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의 1만6450명 '블랙리스트', 성희롱 알바 등 문제인물 피하려 했다?

[경제뉴스N시선] 쿠팡 블랙리스트 관련 보도 읽기

쿠팡의 물류 자회사 쿠팡풀필먼스서비스(CFS)가 'PNG 리스트'로 불리는 블랙리스트 파일을 작성 및 관리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무려 1만6450명이 리스트에 등재된 대형 사건이다. 그런데 과거의 블랙리스트 사건들과 달리 이번에는 이 리스트를 블랙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쿠팡 사측이 '인사평가 자료'라고 집요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쿠팡 내부 전산망의 PNG 리스트 관리 프로그램의 도메인이 blacklist.html로 끝난다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쿠팡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이번 블랙리스트는 옹호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쿠팡에 취직한 적도 없고 쿠팡 관련 기사를 쓴 적이 한 번도 없는 기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같은 민감한 개인정보가 모두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사평가라고 주장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현장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려 1만6450명의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고 6년 이상 보관했다는 주장에도 무리가 따른다. 그런데도 다수의 언론 매체는 이것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처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우선 쿠팡을 옹호하는 언론 보도는 쿠팡 사측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거나, 인터넷 공간의 댓글 일부를 가져와서 소개하는 형식을 취했다.

"성희롱 알바 뽑으라고?" 쿠팡 '블랙리스트' 의혹에 "당연한 조치" 여론 확산(24.02.14 아이뉴스24)

쿠팡 '블랙리스트', "당연한 것 아냐?"...성희롱·무단결근 알바생 또 뽑으라고?(24.02.14 매일신문)

<아이뉴스24>와 <매일신문>의 기사 제목은 마치 복사본처럼 비슷하다. 둘 다 쿠팡의 PNG리스트를 "인사평정 자료"라고 불렀다. 그리고 "문제 있는 사람을 거르기 위한 리스트 작성은 타당하다"는 댓글 등 쿠팡의 주장과 일치하는 댓글들을 골라서 소개했다. 성희롱이나 범죄로부터 물류센터를 지키기 위한 타당한 조치라는 것. 바로 이런 주장, '문제 있는 사람은 걸러야 한다'가 쿠팡 옹호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리스트에 오른 1만6000명이 다 범죄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법조문과 현실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노동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다. '문제 있는 사람은 걸러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모든 것을 덮을 수는 없다. 그 논리대로라면 지난 정권의 '문체부 블랙리스트'도 용인해야 한다. 문제 있는 문화예술인은 걸러야 하니까. 근로기준법 위반이 명백한 조선소 하청노동자 블랙리스트도 용인해야 한다. 문제 있는 하청노동자는 걸러야 하니까….

"일용직 쓰는 기업엔 다 있다"…쿠팡 유혹하는 '블랙리스트'[곽용희의 인사노무노트](24.02.15 한국경제)

폭행·명예훼손에 문서조작 논란까지..민주노총 '묻지마 고발'에 쿠팡만 '속앓이'(24.02.15 파이낸셜뉴스)

<한국경제> 기사는 단순히 댓글을 소개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유통‧물류업계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려는 '유혹'을 느끼게 되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유혹의 핵심은 유통‧물류업계의 '일용직 채용' 시스템이다. "그때그때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이 들어와서 원하는 만큼 일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체계화된 채용‧인사 검증 절차"가 없다. 그래서 내부에서 불법 사례가 적발될 경우 "형사 고소 외에 별다른 징계를 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 문제라고 <한국경제>는 지적한다. 징계란 고용이 계속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앱을 통해 일용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는 근로계약 기간이 단 하루라 징계 수단이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경제> 기사는 비록 사측의 입장을 더 많이 대변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다. 문제를 일으킨 노동자가 정규직이라면 정상적인 징계 절차를 밟을 수 있지만, 일용직 고용에 의존할 때는 별다른 징계 수단이 없다! 그게 바로 일용직을 대거 고용할 때 사측이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인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그 '리스크'를 해결하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노동자의 노동권을 침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법이 있는 것이다. 유통업계의 이런저런 특성이나 기업의 고유한 권한이 법에 우선할 수는 없다.

근로기준법 제40조는 '취업 방해의 금지' 조항으로, "누구든지 근로자의 취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비밀 기호 또는 명부를 작성‧사용하거나 통신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쿠팡의 블랙리스트는 '명부'에 해당하고, 최소 24주 동안 '취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므로 근로기준법 제40조 위반으로 판단할 수 있다. 쿠팡 사측도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구센터1', '잠실센터'와 같은 암호명을 사용했던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도 <한국경제> 기사는 "블랙리스트는 플랫폼 업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수단"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기업이라면 블랙리스트를 암암리에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어느 인력업체 관계자의 말을 전한다. 이 관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근로기준법, 개인정보호법 등 현행법 위반이 대대적으로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이니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고용노동부가 당장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기업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야 할 판이다.

<파이낸셜뉴스>는 노동조합이 "묻지마 고발"을 한다고 비판한다. 그동안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택배노조가 직장 괴롭힘, 부당해고 등을 문제 삼았지만 법원이나 정부기관에서 무혐의 처리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법원이나 정부기관의 판결이 항상 절대적으로 옳을 경우에만 성립하는 주장이다. 반대로 기업에 관대하고 노조에 가혹한 사법기관의 과거 무혐의 처분들이 문제를 더 키워서 지금의 사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자의눈] '기업'에 절대적인 '정치'…쿠팡과 국제그룹(24.02.21 아시아투데이)

[기자의눈] 쿠팡 블랙리스트의 양면성(24.02.18 에너지경제신문)

<아시아투데이>는 쿠팡 블랙리스트 폭로를 1985년 재계 서열 7위였던 국제그룹이 해체된 사건에 비유했다. 언론과 정치권이 '기업 때리기'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언론사 한 곳에서 소송을 각오하고 어렵게 블랙리스트 의혹을 보도했는데 그것을 독재 권력이 말 안 듣는 그룹을 해체한 사건과 연결하다니, 누가 봐도 과도하다.

나아가 <아시아투데이> 기사는 "문제 있는 직원의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다른 기업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매해 연말 대부분의 기업들이 A, B, C, D로 직원들의 고과를 메기는 것처럼 말이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쿠팡 물류센터의 일용직은 하루 단위로 입사와 퇴사를 반복한다. 그날의 근무가 끝나는 순간 "직원"이 아니게 되고, "직원"이 아닌 사람에 대한 자료는 인사평가 자료가 아니다. 쿠팡의 리스트 작성은 재직 상태인 직원들에게 A, B, C, D를 매기고 그 자료를 보관하는 것과 전혀 다른 행위였다.

똑같은 '기자의눈'이지만 <에너지경제신문>의 기사는 훨씬 낫다. 적어도 "소속 근로자가 아닌 다른 대상자를 임의로 정해 블랙리스트로 확대 작성"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마도 기자와 국회의원의 정보를 수집한 행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이 기사는 당당하게 "블랙리스트"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마켓컬리에 이어 쿠팡까지… 물류 회사 '블랙리스트' 논란 반복되는 이유 따로 있다(02/20 YTN)

쿠팡은 억울하다?…블랙리스트가 뭐길래 [기업 백브리핑] (02/22 SBS)

YTN과 SBS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YTN에 출연한 장윤미 변호사는 "이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사실상 다시 이 물류 알바를 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라면서, 쿠팡 블랙리스트의 법 위반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한 자세로 답변을 이어갔다. 그리고 시민에게는 만약 자기 직장에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의심되면 지역 노동청에 진정을 넣으라고 조언했다.

SBS 역시 노동계와 쿠팡 양쪽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과거 마켓컬리, CJ대한통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무혐의 처분이 나왔다며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주목"된다고 전했다. 그래도 보도를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다.

▲ <뉴닉>에서 쿠팡의 ‘취업 제한’에 대해 구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조사한 결과. ⓒ뉴닉

시사 뉴스레터 <뉴닉>에서는 쿠팡 블랙리스트에 대한 구독자들의 의견을 조사했다. 그런데 질문에서 근로기준법상의 용어인 '취업 방해'가 아닌 '취업 제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쿠팡의 법 위반 여부가 아니라 '문제 있는 사람은 걸러야 한다'에 대한 직관적 판단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조사 결과는? "막을 수는 없다"는 답변이 57.4%,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답변이 23.8%였다. 근로기준법 제40조를 먼저 알려주고 나서 조사를 진행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그래도 <뉴닉>은 조사 결과에 대한 해설에서 양쪽 입장을 균형 있게 소개했다. '취업 제한'을 막을 수 없다고 답한 사람들은 "채용은 고용자가 주도권을 갖는 게 타당하다", "매일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고용하는 쿠팡의 입장에서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도 이해는 간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블랙리스트는 안 된다고 답한 사람들의 첫 번째 이유는 "근로기준법상 불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밖에 "범죄자 등 특수한 경우가 아닌데 정당한 이유 없이 입맛대로 노동자를 걸러 가면서 받는 것은 불법", "어떤 식으로 악용될지 알 수 없으니 단호하게 막아야"라는 의견도 있었다. 우리의 학교 교육이 노동자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기계적 중립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보도들을 살펴보자.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 쿠팡, 단기직만 뽑아 노동자 갈아 끼웠나(24.02.20 경남도민일보)

잇달은 유통·물류업체 '블랙리스트' 논란, 왜? (24.02.22 경향신문)

'쿠팡 블랙리스트' 악용 소지…이유 모른 채 일용직 재취업 거부당해(24.02.16 한겨레)

<경남도민일보>는 김해, 창원 등 경남 지역의 쿠팡 물류센터에 블랙리스트 등재 인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보도하면서 "일용직 노동이 만연한 물류센터에서는 수시로 노동자가 바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는 "이러한 고용 형태 한계를 보완하고자 기업이 만들어낸 '꼼수'라는 지적"이 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일용직·계약직 노동자들이 재취업 배제 명단에 오르더라도 배제 사유가 적당한지 다툴 수 없다는 점을 짚었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노동자를 해고하면 부당해고로 보지만, 쿠팡은 현장 노동자 다수를 일용직으로 채용하면서 이런 규정을 피해간다는 것이다. 참고로 모든 물류센터가 쿠팡 물류센터처럼 일용직을 대거 채용해서 운영되지는 않는다.

<한겨레>는 "이런 식의 노무관리가 사실이라면 입직과 이직이 반복되는 플랫폼 산업에서 회사 쪽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보도했다. 정말 중요한 지적이다. 플랫폼 기업들은 일할 사람을 쉽게 불러 모아 일을 시키고 이윤을 얻으면서도 근로기준법의 해고 제한 규정 등을 회피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플랫폼을 통해 일하다가 블랙리스트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방식으로 사실상의 ‘부당해고’ 내지 일감 배정 불이익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 있는 사람'은 걸러야 한다는 식의 접근을 허용할 경우 택시 호출 플랫폼, 배달 중개 플랫폼, 청소 플랫폼 등에서 수만, 수십만 명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져도 제재할 수 없다. 이 점은 고용노동부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노동권과 근로기준법에 대해서는 물론, 다양한 형태로 일을 하고 있는 플랫폼 노동자의 권리 보호에 관해서도 발전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먼저 블랙리스트를 블랙리스트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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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이

안진이 더불어삶 대표는 더불어삶 회원들과 함께 해고노동자 지원, 인터뷰, 강연 기획 등 노동 현장에 도움 되는 활동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모순을 파악하고 공론화하는 일에도 기여하고 싶어서 경제 뉴스와 각종 문헌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김헌동의 부동산 대폭로>, <톡 까놓고 이야기하는 노동>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더불어삶 뉴스레터 구독 링크 https://livetogether.substa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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