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는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에 이은 독일의 5대 도시에 포함된다. 독일은 역사가 말해주듯 프로이센 왕국 주도로 여러 군소 공국을 통합해 만들어졌다. 철도는 독일을 묶어주는 인프라로 작용했다. 주요 공국들의 중심도시들을 연결하는 철도망은 어느 한 도시에 자원을 쏟아 넣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 특성에 맞는 균형 발전을 이끌었다. 서울과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된 한국과 다른 점이다.
베를린은 수도로서 정치, 문화적 도시로 성장했고 프랑크푸르트는 경제, 금융 중심 도시가 됐다. 프랑크푸르트시의 인구는 약 80만 명이고 주변 도시를 포함하면 240만 명, 광역권 외곽까지 확장하면 600만 명 정도가 모여 살고 있다. 인구만 보면 한국의 대구나 인천 정도의 규모이지만 유럽의 경제, 금융, 교통 허브로서 그 위상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동을 중심으로 실시된 조사 중에 세계적으로 규모가 큰 조사 중 하나가 독일의 이동성(Mobilität in Deutschland, MiD)조사다. 2002년, 2008년, 2017년에 이어 2023년에 이뤄진 이동성 조사는 교통이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라 지역과 계급, 또 사회문화적 조건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동 횟수를 토대로 지역별 분담률을 분석한 <MiD 2023 보고서>에 따르면, 대도시의 자동차 이용은 33.6%임에 반해 농촌지역은 63.2%로 지역적으로 약 두 배의 차이를 보인다. 반면 공공교통은 도시와 농촌이 각각 20.4% 대 4.8%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경제적 지위 또한 이동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고소득층의 86%가 매일 이동하는 반면, 저소득층은 74%에 불과하다. 두 집단 간의 격차는 2017년 MiD 조사에 비해 8%에서 12%로 소폭 확대됐는데, 이동에서도 빈부에 따른 양극화가 서서히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시민들의 사회 참여나 이동권 측면에서 불평등의 사회구조적 조건들이 축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월 63유로로 장거리 고속열차를 제외한 독일의 모든 공공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도이칠란트 티켓과 사회적약자에 대한 각종 요금 할인정책은 경제적 차이에 따른 이동 격차를 해소하는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 한국에서 공공교통의 주요 의제 중 하나인 교통 요금 감면이나 무임 정책의 출발점은 운영기관의 적자에만 집중돼 있다. 이는 적자분을 어떻게 상쇄할 것인가로 초점이 잡혀 무임 정책을 폐기하거나 요금을 인상해야 한다는 근거로 작용한다. 시민들의 이동권을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른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교통 정책이 설계되고, 그에 따른 운영기관의 적자 구조 개선 방향을 사회적 합의로 도출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시간대를 막론하고 수없이 찾았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은 그때마다 인파로 북적였다. 강철 아치로 둘러싸인 거대 공간 안에 24개의 승강장이 있고, 승강장마다 쉴 새 없이 열차가 들어오고 나간다. 독일 전역으로 연결되는 고속열차 ICE와 도시 간 장거리 특급 IC,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로 향하는 국제열차들은 물론 프랑크푸르트 광역권을 연결하는 열차들을 타려는 승객들이 파도처럼 움직이는 공간이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이다. 중앙역 바로 아래로는 도시를 촘촘히 엮고 있는 광역전철 S반과 지하철 U반 승강장이 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은 이용객들의 소지품 분실로도 유명한 역이었다. 독일 여러 도시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프랑스로 가는 승객들은 긴 여정 끝에 이 역 승강장으로 내려와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갖는다. 역에서 선로가 끝나는 두 단식 구조여서 진행 방향을 바꾸기 위해 열차 운전실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정차 시간이 다른 역보다 길기 때문이다.
여정이 남은 승객들은 승강장으로 내려가 스트레칭하거나 담배를 피운다. 이때 승강장에서 대기하던 친구들이 객실에 올라타 빈 좌석의 선반이나 좌석에 놓인 가방을 들고 내린다. 객실에서 보면 승객들이 자신의 짐을 들고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남의 물건을 손에 넣은 이들은 일단 승강장에 내려서면 인파에 섞여 쉽게 종적을 감출 수 있다. 잠시의 휴식 끝에 열차에 올라탔던 승객들은 열차가 출발한 뒤, 심하면 내리는 역에 가서야 자신의 짐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2012년 독일 철도 공사 관계자들과의 만남 뒤에 베를린에서 출발해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거치는 여정에서 우리 팀 중 한 명도 같은 방식으로 소지품을 분실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방문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는 승객의 가방을 노리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었다. 순찰을 도는 경찰들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고, 무엇보다 승강장에서의 흡연이 거의 사라진 탓도 있는 것 같았다. 중앙역 승강장은 한때 자욱한 담배 연기로 유명했는데 몇 년 사이에 흡연이 사라졌다. 눈썰미를 키우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점이 파리나 로마의 역들과 뚜렷이 다른 점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교통을 책임지는 것은 광역전철 S반과 지하철 U반, 트램이다. S반은 독일철도공사(DB)가 운영하고 나머지 교통수단은 라인강과 마인강을 따라 형성된 15개 지역과 11개 도시가 참여하는 라인마인교통협회(RMV)가 관리한다. 프랑크푸르트 대중교통을 총괄하고 있는 RMV는 DB와 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여 상호 연계돼 있다. 두 기관의 시스템이 연동돼 있어, RMV 홈페이지나 DB Navigator 앱 어디서든 동일한 구간의 대중교통 티켓을 검색하고 발권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광역권의 모든 역과 버스, 트램정류장에는 붉은색의 DB, 초록색의 RMV가 설치한 티켓판매기가 있다. 운영기관에 상관없이 지역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티켓 구매가 가능하다.
한 지역의 교통수단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공공교통정책, 공간구조로 볼 수 있다. 공공교통정책은 공동체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보존하는 시민의식과 정치의 결합을 통해 나타난다. 한국 사회에서 추진되는 민자사업은 여러 추진 주체의 장황한 필요성 설명에도 불구하고 설계에서부터 이익은 사업자가 가져가고 손실은 사회로 전가되는 형태로 진행됐다. 선거철만 되면 거의 모든 정당이 민자사업을 마법의 카드처럼 내미는 한국의 현실은 공공교통정책을 제대로 세우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면 S반 승강장이 나온다. 특이한 점은 한 승강장에서 여러 노선의 광역전철을 탈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전철은 환승역이 아닌 이상 탑승하는 열차의 운행 노선은 동일하다. 반면 프랑크푸르트의 많은 역은 한국의 버스 정류장처럼 한 승강장에 여러 노선의 열차가 정차한다. 그래서 승객은 자신이 가는 목적지가 S반 몇 호선인지 살펴보고 승강장의 전광판이나 열차 전면과 측면에 표시된 호선 표시를 확인한 후 열차를 타야 한다. 중앙역을 기점으로 프랑크푸르트 각 지역으로 확산하는 노선의 특징은 지역의 공간구조와 철도 확장의 역사성을 담고 있다.
교통관점에서 본 프랑크푸르트와 주변 도시의 특징은 도심 내 도로정체가 심각하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아예 정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대에는 정체를 피할 수 없다. 이때에도 정체 구간은 프랑크푸르트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아우토반 A5선의 진출입로 같은 곳이다. 글로벌 교통통계 분석기관 'TomTom Traffic Index'의 2025년 데이터를 보면 프랑크푸르트의 러시아워 도심구간 자동차 평균속도는 시속 17.5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프랑크푸르트가 다른 유럽이나 아시아의 도시에 비해서 쾌적한 교통환경을 갖고 있는 것은 철도를 중심으로 한 공공교통과 자전거 덕분이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사가 자리 잡은 롸머 광장에서 뻗어나간 중앙 도심은 도보나 자전거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는 트램과 지하철이라는 좋은 대안도 있다. 자전거도로는 자동차로부터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독립된 차선이 할당돼 있고 그 중 상당 부분은 물리적 턱으로 구분된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서울 도로와는 큰 차이가 있다.
도보, 자전거, 트램 우선의 이동 환경을 보장한다는 것은 자동차 이용자에게는 더 큰 불편을 준다는 것이다. 또 불편하기 때문에 자동차 이용을 자제하게 되고, 이는 도로 혼잡도, 환경, 교통 사고 등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유도한다. 정책적으로 자동차 이용을 억제하는 설계가 오랜 시간 누적되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은 늘어난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차 이용에 따른 불편함은 당연한 것이 되고 사람들은 이에 적응하게 된다.
안 이달고 파리 시장, 사디크 칸 런던 시장, 아다 콜라우 전 바르셀로나 시장의 공통점은 자동차 이용에 불편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는 점이다. 만약 한국에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가 자동차 이용을 불편하게 하겠다는 공약을 한다면? 지탄을 받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을까?
프랑크푸르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눈에 들어온 것은 책 읽는 사람들이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한국 기업들이 몰려있는 에쉬본 남역 행 S반 열차 안에서는 내 앞에 앉은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책을 펼쳐 들고 읽고 있었다. 책 읽는 사람이 사라진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도심에는 대형 서점도 있었지만 동네 곳곳 작은 서점들이 특유의 아늑함을 간직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매년 평화상을 수여하는 장소인 파울교회에서 대각선으로 도로를 건너면 이 교회 이름을 딴 작은 서점이 있다. 서점은 출입문 앞 도로에 가판을 설치해 사진집을 할인해 팔고 있었는데 옛 독일 철도의 여러 장면을 담은 희귀 사진집을 보고는 몇 권을 덥석 집어 들었다.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주 요르단 거리 11번지에 있는 서점은 시간을 내어 일부러 찾아갔다. 중앙역에서 지하철역으로 이동해 4호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가면 보켄하이머 바르트(Bockenheimer Warte) 역이다. 자연사 박물관 쪽 출구로 올라가 박물관 옆으로 나 있는 대로를 따라 200여 미터를 걸으면 괴테 대학 캠퍼스가 나온다. 캠퍼스를 지나 만나는 작은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면 요르단 거리가 시작된다. 건물 몇 개를 지나치면 작은 동네 서점을 만날 수 있다.
요즘 한국은 곳곳에 러닝 크루가 만들어질 정도로 달리기가 인기를 끌고 있다. 과거에도 한국에서 달리기 붐이 인 적이 있었는데 <나는 달린다>라는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됐다. <나는 달린다>는 독일 정치인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가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통과할 때 달리기를 통한 치유를, 인간 내면을 성숙시키는 사유의 시간을 갖게 하는 달리기 예찬을 담고 있는 책이다. 2000년대 초반 IMF를 통과하고 무한 경쟁에 내몰린 한국인들에게 피셔의 달리기는 위로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피셔는 좌파 활동가가 돼 68혁명에 참여하고 71년에는 오펠 자동차회사에 취업해 노동자를 선동한 혐의로 해고되기도 한다. 76년부터 81년까지는 택시 운전기사로 일했다. 81년 이후에는 요르단 거리 11번지, 내가 방문한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 작은 동네 서점의 이름은 칼 마르크스 서점이다.
서점은 68혁명이 만들어 냈다. 유럽에서 학생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 서독의 학생들도 기성 질서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 출판사와 편집자,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기금을 모아 1971년에 서점을 만들었다. 서점은 독일사회주의학생연대(SDS;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의 구심점이 되었다. 피셔는 이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1983년 녹색당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1998년 슈뢰더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고 연정 파트너로 녹색당이 함께 하면서 피셔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에 임명돼 2005년까지 장기 재직한다.
서점은 1989년 극우파에게 방화 공격도 받았지만, 독일 도서 전문 잡지 <Buchmarkt>의 올해의 전문서점(2013년)으로 선정되기도 하면서 55년이라는 긴 역사와 사연을 간직한 채 살아있다.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의 금융, 경제 중심지로서 현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도시이지만 공산당 선언을 쓴 칼 마르크스의 이름을 딴 서점도 존재하는 곳이다. 광기의 세기를 지나온 독일 사회가 다양성과 포용성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독일 사회의 포용성은 시민들이 늘 접하게 되는 교통신호등에서도 볼 수 있다. 2018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성소수자 퍼레이드인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 행사를 앞두고 이 거리 10곳의 보행자 신호등의 디자인을 바꿨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과거 행사 기간 임시로 교체했던 것을 영구적으로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신호등은 레즈비언과 게이 커플이 손을 잡고 서 있거나 함께 걷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신호등 설치에 적극적으로 나선 실비아 베버 시의원은 "이 작은 조치는 평등, 포용, 그리고 배척 반대를 위한 중요한 상징이며, 프랑크푸르트의 평등 정책과 LGBTIQ 커뮤니티의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교통부와 통합교육부도 협력해 만들어진 성평등 신호등은 포용의 도시 프랑크푸르트 거리에서 깜빡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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