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영구집권 꿈, 내각제 개헌 속내는?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5> 6월항쟁, 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동상이몽 속에서도 전국을 뜨겁게 달군 개헌 열기

프레시안 : 1985년 2·12총선을 거치며 개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1986년에 들어서면 개헌 운동이 불붙게 된다. 그런데 야당, 재야, 학생 운동 진영 등은 독재 철폐라는 대전제에는 공감했지만 문제를 풀 방법과 지향점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렸다. 또한 하나의 부문, 예컨대 학생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부는 견해가 서로 다른 조직들로 확연히 구분, 정립된다. 동상이몽이었던 셈인데, 그러한 개헌 문제를 살펴봤으면 한다.

서중석 : 2·12총선 직전에 급조된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들고나와 바람을 일으켰다. 개헌 문제는 학생 운동권이나 재야 운동권에서도 제기됐다. 그러나 각 단체에 따라 견해가 다양했고, 또 언제 발표하느냐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1985년 11월 20일 민주 헌법 쟁취위원회를 조직했다. 민통련은 학생 운동권이나 다른 재야 운동권과는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이 무렵 학생 운동권이나 다른 재야 운동권에서는 큰 틀에서 보면 '대통령 직선제에 그쳐서는 안 된다. 민중이 참여하는 헌법 제정 의회 같은 것을 통해 민중 중심의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하는 단체에 따라 내용에 차이가 있긴 했지만, 적잖게 나오고 있었다. 그와 달리 민통련은 직선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민주 헌법의 권력 구조는 대통령 직선제 취지에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통련에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직선제 개헌을 하면 군사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다고 확고히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신민당은 2·12총선 1주년이 되는 1986년 2월 12일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과 함께 전격적으로 1000만 개헌 서명 운동에 들어갔다. 3월 11일에는 개헌 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 대회와 현판식을 열고 장외 투쟁을 시작했다. 그 후 전국을 돌며 지부 결성 대회와 현판식을 열었다.

프레시안 :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한마디로 뜨거웠다. 개헌 열기는 3월 23일 부산에서 열린 개헌 추진위원회 부산지부 결성 대회와 현판식 때부터 끓어올라서 3월 30일 광주에서 열린 지부 결성 대회 및 현판식에서 절정에 달했다.

부산지부 결성 대회 때에도 수만 명이 모였지만, 광주에서는 구름 모이듯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광주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모였는데, 1980년 5월을 상징하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광주은행까지 충장로의 6차선 도로, 500미터를 빼곡히 메운 가운데 지부 결성 대회 및 현판식이 열렸다. 혹시라도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야당이 황급히 집회를 마무리할 정도였다. 그 집회에서는 민주 헌법 쟁취와 군사 독재 퇴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뜨거운 열기를 민통련 가맹단체인 전남민주청년운동연합(전청련)에서 이어받아 신민당 집회 이후 야간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광주의 열기는 재야 운동권뿐만 아니라 학생 운동권, 노동 운동권에도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부산, 광주에 이어 4월 5일에 열린 신민당의 대구 개헌 집회도 뜨거웠다.

그런데 이 집회, 바로 이때부터 대구·경북의 민통련 간부들이 다른 민통련 가맹단체들과 함께 신민당과 별도의 집회를 열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거리 투쟁을 전개하게 됐다. 신민당과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야당이 대전(4월 19일)과 청주(4월 27일)에서 연 개헌 집회에서도 민통련은 독자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반제 투쟁론의 부상과 이재호·김세진의 죽음

ⓒ오월의봄
프레시안 : 학생 운동 쪽 분위기는 그것과는 또 다르지 않았나.

서중석 : 전국이 이처럼 개헌 열기에 뒤덮여 있을 때 일부 학생 운동권에서 반제 투쟁론이 부상했다. 반제 투쟁 주장을 담은 한 팸플릿 말미에 "미국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을 갖지 않은 사람은 운동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돼 있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반제 투쟁론은 기본적으로 한국 현대사를 미제와 한국 민중 간의 투쟁의 역사로 인식했다. 따라서 군사 독재 반대 투쟁의 수준을 넘어 반미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제 투쟁론 계열의 학생 운동 세력은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4주년을 맞은 1986년 3월 18일 학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미방'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날 이 세력은 서울대에서 반전 반핵 평화 옹호 투쟁위원회(반전 반핵 투위)를 발족했다. 위원장은 이재호였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재호가 "반전 반핵 양키 고 홈" 등을 선창하면 학생들이 따라 외쳤다. 구호 하나하나가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그로부터 11일이 지난 3월 29일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이 비밀리에 조직됐다. 4월이 되자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가 발족했고 자민투 기관지로 <해방 선언>이 나왔다. 구학련은 비밀 조직이었는데, 공개적인 투쟁 기구로 자민투를 띄운 것이었다.

이들은 학생 400여 명과 함께 4월 28일 서울 신림 사거리에 모였다. 반전 반핵 투위 위원장 이재호와 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이 3층 건물 옥상에서 "양키의 용병 교육 전방 입소 결사반대"를 선창하자 도로에 있던 학생들이 따라 외쳤다. 이때 경찰이 학생들을 구타하며 연행했다. 경찰은 옥상에 있던 이재호, 김세진도 연행하려 했다. 이재호와 김세진은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경찰에게 '가까이 오면 분신하겠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경찰은 두 학생에게 달려들었다. 두 학생은 몸에 불을 붙이고 구호를 외치다 처절하게 쓰러졌다. 김세진은 5월 3일, 이재호는 5월 26일 끝내 숨을 거뒀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 교육을 대학의 정규 과목으로 만들었다. 사회 전반을 병영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1969년부터 남자 대학생은 정규 과목이 된 교련 교육을 받아야 했고, 1970년 2학기부터는 여대생도 교련 교육 대상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12월 '대학생은 4년간 711시간의 교련 교육을 받아야 하며, 현역 군인을 대학에 배치해 군사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해 거센 반발을 자초했다. 711시간은 4년간 전체 수업 시간의 약 20퍼센트에 달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군사 교육은 전두환·신군부 정권에 들어와서도 계속됐다.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대학교 1, 2학년 남학생에게 주당 2시간씩 교내 교련 교육을 실시했다. 그에 더해 1학년 학생은 병영 집체 교육을, 2학년 학생은 전방 입소 교육(5박 6일)을 받도록 했다. 전방 입소 교육까지 받고 교련 학점을 취득하면 군 복무 기간을 90일 줄여주는 회유책도 썼다. 군 복무 기간 단축은 군사 교육에 대한 반발을 감안해 정권 차원에서 내민 '당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생 출신 병사들과 이 시기에 다수를 차지하던 비(非)대학생 출신 병사들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정권 차원의 '당근'에도 불구하고 억압적인 군사 교육은 대학생들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렀다. 특히 1986년에는 전방 입소 교육 거부 투쟁이 여러 대학에서 격렬하게 전개됐다. 대학생에 대한 군사 교육은 6월항쟁 이후인 1989년 1학기부터 전면 폐지된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반제 투쟁론에 대해 야권이나 재야 쪽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이재호, 김세진이 신림 사거리에서 분신한 다음 날인 4월 29일 민주화를 위한 국민 연락 기구(민국련)에 속해 있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 김대중 민추협 공동 의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등은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은 지지하지만 반미, 반핵, 민족 자주화 투쟁은 지지하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이민우는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도 그런 반미 투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다음 날인 4월 30일 전두환은 3당(민정당, 신민당, 국민당) 대표와 회담하고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건의하면 재임 기간 중에도 헌법 개정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자기 임기 내에 여야가 합의해서 개헌하면 그것에 동의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이건 그해 1월 16일 국정 연설에서 보였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1월 16일 국정 연설에서 전두환은 개헌 문제는 서울올림픽 이후인 "19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얘기했다. 1989년까지 개헌 논의를 유보해줄 것을 요구했던 건데, 그랬던 전두환이 4월 30일 이때 한 발 물러선 것이다.

당시 운동권은 재야, 노동, 학생, 청년 어느 쪽이든 급진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4월 30일에 있었던 회담 결과에 대해 보수 대연합이자 야당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것으로 판단했다. 광주, 부산, 대구 등지에서 개헌 열기가 확연히 드러나자 전두환이 한 발 물러선 것이라는 점은 생각하지 않았다.

전두환과 3당 대표가 회담한 다음 날인 5월 1일 민통련은 4월 29일에 있었던 민국련 기자 회견이, 앞에서 말한 이민우, 김대중, 문익환 등의 회견을 말하는데, 보수 정치인들의 외세 의존적이고 타협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민국련 탈퇴, 의장단을 비롯한 집행부 전체 사퇴를 결의했다. 야당과 느슨한 연대로 민국련을 구성했던 것인데, 이제 야당과 연대하는 것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5·3 인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반독재 세력 간의 뚜렷한 차이

프레시안 : 야당, 재야, 학생 운동 및 여러 사회 운동 진영의 그러한 견해 차이는 5월 3일 인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나.

서중석 : 신민당은 대구, 대전, 청주의 개헌 집회에 이어 5월 3일 그날 인천에서 개헌 추진위원회 경기·인천지부 결성 대회와 현판식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5·3 인천 개헌 집회는 운동권에 의해 5·3 인천 투쟁 또는 5·3 인천 사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극대화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5·3 인천 투쟁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면, 2·12총선 이후 고양된 민주화 운동, 개헌 투쟁을 한 단계 더 높이겠다는 의욕은 강했으나 이날 이후 군부 독재 정권은 민주화 운동과 개헌 투쟁을 분열시키고 무력화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반격을 가했다.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전두환은 그해 9월 이후 비상사태를 선포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유성환 의원이 국회에서 한 국시 발언이나 심지어 금강산댐 문제까지 개헌 투쟁을 분쇄하고 개헌 열기를 약화하는 데 이용했다. 그 반면 학생, 재야 운동권, 노동 운동 세력과 야당은 전두환의 탄압 공세에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고, 1986년 연말까지 대중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5·3 인천 사태가 역전의 계기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 : 5월 3일 인천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신민당은 인천시민회관에서 대회를 열 계획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인천시민회관 주변에 다양한 정파와 단체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오 무렵 대회장 주변은 시민, 학생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날 경찰은 불심 검문도, 출입 통제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시위가 시작됐다. 각 정파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연설과 시위를 전개하면서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면서 정작 이날 대회를 주관하는 신민당의 지도부는 대회장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여러 운동 세력은 각각 따로 자기 집회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외친 구호도 제각기 달랐다. 이날 배포된 유인물 종류만 50종 정도일 만큼 다양한 주장이 나왔다. 학생 단체건 노동 단체건 제각기 다른 주장을 펼쳤다. 예컨대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경우 민통련 산하 단체인데도 신민당과 민통련의 제휴를 비판하고 헌법 제정 민중 회의를 소집하자고 외쳤다.

5·3 인천 집회에서는 전두환·신군부 못지않게 김영삼, 김대중이 이끄는 야당이 그야말로 몰매를 맞았다. 신민당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정권 장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전두환 정권과 보수 대연합을 꾀하는 기회주의 세력'으로 매도당했다.

그것보다도 일반 대중과 야당, 언론을 깜짝 놀라게 한 건 격렬한 반미 구호였다. "미국의 사주에 의한 개헌 술책 폭로한다", "이원 집정부제 강요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같은 건 온건한 축에 들었다. "속지 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 놈", "친미로 망한 나라 반미로 되살리자" 같은 구호도 나왔다.

중구난방의 어수선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찰이 오후 5시경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며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여러 집회 대오가 무너졌다. 그 후 주안, 제물포, 동인천 일대에서 밤늦게까지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이날 상황은 일단락됐다.

5·3 인천 집회를 계기로 전면 탄압에 나선 전두환 정권

▲ 5·3사태 이후 민주화 운동 단체는 보수 언론의 차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이미지는 5·3사태에 대해 보도한 경향신문 1986년 5월 5일 자 11면 기사. ⓒ경향신문
프레시안 :
수도권 일대 운동 단체가 죄다 모여든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조직에서 나와 이날 시위를 전개했다. 그만큼 구호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랐다. 그런데 이날 상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두고도 시각이 엇갈린다. 단순화하면 항쟁 또는 투쟁에 무게를 싣는 경우도 있고 그와 달리 사태 쪽에 방점을 찍는 경우도 있지 않나.

서중석 : 5·3 인천 투쟁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 투쟁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민주화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투쟁으로 민족 민주 세력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 이날 인천에서 정말 여한 없이 싸워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5·3 인천 투쟁 참여자들이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급속히 형성·고양된 관념적 급진성에서 벗어나는 데 수개월 또는 수년이 걸렸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5월 3일 이후 민주화 운동 단체는 5·3사태에 대한 보수 언론의 차가운 시선도 감내해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전두환 정권의 매스컴 조작과 폭우처럼 쏟아진 모진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민주화 운동 세력과 야당은 1986년 초부터 5·3 인천 사태가 있을 때까지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5·3 인천 사태 그때부터 그해 말까지는 수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KBS와 MBC는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보도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보냈다. 불타는 민정당 인천 당사와 경찰차, 그리고 보도블록 등이 나뒹구는 인천시민회관 일대 모습을 연이어 내보냈다. 경찰은 인천 사태를 극렬 좌경 용공 폭력 세력의 난동으로 몰아갔다.

이렇게 되면서 제일 난처한 입장에 빠진 것은 전두환 정권이 아닌 신민당과 김영삼, 김대중이었다. 개헌 문제에서는 재야, 여러 운동 단체 등이 '우군'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그 '우군'에 의해 개헌 집회라는 자기들의 잔치판이 깨졌을 뿐 아니라 아주 심하게 비난받고 매도당하지 않았나.

프레시안 : 그런 상황에서 전두환과 민정당은 어떻게 나왔나.

서중석 : 개헌 열기에 풀이 죽은 듯했던 민정당은 이때다 싶어 공세를 취했다. 5월 5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과 김영삼 신민당 고문의 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그전에 신민당이 회담을 제안했을 때에는 외면하다가 5·3 인천 집회 이후 태도를 바꾼 것이다. 그러더니만 민정당은 갑자기 당내에 헌법 특위를 서둘러 구성했고, 이전과는 정반대로 '국회 내에 헌법 특위를 구성하자'고 야당에 재촉했다.

민정당이 대타협을 하자며 나선 건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물론 아니었다. 그렇게 대타협을 하자고 민정당이 촉구하는 동안 전두환 정권은 대탄압으로 나왔다. 민정당이 노태우-김영삼 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5월 5일 전두환 정권은 자민투, 민민투(반제 반파쇼 민족 민주 투쟁위원회) 관계자 27명을 수배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뒤이어 검찰은 이 27명과는 별개로 5월 8일 현재 장기표를 비롯한 민통련 간부와 학생, 노동자 등 32명을 수배했으며 앞으로 관계자들을 더 수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1986년 상반기에 수배자는 400명이 넘게 됐다. 7월 9일까지 문익환, 장기표, 김문수 등 172명이 검거돼 구속 기소되거나 수사를 받았다. 한편 5·3 인천 집회 직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활동가 10여 명은 보안사에 끌려가 물고문, 전기 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민정당이 20년은 집권해야", 전두환 쪽에서 내각제를 꺼낸 속내

프레시안 : 헌법 문제에 관한 국회 논의, 어떻게 진행됐나. 이 문제에 관한 전두환 측의 복안은 무엇이었나.

서중석 : 5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과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국회에 헌법 개정 특별위원회(개헌 특위)를 둔다는 데 합의했다. 7월 7일에는 여권의 당·정·청 핵심 인사들이 청와대에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내각제 개헌안을 야당에 제시하되, 야당이 거부하면 기존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고 88올림픽을 치른 다음 개헌한다'는 방안에 합의했다.

그렇지만 야당이 내각제 개헌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따라서 5·3 인천 집회 이후 민정당이 야당에 재촉해 구성한 개헌 특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7월 7일 회의가 끝난 후 전두환은 "(타결이) 안 된다는 전제로 준비하라", "더 이상 타협이 어렵다고 판단하는 시기가 중요하다"면서 호헌 논리는 자신이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 쪽에서 제시한 방안으로는 타협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따라서 직선제를 거부하는 호헌 조치를 시기를 봐서 자신이 취하겠다는 얘기였다. 1987년에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데, 그게 이미 이때 전두환의 마음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전에도 전두환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개헌 열기가 고조되자 4월 30일에 조금 양보를 한 것이고 그러면서 그 후 국회에 개헌 특위가 구성되고 그랬던 것이다.

민정당이 내각제를 주장한 건 이승만 정권 말기에 한때 자유당 간부가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된 내각제를 주장했던 것과 그 의도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제1당에 유리하게 돼 있는 기형적인 선거법을 활용하거나 부정 선거를 통해 얼마든지 자신들이 국회에서 다수당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따라서 내각제로 개헌하면 영구 집권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7월 7일 이날 전두환은 이런 얘기도 했다. "민정당이 20년은 집권해야 한다."

8월 18일 민정당은 내각 책임제 헌법 개정안 요강을 확정, 발표했다. 전두환·신군부 헌법의 대통령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이 총리에게 집중돼 있고, 내각제인데도 국회 기능이 약한 것이 특징이었다. 변형된 대통령제라고 한 신문이 평했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처음부터 국회 개헌 특위는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9월 29일 이민우와 김영삼, 김대중은 회합을 하고 국회 개헌 특위 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 전두환(1985년). ⓒ국가기록원


전체를 포괄하는 용어로는 5·3사태가 적절

프레시안 : 5월 3일 인천 집회 이후 전두환 정권의 강도 높은 공세 등 달라진 상황을 살펴봤다. 이런 점들까지 고려할 때 5월 3일 인천 상황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서중석 : 항쟁이라고 부른 사람이 그간 꽤 있었다. 항쟁적인 성격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항쟁적인 것을 넘어서 사실은 혁명적인 성격이 강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기존 체제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주장들이 그날 쏟아져 나왔다. 그것에 대해 낭만적인 주장이었다고 할 수도 있고 현실에서 구현할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사상누각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건 간에 혁명적인 주장들이 제기된 건 맞다. 또 다른 측면에서, 예컨대 신민당 입장에서 보면 그날은 개헌 집회 또는 개헌 대회여야 했다.

이런 여러 측면이 있지만, 5월 3일 그날 일어난 일과 그 영향으로 그날 이후 일어난 일 전체를 포괄해서는 5·3사태 또는 5·3 인천 사태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내가 5·3사태 또는 5·3 인천 사태라고 표현할 때 5월 3일 그날 하루에 일어난 일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후 전두환 등이 5월 3일 그날 일을 계기로 하는 짓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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