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에 집착하지 말고 '핵 불사용'부터 추진하자

[정욱식 칼럼] 불가역적인 핵시대로 접어든 한반도, 생존의 조건은? (4)

1945년 7월 미국의 핵무기를 최초로 손에 넣은 이후 지금까지 생산된 핵무기의 누적 생산량은 약 13만~14만 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26년 1월 현재 전 세계에는 1만 2,187기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약 12만기의 핵무기는 어디로 간 것일까?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에 따르면, 이 가운데 2,120기는 핵실험으로 소진되었다. 실전에서 사용된 핵무기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2발의 핵폭탄이 현재까지는 전부이다. 나머지는 모두 노후화, 군축협정, 핵무기 현대화 과정에서 폐기되었다.

이렇듯 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가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하다.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핵독점이 깨지면서 '공포의 균형'이 이뤄진 탓이 크다는 것이 주류적 해석이다. 또 핵보유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정치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다.

핵 금지와 그 역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목격한 이후 국제사회에 '핵무기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정치적·도덕적 규범, 즉 핵 금기(nuclear taboo)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러시아)은 비핵국가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거나 패전에 몰려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거나 못해왔다.

그런데 이 지점에 지독한 역설이 존재한다. 핵 금기는 매우 강해진 반면에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거나 최소한 먼저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 규범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인 조약인 핵확산금지조약(NPT)에는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명시적인 조항이 없다. NPT의 결함을 극복하고자 체결·발효된 핵무기 금지조약에는 9개의 핵보유국 모두 가입하지 않은 상태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국제사회에선 핵보유국이 비핵국가를 상대로 핵무기 사용 및 그 위협을 하지 않고, 핵보유국 간에도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구속력 있는 약속을 담은 '핵무기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높아져 왔다. 하지만 핵보유들 사이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큰 진전은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류 생존을 핵보유국의 선의나 정치적 셈법에 맡겨두기에는 핵의 미래가 어둡게 다가오고 있다. 각각 5000기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는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현재 500기 가량을 보유한 중국은 2030년에는 1000기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및 전쟁의 장기화로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지정학적 위기에 처했다는 유럽의 핵보유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질량적으로 핵무기를 늘릴 계획이다.

조선(북한)이 기하급수적인 핵무기 증강에 나서면서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오늘날 지구촌의 핵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우려 사항이다. 무엇보다도 인공지능(AI)이 핵무기의 조기경보, 표적식별, 지휘통제, 심지어 핵사용 결정 과정에까지 관여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신의 불'이라고 불리는 핵무기와 '신의 지능'이라고 일컬어지는 AI의 결합도가 높아질수록 인류의 생존은 타자화되고 만다.

▲ 미국과학자연맹(FAS)이 집계한 국가별 핵 탄두 보유량. ⓒFAS 홈페이지 갈무리

'불사용'이 시급하다

핵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최선은 핵무기를 모두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단기간 내에 가능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에 따라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거보는 계속 내딛으면서도 핵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과도기적이고 실효적인 조치가 시급하다. 핵무기 선제 불사용을 조약 등의 방식으로 국제 규범화하는 것이 그 유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

현재 핵 선제 불사용과 관련해 가장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핵보유국은 중국이다.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에 최초 핵실험을 실시한 날부터 이 정책을 공언하면서 다른 핵보유국들도 마찬가지 약속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이 핵 동결이나 감축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또 국제사회 일각에선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조선 등 비공인 핵보유국이 참여하지 않는 핵 선제 불사용 조약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답보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대안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하나는 핵강대국들의 군비통제 협상에서 핵 선제 불사용과 핵무기 감축을 동시적 의제로 삼는 것이다. 이는 상대가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규범이 정착될수록 핵보유국들의 핵군축 여건과 환경 조성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또 이러한 접근은 핵무기와 AI를 결합시키려는 동기도 약화시킬 것이다. 핵무기의 용도를 오로지 억제와 방어에만 두면, 상대의 핵 선제공격 가능성을 의식해 AI를 적용한 신속하고도 자동화된 지휘통제체계 구축의 필요도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비공인 핵보유국도 이 논의에 참여하는 방안이다. 우리의 입장에선 조선의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김정은 정권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다만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핵전쟁 방지 및 전략적 안정을 증진하자는 취지의 협상에는 관심을 가질 법하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도 이 방안에는 열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미·러·중 핵 강대국들이 먼저 핵군축 협상을 벌이고 여기에 조선도 초대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가장 주목할 상대는 중국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은 핵 선제 불사용을 국제 규범으로 만드는 데에 가장 적극적이다. 또 최근 조선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복원·발전하면서 "북한의 비핵화"나 "한반도 비핵화"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을 두루 고려할 때, 핵 선제 불사용이 포함된 핵군비통제는 중국과의 협력적 의제가 될 수 있다.

물론 9개 핵보유국이 모두 참여하는 협상틀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이다. 이에 따라 과거에 있었던 6자회담의 재개를 통한 지역적 차원의 접근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6자 가운데 조선·미국·중국·러시아는 핵보유국들이고 한국과 일본은 비핵국가이면서 미국으로부터 핵우산을 포함한 확장억제를 제공받고 있다. 6자 모두 핵전쟁 방지에 사활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9월에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의 방미와 유엔 총회가, 11월에는 중국에서 APEC 정상회의가 예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재명 정부와 민간은 미중 양국에 핵군비통제 및 조미정상회담 성사가 미중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또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핵 선제 불사용을 비롯한 지구적·지역적 차원의 핵군비통제에 나서야 한다는 구상을 밝히는 것도 고려할 법하다.

이를 위한 대전제가 있다. 정부가 비핵화는 무음으로 처리하고 "한반도를 포함해 핵위협과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향해 노력하겠다"는 프레임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한반도는 비핵화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핵전쟁 위험을 줄일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핵 없는 세계라는 장기 목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핵무기가 먼저 사용되지 않도록 만드는 새로운 국제 규범을 만드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생존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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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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