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별세…생존자 37명

"하루에 40여 명 상대…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가 23일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로써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어들었다.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은 김군자 할머니가 이날 오전 8시 4분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192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0살에 아버지를, 14살에 어머니를 잃으면서 이후 친척 집에서 생활했다.

김 할머니는 16살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약속하기도 했지만 17살이던 1942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 위안소로 강제 동원되면서 이후 고난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나눔의 집에 따르면 김 할머니는 중국 훈춘에 도착해서도 돈을 벌기 위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위안소 생활이었다.

김 할머니는 당시 생활에 대해 "하루에 40여 명을 상대로 성 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고 진술했다.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생긴 상처로 김 할머니는 이후에도 왼쪽 귀를 쓰지 못했다.

위안소 생활 중에 도망을 치기도 했지만 번번이 발각됐고 이후에는 끔찍한 구타가 이어졌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 3년 동안 7번의 자살 시도를 했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김 할머니는 38일 동안을 걸어서 한국 땅에 도착했다. 고향에 돌아온 뒤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동거했지만 남자 쪽 부모의 반대로 결혼은 어려웠고 결국 이 남성은 자살을 택했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지만, 이 아이도 5개월 만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 계속 혼자 살았던 김 할머니는 1998년 나눔의 집에 들어와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 등을 모아 본인처럼 부모가 없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써달라며 2000년과 2006년 두 차례 총 1억 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다. 또 나눔의 집이 위치하고 있는 퇴촌의 성당에도 장학금으로 써달라며 1억 5000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이 주최한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본인의 과거사를 증언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빈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 차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5일에 치러지며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 공원이다. (연락처 : 나눔의 집, 031-768-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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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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