지급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조건들이 붙어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이라기 보다는 '활동지원금'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물론 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는 다양한 정책적 시도를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청년배당, 청년수당을 시도해보고, 각각 그 효과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문제는 중앙정부가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중앙정부 돈을 보태주는 것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가 자기 예산으로 해 보겠다는데도 방해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시민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은 배가 아파서 못 보겠다'는 '나쁜 심보'가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쨌든 논쟁은 벌어졌습니다. 논쟁에는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참여를 해야 합니다. 저는 서울시의 청년수당보다는 성남시의 청년배당 정책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수준에서 도입을 하려 한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은 여전히 '선별적 지원'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습니다. 물론 재정 능력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어야 6개월동안 월50만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청년들의 삶에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비빌 언덕'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비빌 언덕'입니다. 심사를 통해 일시적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서 일정한 소득이 보장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많은 금액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월 30~40만 원 정도라도 안정적으로 보장된다면, 청년들에게 최소한의 '비빌 언덕'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계산을 해 봤습니다. 충분히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왜곡된 조세제도를 정상화하고, 상속세, 불로소득에 대한 세금, 법인세·소득세 세율과 과표구간 조정, 탈세방지 등의 조치를 취하면 충분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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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생각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식의 생각이 퍼져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닙니다. 이미 덴마크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대학생에게는 학생수당을 지급하고, 구직청년에게도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나라가 청년들의 자립도 훨씬 빠릅니다. 덴마크 청년들이 대한민국 청년들보다 자립을 잘 하는 이유는 사회가 최소한의 '비빌 언덕'을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비빌 언덕'이 있어야, 단기간의 임시적인 일이 아니라, 자신이 중·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소위 기성세대들은 생각을 다시 해 봐야 합니다. 지금 청년들의 시선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합니다. 최근에 한국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체감청년실업률은 22.4%에 달합니다. 대학교 이상 고학력자이면서 남성인 청년이 가장 심각한데, 이들의 체감실업률은 27.9%에 달했습니다.
앞선 세대들은 이런 세상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들은 이런 세상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청년의 시선으로 보면, 20~30년 전에 비해 대한민국은 더 나빠졌습니다. 지금 청년들이 집을 구입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서울의 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PIR, Price to Income Ratio)은 10이 넘습니다. 10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10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특히 저임금·불안정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지금 출발해야 하는 청년들은 그렇습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최근 청년들에게 '개발도상국에 가서 한 달만 살아보라'는 식의 얘기를 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청년들에게 예의없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앞선 세대로서 참담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회에 나오는 청년들을 환대하고, 그들을 주체로서 존중해주는 것은 앞선 세대가 갖춰야 할 예의일 것입니다. 예의는 말로만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한 사회공동체가 청년들에게 갖출 예의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비빌 언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청년들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청년배당, 청년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제는 '포퓰리즘'이니, 아니니 하는 소모적인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청년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우리 사회가 청년을 환대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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