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저녁 서울 명동 세종호텔 앞 인도가 300여 명의 시민으로 가득 찼다. 모인 이들의 시선이 닿는 곳, 10미터 높이 도로 구조물 위에 사람이 서 있었다. 찬바람이 불던 지난 2월, 세종호텔에 해고자 6명의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에 올라 그곳에서 다시 겨울을 맞은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세종호텔지부장이었다.
어느덧 300일이 된 그의 고공농성을 맞아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연 투쟁 문화제가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연대 시민들은 고 지부장의 바람이 이뤄져 하루 빨리 땅에서 그를 만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발언을 이어갔다.
고 지부장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 매주 금요일 농성장을 찾아 함께 체조를 하며 '근력연대'를 하고 있다고 밝힌 최희범 씨는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느껴지는 건 저 멀리 버티는 고 지부장이 모든 걸 홀로 짊어질 수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저와 같이 살과 피부와 근육을 가진 사람이고, 피로·외로움·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란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 평범한 몸이 다른 사람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지, 이 땅의 단단한 지지 위에 몸을 누이지 못한지 300일이 됐다. 그 몸이 어떤 한계를 느낄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 지 온몸으로 묻고 있다"며 고 지부장이 고공에서 내려와 "땅을 밟는 그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농성 중인 고 지부장에게 매일 아침 식사를 전하고 있는 개신교대책위에서 활동하는 전남병 목사는 "2010년 정도부터 장기투쟁 노동자와 연대했다"며 8년 가까운 거리농성 끝에 2015년 복직한 재능교육 해고자들의 싸움, 426일 고공농성 끝에 2019년 복직한 파인텍 해고자들의 싸움 등을 예로 들었다.
전 목사는 그 싸움을 하는 동안 "온몸이 아팠다. 서러워 눈물이 났다"며 "그렇지만 모두 승리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고 지부장도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 개신교인들 끝까지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멜로디언'이라는 활동명으로 자신을 소개한 한 시민은 지난 겨울 "멜로디언을 들고 연주 연대를 하는데 손이 꽁꽁 얼어 소리도 못 낸 적이 있다. 그때 허지희 세종호텔지부 사무장이 장갑을 줬다"며 "악기를 연주해야 해 어쩔 수 없다고 했는데 손가락 부분을 잘라서 줬다. 그때 마음이 묶여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 후로 계속 왔는데 올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제가 더 받은 게 많다. 셀 수 없이 많은 밥을 얻어먹고 따스한 걱정과 사랑을 받았다"며 "즐거운 선택지를 만들어줘 지난 겨울 춥지 않았고 연대가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고 지부장에게 "내려오면 같이 공연하자. 너무 많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동병상련의 고통을 겪고 있는 해고자들도 이날 문화제를 찾아 고 지부장의 싸움에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학내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뒤 해임돼 이의 철회를 요구하며 700일 가까이 싸우고 있는 지혜복 교사,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서 600일 고공농성을 하며 해고자 7명의 복직을 요구한 박정혜 씨가 속한 옵티칼지회의 최현환 지회장 등이었다.
차들이 오가는 도로 너머 고공에서 문화제를 지켜본 고 지부장은 발언이 끝날 때마다 둥둥 북을 울리며 화답했다. 문화제 말미 고 지부장은 확성기를 들고 "한 분 한 분의 소중하고 힘 나는 발언을 듣고 감동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일터로 돌아가는 투쟁 더 힘내서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이에 앞서 같은 날 오전에는 백도명 서울대 명예교수, 송수영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 공동의장 등 시민사회·종교단체 원로들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을 찾아 고 지부장의 복직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고용위기를 이유로 2021년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세종호텔이 "2023년부터 흑자 경영으로 전환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외친 '다시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는 절규는 잔인하게 묵살됐다"며 당시 해고는 "민주노조 조합원 12명"을 겨냥한 "표적 정리해고"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은 4년 넘게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다. 고 지부장은 '하늘 감옥'에서 홀로 생존을 걸고 버티고 있다"며 "하지만 고용노동부도, 집권여당도 고통받는 노동자 편에 서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이들은 "해고 노동자가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것은 일터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이며 정리해고라는 일터의 비상계엄령을 끝내는 일"이라며 "이재명 대통령은 세종호텔 정리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서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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