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통념에 의한 재판? '지동설' 갈릴레오 재판 같다"

"억울하면 국민참여재판 활용하란 말, 강간통념 활용하란 말과 동의어"

"갈릴레이가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것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큰 오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데 마치 기존의 강간통념에 의해서 재판을 하는 것이 저는 천동설에 의해서 재판을 하는 것과 같다고 느껴집니다."

현직 부장판사가 강간통념이 만연한 사법부를 정조준했다. 김동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는 22일 국회에서 열린 '형사소송 절차상 성폭력 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한 토론회'에서 여전히 '강간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원의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강간을 미화하거나 성폭행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고 보는 강간통념을 갈릴레오 시대의 천동설에 비유했다. 갈릴레오를 심판대 위에 오르게 한 천동설이 오류였듯,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삶을 재단하고 불리한 재판에 이르게 하는 강간통념 또한 오류라고 했다.

그럼에도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모텔에 따라간 경우, △가해자를 클럽에서 만난 경우, △연인 사이인 경우, △피해자가 유흥업 종사자인 경우, △전에 일부 신체 접촉이 있었을 경우, △피해 즉시 현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경우 불리한 판결을 받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김 부장판사는 다만 "여전히 하급심에서는 이런 과거의 기준에 맞춰져 있는 판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최근 대법원에서 좋은 판결들이 많이 선고가 됐다"며 "사실은 법원은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직 사회 일반 대중의 인식은 법원의 변화만큼 따라오지 못했다"며, 이 때문에 국민참여재판 사건에서 가해자가 무죄를 받거나 낮은 형량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김 부장판사는 "판사는 유죄 주장과 무죄 변론에 대해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하지만,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들은 짧은 시간 내 판단해야 해서 (위에 열거한)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 그 다음부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섬세한 판단이 이뤄지기 어렵다"고 한계를 짚었다.

그러면서 "피고인들도 국민참여재판으로 가는 것이 하나의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지난 2021년 5.1%였던 국민참여재판 1심 무죄 선고율이 2022년 31.5%로 6배 넘게 증가했다며 김 부장판사의 언급을 실제 수치를 통해 설명했다.

그는 성범죄 전담 변호인들이 국민참여재판을 승소 전략으로 적극 홍보하는 것과 관련해 "강간통념을 활용할 수 있다는 조언이 아니라 '피의자로 몰려 억울하다면 국민참여재판을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은 일반 시민인 배심원들이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에서 기인해 유죄보다는 무죄 평결을 할 가능성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동의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민참여재판이 아니라도 가해자 변호인들이 강간통념을 기반으로 변론하며 그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다수 발생한다고 비판했다. 최 부소장은 이 과정에서 지난 4월 총선에서 후보로 나선 변호사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해당 변호사는 헌법상 기본권을 근거로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고, 변호사로서 윤리적 의무를 근거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로 수임을 거절하지 않는다며 성폭력 가해자 변론권에 대해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성폭력 가해 변호 과정에서의 문제를 마치 충돌하는 가치인 것처럼 해석하거나 혼동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행한 범죄가 분명함에도 이를 달리 주장하기 위해 적극적 변호 과정에서 피해자 비난, 의심, 더 나아가 성폭력 통념이나 왜곡된 인식을 기반으로 한 추가적인 피해를 양산한다면 그것은 변호인의 적극적 변론권 하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2차 피해 발생의 과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모습. ⓒ연합뉴스

"형사소송서 소외되는 피해자…피해자는 당사자입니다"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 김진주(필명) 씨는 강간‧살인미수 사건의 피해 당사자임에도 형사소송절차에서 철저히 배제‧소외됐습니다.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그 어디에서도 피해자인 진주 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알려달라고 요청해도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내세워 고통을 더했습니다."(반성폭력 활동가 '연대자 D')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성범죄 형사소송 과정에서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현 제도도 2차 피해를 유발하는 요소라는 지적도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도록 성범죄 소송 절차를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변호해 온 안지희 변호사(법률사무소 안지희)는 수사부터 재판까지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가 궁금해하는 사건 자료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피해자의 몸에서 가해자의 유전자가 나왔는지 확인하는 채취 후 피해자가 검사 결과를 물어도 '수사 기밀'이라는 이유로 답변을 듣지 못하거나, 재판부에 진술서·반성문 등 가해자 측이 제출한 자료의 열람을 요청해도 거부당하는 식이다.

특히 재판 과정에 따라 가해자는 성폭력 혐의를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등 진술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피해자는 2차 가해 방어와 합의 등에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와 달리 피고인은 방어권 행사를 이유로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일삼는다. 반성폭력 활동가 '연대자 D'는 "피해자의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고 감금·폭행한 '바리캉 교제폭력 사건' 가해자의 변호사는 증인신문을 명분 삼아 피해자에게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라며 "두 차례에 걸친 증인신문 후 피해자는 실신, 병원에 실려 갔고 이후 폐쇄병동에 입원했다"고 2차 가해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간 방어권 불균형 현상이 생긴 배경에는 과거 우리나라 국가권력이 수사·재판을 도구로 시민들에게 과도한 폭력을 행사했던 과거가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형사소송의 대원칙으로서 피고인 방어권을 강조하게 되면서 피고인인 성폭력 가해자의 권리는 지켜지게 된 것이다. 반면 형사소송의 당사자가 아닌 피해자는 방어권을 보장받을 길이 없다.

이에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형사절차 참여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주장했다. 독일의 경우 성범죄 등 강력범죄의 공판절차에서 피고인이 부당하게 피해자에게 범행과 관련한 책임을 전가하거나 경멸 또는 비방하는 것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의 질문권·증거신청권 등의 참여권을 보장하고 있다. 일본도 2005년부터 피해자에게 재판에 참여해 의견을 진술하고 질문할 권리 등을 보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2010년 법무부가 범죄 피해자의 권리를 확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추진했고, 지난 5월 △피해자에게 가해자 주소 정보 제공, △재판기록 열람·등사권 강화, △범죄피해자 보호·지원 신청 서류 간소화 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무부의 개정안은 21대 국회가 종료됨에 따라 자동으로 폐기됐다.

안지희 변호사는 "지금이라도 피해자 참가 제도에 대한 재논의를 시작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력하게 촉구해야 한다"라며 "22대 국회에서는 피해자가 형사절차에서 주변인이 아닌 당사자임을 전제로 한 피해자 보호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대한변호사협회·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공동주최했다.

▲가해자 20년 선고에 눈물 흘리는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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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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