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국 귀신'과 '외국 농산물 귀신' 쫓아내자

[문학예술 속의 반미]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V.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1980~1992

11. 1980년대 연극 속의 미국

연극은 1980년대 민중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분야 가운데 하나다. 정치적 집회가 금지되었을 때 사람들은 문화활동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전되었던 연극의 형태가 마당극이었다. 독일 출신 연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브레히트 (Brecht) 연극이론이나 '비판적 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옹호하는 데 기여해온 연극이나 사실을 왜곡하며 관객을 현혹해온 연극을 거부한 것이다. 마당극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무대가 열려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대는 대학 캠퍼스, 일터, 농장, 빈민촌, 교회마당, 길거리 등 어느 곳에든 차려질 수 있었다.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담은 최초의 마당극은 아마 1980년 3월 광주지역 연극인들 모임인 극회 '광대'가 공연한 <돼지 풀이>였을 것이다. 1970년대 말 돼지 가격 폭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이 연극은 일반 대중이 수입 농산물과 축산물을 거부하도록 이끌었다. 이 마당극은 몇 군데 농촌에서 다시 공연되었고 1982년 8월엔 서울 국립극장에서도 공연되었다.

극회 '광대'는 1981년 5월 광주항쟁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더욱 반미적인 마당극 <호랑이 놀이>를 무대에 올렸다. 1945년 해방부터 1980년 5월 항쟁까지 미국 "신제국주의 침탈 과정과 이에 대항하는 민중의 투쟁"을 "탁월하게 표현한" 연극이었다. 이 연극의 '불법성' 때문에 이 극단은 해체되고 말았지만, 그들의 공연은 1980년대 초 마당극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1982년 10월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한국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약탈을 폭로하기 위해 <호랑이 놀이>를 참고하여 <마당극 홍동지>를 공연했다. 첫째 마당은 "미국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적 속성을 밝히고 그 구체적인 침략 양상을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으로" 밝혔다. 둘째 마당은 "미국의 구체적인 침략으로써 광주학살을 리얼하게 또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마당극은 미국과 억압적 군사독재 그리고 독점 재벌의 실제 특성을 공격함으로써 1980년대 초 좌절한 학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그 이후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다양한 연극인 단체들이 공연한 수많은 연극에 표출되었다. 첫째, 전문적 연극인 단체들이 반미 연극을 공연했다. 광주의 놀이패 '신명'은 1982년 <안담살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20세기 초 조선에 대한 외국의 지배에 초점을 맞추면서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미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도와준 사실을 극화했다. 제목에서 '담살이'는 머슴을 일컫는 말로 '안담살이'는 '안씨 성을 가진 머슴'이란 뜻인데, 구한 말 의병활동을 했던 안규홍을 가리킨다. 제주의 탐라민속연구회 '수눌음'은 1983년 <태산땅>을 통해 미국이 지역안보와 세계평화의 이름으로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연극단체는 이 마당굿을 공연을 한 직후 당국에 의해 해체되었다.

'여성평우회'가 1984년 주최했던 '여성문화 큰잔치 연희마당'은 주로 한국의 억압적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미국의 경제와 문화적 제국주의의 몇 가지 사례를 보여주었다. 극단 '천지연'은 1986년 성문밖교회에서 노동연극 <선봉에 서서>를 공연했다. 이는 1985년의 구로연대 투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미국이 한국의 군사독재를 어떻게 지원하는지 보여주면서 미국이 한국의 반미주의에 신경 쓰는 것을 조롱했다. 광주의 극단 '토박이'는 1989~1990년 광주 전일방직의 노동투쟁을 소재로 한 <딸들아 일어나라>에서 1940년대 미군정의 노동정책을 비판했다.

둘째, 학생 연극인들은 수많은 반미 연극을 공연했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1980년 <녹두꽃>을 통해 1894년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을 극화하면서 반외세 민족주의를 정당화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연극회가 1984년 공연한 <불감증>에서는 한국인들의 친미주의가 조롱당했다. 전남대학교에서 1984년 공연된 <난무하는 사꾸라>는 1905년의 태프트-카쓰라 밀약을 다루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통제를 비판했다. 고려대학교에서 1984년 공연된 <똥>은 미국과 일본의 신제국주의를 다루었다.

고려대학교 '극예술연구회'가 1985년 공연한 <괴사 (壞死)>와 서울대학교 '민속가면극연구회'가 1987년 공연한 <어디만치 왔나>는 반미 노동투쟁을 극화했다. 덕성여자대학교에서 1986년 공연된 <쟁기>는 미국의 축산물 수입에 초점을 맞추었다. 1986년 이화여자대학교 100주년 기념으로 공연된 <딸>에서는 한국전쟁 중 "누이동생이 코쟁이놈들헌테 (강간)당허는 걸 보고 눈이 뒤집혀"버린 젊은이가 "미국놈들은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빨갱이가 된 장면이 등장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987년 공연된 <늪>에서는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이 "결국 미국놈들 총알받이 밖에"더 됐느냐며 한국군들 목숨은 미국 돈과 맞바꾼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사가 나왔다.

서울대학교에서 1988년 6월 그리고 연세대학교에서 8월 공연된 <통일밥>은 1980년대의 가장 반미적 연극 가운데 하나였다. 이 연극은 미국 제국주의에 의한 한반도 분단, 미 군정 아래서의 민족해방 투쟁, 한국의 군사독재와 노동탄압에 대한 미국의 지원,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훼방 등을 다루었는데, 이 때문에 희곡을 쓰고 연출했던 작가 주인석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전격 구속되었다. 연극의 소품으로 쓰인 인공기가 문제였다.

셋째, 노동자 연극인들 역시 반미 연극을 공연했다.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기업 '콘트롤 데이타'의 노동조합 탈춤반이 1984년 준비한 연극 <금수강산 빌려주고 머슴살이 웬말이냐>는 그 회사의 반미 노동투쟁을 다루었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자 회사 측에서 테러를 가하며 해고하고 나아가 공장을 폐쇄했는데, 이에 노동자들은 미국 정부가 배후에서 한국 정부의 노동 탄압과 공장 철수를 조종한다고 믿으며 미국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는 내용이었다. 대사 한 대목은 다음과 같았다.

"한 손엔 핵무기 들고 한 손엔 달러 들고, 토끼 꼬리만한 작은 나라라고 우습게 여겨 네놈들의 14분의 1에 해당하는 저임금으로 수백만 노동자를 착취하고, 들쥐 같다, 철이 없다, 망언에다 망발이더니, 최근에는 병든 소까지 팔아먹고 덤핑 판정 펑펑 하니, 지은 죄가 끝이 없고 죽은 혼백 노하신다"

이 연극은 1984년 9월 흥사단 강당에서 공연될 예정이었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당일 아침 연습하던 조합원들을 연행하는 바람에 공연되지 못했다. 5년이 지난 1989년 2월 전문 연기인들의 모임인 극단 '현장'에 의해 공연될 수 있었다.

민중연극이나 민족연극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면서 주로 노래와 춤을 비롯한 다른 장르와 결합되기도 했다. 또한 연극의 공개성 때문에 무대가 길거리 위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참 민족해방"을 위한 <거리 굿>이 1984년 8월 한 성당 마당 주위에서 공연되었는데, 이는 미국과 일본에 의한 "민족 생존의 위기"에 대한 민중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85년엔 농민들과 축산업자들이 <소머리 탈굿>이라는 길거리 연극을 펼쳤다. 한국의 전통소를 몰며 농축산물 수입에 반대 항의하는 시위였다.

1980년대 민중연극이나 민족연극 운동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1988년 12월 <전국 민족극운동협의회>라는 단체를 세운 것이었다. 이 협의회는 신식민주의와 군사독재 그리고 독점자본주의에 영향받은 한국 문화를 추방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다. 나아가 민족통일에 기여하기 위해 제3세계의 연극운동과 연계하기로 결의했다.

이 협의회는 1988년 3월부터 4월까지 열린 제1회 민족극 경연대회인 '민족극 한마당'을 계기로 조직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공연된 반미 연극은 다음과 같다. 극단 '현장'의 <횃불>은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 기업에서의 노동쟁의를 묘사하면서 한국인 관리들의 미국에 대한 굴종을 풍자했다. 이 연극은 그 후 전국에 걸쳐 여러 대학과 노동현장 등에서 100회 이상 공연되었다.

극단 '토박이'의 <금희의 오월>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극화한 것으로, 항쟁에 대한 야만적 탄압에 초점을 맞추며 미국의 개입에 대한 단순한 의혹을 제기했다. 놀이패 '신명'의 <일어서는 사람들> 역시 광주 5월 항쟁을 소재로 했는데, 항쟁의 배경에 초점을 맞추며 한국의 군사독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비난했다. 나아가 미국을 물리쳐야 할 또 하나의 '적'으로 규정했다. 이 연극은 전국 각 지역에서 여러 차례 재공연되면서 수천 명의 관중을 이끌었다.

1989년 3월부터 5월까지 열린 제2회 '민족극 한마당'에 올려진 16편의 공연 작품 가운데 거의 절반이 반미 연극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절반의 작품들도 노동 문제나 농촌 문제를 다루면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어느 정도 담고 있었다. 1980년대 말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급속도로 전개된 반미주의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 때 공연되었던 대표적 반미 연극 몇 편만 소개한다. 서울 극단 '아리랑'의 <불감증>은 민족 분단에 초점을 맞추고 미국을 비판했다. 서울 춤패 '디딤'의 <내 사랑 한반도>는 반전 반핵 투쟁을 형상화했다. 대구 놀이패 '탈'의 <미국 미국 미국>은 주한미군 기지를 다루었다. 제주 놀이패 '한라산'의 <4월굿 한라산>은 1948년 미군 점령에 대한 제주에서의 민족해방 투쟁을 극화했다. 광주 극단 '토박이'의 <부미방>은 "광주항쟁의 진상과 그 배후인 미국의 본질을 알리고 반미 구국항쟁의 횃불을 올렸던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다루었다. 춘천 극단 '삭주벌'의 <이 땅이 뉘 땅인데>는 윤정모의 소설 <빛> (1988)을 바탕으로 미국 농산물 수입과 한미합동군사훈련 '팀 스피리트' 기간 중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범죄를 비판했다.

1990년대 초엔 1980년대 말에 비해 한국 사회에서 반미주의 운동이 약해지면서 반미 연극 공연이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1992년 4~5월 열린 제5회 '민족극 한마당'에서는 겨우 세 편의 연극만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표출했다. 놀이패 '우금치'의 <아줌마 만세>는 미국 쌀 수입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를 보여주었다. 놀이패 '한라산'의 <4월굿 꽃놀림>은 1948년의 제주항쟁을 다루었다. '춤누리'의 <아침 갈매기>는 부산에서의 미국과 일본 문화의 침투에 초점을 맞추었다.

1990년대 초 민족연극운동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현상은 반미감정이 주로 노동연극과 농민연극을 통해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91~1992년 창작 공연된 민족연극이나 민중연극의 절반 이상은 노동 문제와 관련되었다. 이러한 다수의 노동연극은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기업에서의 노동쟁의를 다루면서 미국의 착취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사무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초점을 맞춘 '우리굿 사랑'의 <사원 모집> (1990), 여성 육체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민요연구회'의 <아들아 이젠 말하리라>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아들아 이젠 말하리라>는 앞에서도 소개했듯 민요극 형식으로 공연되었다. 연극이 보여준 대로, 피코 회사의 여성 노동자들은 실제로 서울의 미국상공회의소 건물을 점거하기도 하고, 미국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기도 했으며, 1990년 미국을 두 차례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이 반미 민요극은 1990년 제3회 '민족극 한마당'에서 공연된 뒤 여러 번 재공연되었다. 그리고 1991년 '한국 민족예술인 총연합'(민예총)으로부터 제 1회 민족예술상을 받았다. 이 상을 받으면서 '민요연구회' 대표는 '식민지'의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인들에 맞서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으며 단순히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 긍지'를 세우기 위해 미국을 항의 방문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 미국이 한국의 농산물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넣자 농민들을 위한 연극을 활발하게 공연한 연극단체들도 있었다. 놀이패 '우금치'는 농민들을 위한 굿 <호미풀이>를 1990년 제 3회 '민족극 한마당'에 출품했다. 그리고 미국의 압력에 항의하기 위해 전국의 농촌지역을 순회하며 40회 이상 재공연했다.

1991년 11월 4개의 연극단체가 전국에 걸쳐 농촌지역을 돌아다니며 쌀 문제에 관한 민족극을 동시에 공연했다. 주제는 미국에 대한 쌀시장 개방 반대였다. 중서부지역에서는 놀이패 '우금치'가 <아줌마 만세>를, 중동부지역에서는 세 단체가 <농사꾼 타령>을, 남서부지역에서는 놀이패 '신명'이 <밥이 지일이여>를, 동남부지역에서는 극단 '자갈치'가 <전량수매 쟁취, 수매가 인상>을 공연했다. 이러한 전국적 동시 공연은 '전국 농민회 총연맹'(전농)이 후원했는데, 이는 1991년 11월 서울에서 미국 쌀 수입을 반대하기 위한 농민집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농'은 1989년 2월 국회 앞에서 가진 농민집회를 기념해 1990년 만든 조직으로, 당시 수만 명의 농민들이 "미 제국 추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990년 4월 첫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700만 농민과 함께 외세의 개입과 약탈 행위에 맞서 한국의 민주화와 민족자주통일 실현에 기여할 것을 다짐했다. 따라서 농민운동 조직은 미국 쌀 수입뿐만 아니라 한국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와 미군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나아가 농민들을 동원하고 그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문화활동의 일환으로 반미를 주제로 한 연극을 공연했다. '전농'이 이끌었던 농민집회에서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굿을 올릴 때 쫓아내야 할 귀신 가운데는 '미 제국 귀신'과 '외국 농축산물 귀신'이 들어있기 마련이었다.

대학생들 역시 여름방학을 이용해 농촌에서 반미 연극을 공연했다. 1980년대 말부터 학생들이 그러한 문화선전 활동을 통해 농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게 유행했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미국 쌀 수입이 가져올 문제들을 농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1991년 여름방학 동안 50개 이상의 농촌마을을 돌며 연극을 공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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