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구민들, 왜 '주민 발의' 나섰나

[주간 프레시안 뷰] "'주민 안전'을 구의회에서 다룰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핵발전(원자력) 관련 시설이 있는 곳을 꼽으라고 하면, 주로 고리, 월성(경주), 울진, 영광같은 지역을 꼽습니다. 그러나 원전이 있는 곳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원전은 없지만, 핵발전(원자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곳도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대전입니다.

지도를 놓고 보면, 대한민국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곳이 대전입니다. 대전에 무슨 원자력 관련 시설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전에는 여러 시설들이 있습니다. 대전 유성구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에 '하나로'라고 하는 연구용 원자로가 있고, 한국원자력환경공단에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방사성폐기물이 쌓여 있습니다.


또한 유성구에 있는 한전원자력연료(주)는 전국의 원전에서 사용하는 핵연료봉 100%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최근 핵연료 공장을 증설하고 있기도 합니다. 정부가 여전히 핵발전을 확대하는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전 유성구는 다수의 핵 관련 시설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용' 원자로이기에, 혹은 '임시' 폐기물저장소이기에 제도적 안전망에서는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정보공개도 잘 되지 않았고, 안전성 문제에 대해 지역사회 내에서의 공론화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 문제를 자각한 시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유성구 주민들은 한국원자력연료(주)의 공장증설을 반대하는 활동을 했었고, 지금은 대전에 있는 원자력 관련 시설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례제정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다수의 주민들이 직접 청원을 해서 '유성구 민간 원자력 환경·안전 감시기구 설립 및 운영조례'를 제정하여 안전감시기구를 설립하자는 것입니다.

지방자치법에는 주민들이 일정 숫자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조례제정을 직접 청구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 제도는 '주민발의'라고도 불립니다. 그동안 학교급식조례, 보육조례 등과 관련해서 주민발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유성구 주민들은 이 제도를 활용해서 원자력 관련 시설들의 안전을 감시할 수 있는 조례를 만들려고 나선 것입니다.

주민들은 거리에서, 성당에서, 아파트에서 매일 쉼없이 청구인 서명을 받으러 다녔고, 이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호응도는 높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7월 9일에 조례제정운동 본부는 19세 이상 유성구 주민 9450여 명의 서명을 받아서 조례제정을 청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법적으로는 6183명(19세 이상 유성구 유권자의 40분의1)의 서명을 받으면 되는데,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숫자의 서명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이 소식을 접하고, 이제 공은 구의회로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민발의는 안건을 구의회에 상정하기 위한 것이고, 최종 심의는 구의회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자력 관련 시설을 폐쇄하자는 것도 아니고, 주민안전을 위해 민간 차원의 감시기구를 만들어서 운영하자는 취지의 조례인 만큼, 구의회에서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마침 지난 7월 15일 저녁 대전에서 조례제정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주민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로부터 의외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조례가 통과되지 않고 유성구청 조례규칙심의회에서 '각하'될 수도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솔직히 이 얘기를 듣고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지방자치법상 주민발의제도는 주민들이 서명을 해서 지방의회에 조례안을 안건으로 상정하는 제도입니다. 조례제정청구는 형식적으로 지방자치단체 집행부(시·도청 또는 시·군·구청)에 하지만, 집행부는 의견을 붙여서 의회로 보내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조례안을 최종 심의해서 판단하는 것은 지방의회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성구청에서는 주민 9000명 이상이 서명을 받아 제출한 조례가 '상위법 위반'이라면서 구청단계에서 각하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이는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만약 상위법 위반 소지가 있다면, 그 부분은 구의회에서 판단해서 수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민발의는 어디까지나 조례안을 안건으로 제안하는 것일 뿐이므로, 조례안을 심의하면서 수정하는 것은 구의회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원자력 관련 시설이 많아서 주민들의 안전을 담보할 민간기구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는 상위법 위반일 수 없습니다. 아마 중앙정부에서는 '원자력안전 관련 업무는 국가사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앙정부와는 별개로 지방자치단체도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주민들의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조례를 만들고 예산을 투입하면 됩니다.

궁금해서 조례안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내용을 보니 중앙정부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볼 만한 부분은 크게 없습니다. 방사능 오염조사 등의 모니터링 활동을 하고, 정보공개와 주민참여를 확대하려는 수준입니다. 주민들도 상위법이 없는 상태에서 민간기구의 권한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부분적으로 상위법에 위반되는 소지가 있다면, 그 부분은 구의회에서 논의해서 수정하면 될 일입니다.

지방자치를 하는 이유는 주민들의 의견을 지역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반영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민발의와 같은 주민참여제도를 만든 취지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주민 9000명 이상이 애써 서명해서 제출한 조례가 지방의회에 제출되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지방자치나 주민참여제도의 근본취지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주민들이 조례제정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그동안 대전시에 있는 원자력 관련 시설들이 불투명하게 운영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안에 있는 연구용 원자로가 내진설계 기준에 미달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 2년 전, 핵연료봉 공장증설 반대 서명 운동을 하고 있는 대전 유성구 주민들. ⓒ연합뉴스

한편 유성구청은 8만여 명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상위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보공개와 지역주민들의 참여보장을 요구하는 내용의 상위법 개정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위법이 개정되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조례제정을 해서 먼저 민간기구를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지금 원전 주변지역에는 민간환경감시기구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는데, 원자력 관련시설이 많은 대전에 그런 기구가 없다는 것은 주민 안전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전에 있는 원자력시설 반경 1km 내에 초등학교가 있고, 2km 이내에는 3만8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조례제정의 필요성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시민들의 불안이 증폭되지 않도록, 한시라도 빨리 지방자치단체의 조례가 제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권한의 한계가 있더라도 민간환경·안전감시기구가 구성되어 활동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는 안전한 지역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주민들의 최소한의 염원이고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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