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으로 국민 이기려 한 전두환 헛꿈 '산산조각'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41> 6월항쟁, 스물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6·26 평화 대행진 분쇄에 사활을 건 전두환 정권

프레시안 :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과 전두환 정권의 대결이 정점으로 치닫는 가운데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이 이뤄진다. 이것에 맞서 전두환 정권은 어떤 조치를 취했나.

서중석 : 1987년 6월 24일 국본(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은 6·26 국민 평화 대행진에 참여할 지역이 13개 도시에서 22개 도시로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실제는 이보다 15~16개 더 늘어나게 된다. 국본과 서대협(서울 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은 명칭 그대로 국민 평화 대행진이 되도록 6월 26일 평화 시위를 할 것을 각별히 강조했다. 통일민주당도 과격 시위 자제를 역설했다.

전두환의 신경은 온통 6·26 평화 대행진에 쏠려 있었다. 6·26 평화 대행진 상황을 보고 나서,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일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전두환은 시위를 초기 단계에서 철저히 분쇄해 6·26 평화 대행진을 무력화하려 했다. 그래서 권복경 치안본부장에게 초동 단계에서 6·26 평화 대행진을 꺾어버리라고 직접, 강력히 지시했다. 여러 일간지가 보도한 것처럼 6월 26일 시위대가 대체로 평화 시위 기조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과 대조적으로 경찰의 폭력 진압이 난무하게 된 것은 전두환이 그러한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강력한 지시를 받은 권복경은 초동 단계에서 시위를 꺾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경찰은 6·26 평화 대행진 집회와 시위가 예상되는 24개 도시에 355개 중대, 5만 6000명을 배치했다. 이 중 2만여 명은 서울에 배치됐다.

6·26 평화 대행진의 최종 집결지인 파고다공원은 문이 굳게 닫혔다. 서울 시내 대부분의 시내버스와 택시 회사들은 25일 밤 정비사를 동원해 차량에서 경적을 제거했다. 기사들이 경적 시위에 동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중·고등학교는 26일 학생들을 일찍 귀가시켰다. 시위대 집결지 주변 회사들은 직원들을 빨리 출근시킨 다음 일찍 귀가하게 했고, 구로공단 업체들은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대부분 조업 시간을 밤 10시까지 연장했다.

전두환 정권의 6·26 대비책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보도지침이다. 6·26 평화 대행진은 대단히 큰 시위였는데도 당시 신문들을 보면 이것에 관한 보도 지면이 아주 인색했다. 6·10 국민 대회와 그 이후의 보도를 볼 때 6·26 평화 대행진 보도에 보도지침이 더 강하게 작용했음을 느끼게 했다.

여러 신문을 보면 시위에 대한 총평과 연관 있는 도입부 문투가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1면 기사와 시위 상황에 대한 사실 보도가 실린 사회면 기사가 큰 차이가 나는 신문이 여럿 있었다. 신문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시위를 애써 축소해 보도한 경우도 많았다. 6·26 평화 대행진에 대해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광주에선 광주항쟁 이후 최대 시위, 전주에선 한판의 거대한 민주 축제

프레시안 : 평화 대행진의 그날 국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독재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다. 6월 26일 상황을 지역별로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먼저 광주로 가보자. 광주는 서울, 부산과 함께 6·26 평화 대행진 최대의 격전지였다. 광주 시위는 5시에 시작됐다. 5시 30분경에는 금남로 4가에서 유동 삼거리에 이르는 폭 30미터, 길이 1킬로미터의 도로를 시민들이 가득 메웠다. 같은 시각 서현교회와 중앙대교 광주천변에도 수만 명이 모였다. 서현교회 쪽 시위대의 선두에서 고교생들이 전경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광주의 고등학생들은 6월 24일부터 시위에 적극 나섰는데 26일에도 앞장서서 싸웠다.

평화 대행진 시작 시간인 6시경 한일은행 사거리에는 2만여 명이 운집했다. 이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다. 8시경 시위대는 3만여 명으로 늘어나 금남로 4가와 5가 사이 차도와 인도를 가득 메웠다. 이들은 '민주 헌법 쟁취하여 민주 정부 수립하자'라고 쓴 커다란 현수막을 앞세우고 "최루탄 추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금남로 일대와 중앙대교 일대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하던 시민, 학생 4만여 명은 자정이 지난 후에도 계속 시위를 벌이며 대중 토론회를 열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이날 거리에 나왔다.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는 5만여 명, 경향신문은 금남로 일대에 5만여 명이라고 보도했고 <말>은 30여만 명, <6월 민주화 대투쟁>은 20~30만 명이라고 기록했다.

프레시안 : 광주 이외의 호남 지역과 제주도에서는 어떠했나.

서중석 : 목포에서는 6시 30분경부터 시위가 커져 2만여 명이 2호 광장에 진출했다. 10시가 조금 지나서는 서울발 목포행 열차의 운행을 4분간 중단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순천에서는 7000여 명의 시위대가 곳곳을 누비며 기세를 올렸다. 시위대는 KBS 방송국을 한때 점거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동파출소 등을 파괴하고 경찰 오토바이 2대를 불태웠다. 여수에서는 8시경 청년 학생들이 횃불 시위를 벌였다. 10시경 여수의 시위대는 수만 명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광양, 무안, 완도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제주도의 경우 제주에서 시위대 수천 명이 평화 대행진을 했고 최남단 도시인 서귀포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전주 시위에는 부근 농민 500여 명이 시외버스를 타고 와서 가세했다. 8시경 시민, 청년 학도와 중·고교생 2만 5000여 명이 4개 대열로 나뉘어 "독재 타도", "직선 개헌", "민주 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팔달로 일대를 행진했다. 서중 로터리에 이르는 1.5킬로미터를 행진하는 동안 시위 참여자는 훨씬 더 많아졌다. 팔달로에서 시위 군중을 막던 경찰 저지선은 맥없이 무너졌고, 전경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중에게 포위됐다. 수만 명의 시민, 학생은 범도민 시국 토론회를 열고 횃불을 밝혔다. 10시 15분경에는 군부 독재 장례식을 거행했다. 전주 역사에서 보기 드문, 한판의 거대한 민주 축제였다.

익산에서는 8시 10분경 신광교회에서 전북은행 사거리에 이르는 900미터 도로가 수만 명의 시민으로 가득 찼다. 군산에서는 6시 55분경 시민 1만여 명이 역전을 향해 행진했다. 7시가 지나면서 시위대는 더욱 늘어났다. 이들은 KBS 앞으로 행진하면서 왜곡, 편파 보도를 규탄했다. 군산에는 미군 부대가 있지 않나. 시위대가 미군 상가가 모인 곳을 지나면서 "독재 정권 지원하는 미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자 미군들이 황급히 부대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경상도에서도 민주주의 요구 터져 나오며 전두환 정권 압박

ⓒ오월의봄
프레시안 : 부산과 경남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부산에서는 가톨릭센터에서 농성하던 신부, 수녀, 신도들이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한 특별 미사를 연 후 침묵시위를 했다. 7시 40분경 시위대는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서면 로터리로 행진했는데, 서면으로 향하는 도로마다 시민으로 가득 차 4만여 명을 헤아렸다. 10시 40분경에는 시내버스, 택시, 트레일러의 기사들까지 서면에서 시위대를 위한 바리케이드 역할을 자청하며 동참했다. 그러자 시위대가 "노동 3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기세를 올렸다.

마산에서는 5시 40분경 시위가 시작됐다. 6시에 평화 대행진이 시작되자 경찰 기동대가 대행진 참여자들을 덮쳐 현수막 등을 빼앗고 10여 명을 순식간에 연행했다. 이날 경찰은 최루탄 공세를 퍼부었고 백골단은 시위 참가자들을 낚아채듯 잡아갔다.

7시경 시위대는 도로 중앙에 설치된 88올림픽 선전탑을 넘어뜨리고 불을 질렀다. 시위대와 경찰의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되면서 도로에서 차량 통행이 두절됐고, 합천경찰서 소속 지프차 1대가 불탔으며, 경찰 버스 2대도 파손됐다. 10시경에는 시위대가 던진 돌에 북마산파출소가 파손됐고 11시 30분경에는 오동동파출소가 부서졌다.

심야에 오동동 아케이드 주변에 모인 시위대는 각목, 쇠파이프, 돌로 무장하고 경찰과 싸웠다. 다니는 차량도 없는 어두운 거리에서 구호도 별로 외치지 않았고, 돌을 던지다가 물러서고 골목길에 숨었다가 공격하는 식으로 접전을 이어갔다. 1979년 부마항쟁 때 마산에서 야간에 일어났던 격렬한 시위를 여러 면에서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진주에서는 학생들이 평화적 촛불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진압을 포기했다. 울산, 김해, 진해, 거창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거창에서는 농민들이 시위에 앞장섰다. 거창도 가톨릭농민회가 센 곳이다.

프레시안 : TK라 불리는 대구·경북에서도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나.

서중석 : 대구에서는 6시에 시위대가 2·28기념탑으로 행진했다. 차량에서 경적을 울리고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면서 시위대 인원이 불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월당 부근의 약 250미터, 8차선 도로가 군중으로 가득 찼다. 경향신문은 1만여 명이 나왔다고 보도했고 《말》은 4만여 명이라고 썼다. 10시 40분경 시위대는 민정당 이치호 의원 사무실을 부쉈다. 그리고 파출소 5곳을 습격해 그중 3곳을 불태웠다. 대구 도심과 서부 지역은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퍼부은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이튿날 아침까지 통행인이 최루 가스로 고통을 겪을 정도였다.

포항에서는 평화 대행진 시작 시간이 6시가 아니라 7시로 잡혀 있었다. 대학이 없는 대신 노동자가 5만 명이 넘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포항제철을 비롯한 여러 기업은 시위 참여를 막기 위해 노동자들을 밤늦도록 붙잡아뒀다. 그렇지만 평화 대행진이 자정 무렵까지 계속되면서 적잖은 노동자들이 유니폼 차림 그대로 대행진에 참여했다.

안동에서는 가톨릭농민회 회원, 천주교 사제와 수녀, 개신교 목회자, 학생, 시민 등이 시위에 나섰다. 안동은 가톨릭농민회가 아주 센 곳이다. 안동역에 도착했을 때 역전 광장, 시외버스 터미널 간선 도로가 시위대로 가득 찼다. 고교생 200여 명과 젊은 중·고교 교사 30명도 집회에 참여했다. 김천, 영천, 의성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충청, 강원, 경기에서도 굽이친 대행진 물결

프레시안 : 충청도와 강원도, 경기도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대전에서는 6시 40분경 시민들이 속속 합세해 홍명상가와 대전역 사이의 도로를 시위대가 가득 메웠다. <말>은 2만여 명, 한국일보는 1만여 명으로 보도했다. 이날 시위에서는 화염병 투척이 없었다. 투석전이 두 군데에서 전개된 걸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평화적인 시위였다. 6월 19일 시위에서 차에 치인 전경 1명이 숨진 점이 작용했다. 천안, 공주, 청주, 제천, 춘천, 원주, 태백 등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인천에서는 7시경 시위대가 부평로를 점거하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8시가 지나면서 부평로 시위대는 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0시 30분경에는 부평공단 내 대우자동차, 한독시계 등의 노동자들이 시위대를 공격하던 경찰을 향해 돌진했다. 경찰은 혼란에 빠졌다. 노동자들은 경찰 버스에 연행된 사람들까지 구출해 시위대에 합류했다.

수원에서는 6시경 시위가 시작됐다. 8시경 신부, 수녀, 개신교 목회자들이 앞장서고 학생, 시민 7000여 명이 그 뒤를 따르며 수원역을 향해 침묵 속에서 촛불 행진을 했다. 11시경에는 시민 1만여 명이 수원역 광장을 메우고 집회를 열었다.

노동자가 많은 성남에서는 포항과 마찬가지로 7시경 시위가 시작됐다. 8시 40분경 성남 지역 민주화 연합(의장 이해학 목사)에서 대행진 시작을 선포했다. 1만여 명의 시민이 경찰의 1차 저지선에 이어 2차 저지선까지 돌파했다. 시위대는 더욱 늘어났다. 조선일보는 1만 5000여 명, <말>은 3만여 명이라고 보도했는데 이들은 자정 무렵 해산했다.

안양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본래 시위가 잘 일어나지 않는 지역이었는데, 6월 19일에 꽤 큰 시위가 일어나더니 26일에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9시경 경찰 저지선을 뚫고 집회를 연 데 이어 10시 30분경에는 전경들을 무장 해제하기 위해 공격했다. 전경들은 황급히 피신했다. 시위대는 시청에 돌을 던지고, 민정당 당사와 노동부 안양 출장소에 화염병을 던졌으며, 11시 20분경에는 안양경찰서를 공격했다. 시위대의 공격으로 경찰서 안에 있는 경찰서장 관사가 반쯤 불타고, 구내식당 2층 및 경찰서 앞길에 있던 승용차 2대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다음 날 상오 2시경 경찰 쪽 지원 병력이 추가로 도착한 후 시위대는 흩어졌다.

김영삼 머리채 잡고 손목 비틀어 대행진 동참 막은 전두환 정권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서울 차례다. 평화 대행진이 있던 6월 26일 서울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26일 최대 시위는 서울에서 벌어졌다. 이날 민정당은 바짝 긴장했다. 분노한 시민들로부터 언제 공격받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민정당은 당사 정문과 후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비 병력을 평상시의 3배 이상 늘렸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일행은 경찰의 3중, 4중 봉쇄 속에 출정식을 마치고 5시 50분경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을 나섰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와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 손으로'라고 쓴 현수막을 앞세우고 비폭력을 외치며 시청 쪽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5분도 안 지나서 사복 경찰 100여 명이 최루 가스 분말을 뿌려대며 김영삼 일행의 대열을 흩뜨렸다. 이어서 도로 양쪽에 대기하고 있던 연행조가 총재단과 의원, 당원들을 전광석화처럼 분리시키고 연행했다.

경찰은 김영삼 총재의 머리채를 잡고 손목을 비틀어 끌어당겨 소형 버스에 억지로 태웠다. 그 후 김포가도를 1시간 동안 돌다가 상도동 자택에 김영삼을 내려놓았다. 경찰은 다른 사람들도 닭장차 4대에 강제로 태웠다.

6월항쟁 때 야당 총재와 의원들은 거리에 두 번 나왔다. 6·10 국민 대회 때 전두환 정권은 야당 총재와 의원들에게 어느 정도 운신할 여지는 줬다. 그러나 6·26 평화 대행진 때에는 그와 전혀 다르게 초동에 완전 차단, 완전 분쇄하는 작전을 펼쳤다.

화염병 사용 자제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서울 시위대

프레시안 : 시위는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미도파백화점 앞에 여기저기 모여 있던 학생 500여 명이 5시 20분경 "독재 타도"를 외치며 명동 쪽으로 뛰어나왔다. 서울에서 시위는 그렇게 시작됐다. 6시에 애국가가 제창되고 차량들의 경적 시위도 시작됐다. 이날 서울에서는 무수히 많은 차량들의 경적 시위가 자정 넘어서까지 계속됐다.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은 초동 진압 방침을 미리 세워놓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줬다. 이것에 대해 한국일보는 "경찰은 초기 진압 작전을 펴 집결 시간 전부터 주요 지점을 차단한 뒤 시위대가 모이면 종전보다 강도 높게 제지했다"고 보도했다. 반면 시위대는 화염병 사용을 자제했다. 어쩔 수 없이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대응해야 하는 경우에도 대개 손수건과 태극기를 흔들다가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는 정도였다.

시위대는 이전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흰 장갑을 낀 손에 핸드 마이크를 들고서 구호나 노래를 통일시키며 시위대를 이끌어가는 선봉대의 모습이, 학생들일 텐데, 어느 곳에서나 자주 눈에 띄었다.

6시경 동대문운동장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지역에서 1만여 명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거나 연좌시위를 했다. 6시 20분경에는 영등포역 광장, 영등포시장 일대에 노동자, 학생,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서울에서 주요 시위는 세 군데에서 벌어졌다.

▲ 6·26 평화 대행진에 대해 보도한 동아일보 1987년 6월 27일 자 7면. ⓒ동아일보


영화 속 전투 장면 연상시킨 서울역 일대 공방전

프레시안 : 어디였나.

서중석 : 동대문운동장 일대, 영등포역과 영등포시장 일대, 그리고 서울역 주변 즉 신세계백화점에서 을지로 입구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학생들은 그렇게 하기로 사전에 정하고 출정식을 한 후 세 지역으로 향했다.

먼저 서울역 쪽을 보자. 이곳에서는 8000여 명의 시위대가 서울역 광장에서 바리케이드를 도로로 옮겨 차량 통행을 막고 연좌시위를 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다. 그러자 시위대는 경찰을 남대문경찰서 쪽으로 밀어붙인 뒤 경찰서를 포위했다. 이어서 화염병과 돌을 던져 경찰서 전면의 유리창 100여 장을 깨고, 경찰서 현판 등 기물 일부를 끌어내 역 광장에서 태워버렸다. 이게 이날 서울 시위에서 제일 폭력적이었다고 얘기되는 장면이다.

7시 30분경에는 충정로, 퇴계로 쪽 시위대까지 몰려와 서울역 광장과 도로를 완전히 점거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여기에 2만여 명의 학생, 시민이 모였다. 이들 중 7000여 명은 서울역 고가 도로를 점거했다. 경찰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완전 무장한 정예 병력이 최루탄을 엄청나게 쏘아대면서 고가 도로에 진입했다. 시위대는 독한 최루 가스에 당장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그러면서 양쪽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영화 속 장렬한 전투의 한 장면 같았다.

뿌옇게 사방 뒤덮은 최루 가스에도 꺾이지 않은 민주의 함성

프레시안 : 영등포와 동대문 쪽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7시경 시위대는 영등포시장 앞 6차선 도로, 500미터를 점거했다. 7시 40분경에는 영등포 로터리 일대를 점거해 시국 성토대회를 열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 무렵 영등포시장 일대 시위 인파가 1만 5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서 학생, 노동자, 시민들은 즉석 시국 토론회를 한 시간 동안 열었다.

영등포 로터리에 1만 5000명 넘게 모였는데도 학생들은 화염병을 사용하지 않았고 돌도 던지지 않았다. 영등포 일대 시위에는 노동자와 일반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영등포시장 상인들은 시위대에게 물을 떠다주기도 했다. 한편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가톨릭대 의대생 250명은 흰 가운을 입고 의료반을 편성해 명동, 서울역, 동대문 일대 시위 현장에서 부상자들에게 응급 치료를 했다.

동대문 일대 시위대는 7시경 종로 쪽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서울신문에 따르면 8시 30분경 1만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시위대는 벽돌 조각과 돌멩이를 던졌다.

시위대와 경찰의 공방전으로 8시경 남대문에서 시청에 이르는 도로가 마비됐다. 같은 시각 서울역과 서부역 일대에 시위대가 다시 집결했다. 8시 10분경에는 이 일대에 3만여 명이 모였다. 전경들은 고가 도로 위에 일렬로 쭉 늘어서서 다탄두 최루탄을 아래로 난사했다. 그러면서 그 일대가 최루 가스로 뿌옇게 뒤덮였다. 이때 참 대단했다.

8시가 지나면서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숭례문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이들은 돌과 화염병으로 경찰 차량 10여 대를 몰아내면서 경찰을 포위하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서울역에서는 경찰이 최루탄을 엄청나게 쏘아대는 가운데 1~2만 명의 시위대가 전경과 공방전을 벌였다. 군대가 포연 속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을 영화 속 전투 장면 같은 데서 볼 수 있지 않나. 마치 그것처럼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최루 가스 속에서 시위대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더니 서소문과 서대문 쪽으로 이동했다.

"모두 죽여버려" 무차별 폭력에 시민들 "동원된 깡패임이 틀림없다"

프레시안 : 경찰의 폭력 진압이 난무했다고 앞에서 얘기했다. 최루탄 난사, 백골단의 무차별 연행 같은 것 이외에 어떤 사례가 더 있나.

서중석 : 이날 경찰의 시위 진압은 지극히 난폭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그대로 나오는 표현이다. 서울역에서 일어난 일을 한 번 살펴보자.

8시 40분경 경찰 '사복조' 50여 명이 서울역 대합실에 들어갔다. 이들은 "모두 죽여버려"라고 고함을 지르고, 미리 준비해온 1미터짜리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특히 젊은 사람들만 보면 무차별 폭행했다. 남녀 불문하고 폭행했고, 시위대와 승객을 구분하지도 않고 마구 때렸다.

무차별 집단 폭행을 당한 28세 회사원과 25세 상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사복조'가 물러가자 시민들은 이렇게 수군댔다. "저 사람들은 경찰이 아니라 동원된 깡패임이 틀림없다." 특히 서울역 일대는 경찰의 심한 폭력으로 몇 번이고 아수라장이 됐다. 이날 '사복조'는 바깥에 보이지 않도록 쇠파이프를 신문지로 둘둘 말아 들고 있다가 시위대를 폭행해 끌고 갔다.

▲ 6·26 평화 대행진 상황을 전한 동아일보 1987년 6월 27일 자 6면. ⓒ동아일보


시위대 따라 구호 외친 승객들, 반독재 구호 적도록 기다린 기사들

프레시안 : 평화 대행진의 날 서울 시위는 어떻게 마무리됐나.

서중석 : 각지로 분산했던 시위대가 9시 45분경 다시 서울역 광장 쪽으로 밀려들었다. 시위대와 무장한 경찰이 여기저기서 접전을 벌였다. 서울역 광장을 점거한 2만여 명의 시위대는 철제 바리케이드를 돌로 치는 소음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0시경 동대문운동장, 동대문 일대에 모인 1만여 명의 시위대는 10여 차례나 이 일대의 도로를 점거했다. 이들은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돌과 화염병으로 맞서며 격렬히 시위를 벌였다. 11시경 1만여 명의 학생, 시민들이 시위를 계속하는 가운데 동대문 로터리 주변을 지나는 차량들이 경적을 계속 울렸다. 차 안에 있던 승객들은 창밖의 시위대를 따라 구호를 외치며 손뼉을 쳤다. 대학생들이 지나가는 버스에 매직펜으로 '끝장내자 독재' 등의 구호를 썼는데, 대부분의 기사들이 차를 멈추고 차례를 기다렸다.

이날 시위 장소 곳곳의 지하도 입구와 차량에는 붉은 매직잉크로 쓴 '독재 타도', '대통령을 내 손으로'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한 신문은 "도심지를 운행하는 차량 중 80퍼센트 이상이 학생들이 써놓은 각종 구호로 어지럽혀져 있었다"고 보도했다.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은 군 지역을 포함해 적어도 전국 37개 시군에서 전개됐다. 강릉 시위에 관한 동아일보 보도가 정확하다면 38개 시군이 될 것이다. 37개 시군으로 볼 경우 6·10 국민 대회에 22개 시, 6·18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에 18개 시에서 참여했던 것과 비교하면 각각 15개 시군, 19개 시군에서 더 참여한 것이다. 평화 대행진 참여 인원을 국본은 130만 명으로 추산했다. 이와 달리 경찰은 5만 8000명으로 발표했고 조선일보는 20여만 명으로 추산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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