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시대 "각하 오래 사십쇼" 했던 만화가, 그 뒤엔…

[문학예술 속의 반미]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V.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1980~1992

9. 1980년대 미술 속의 미국 (2)

반미 미술작품을 그 형태에 따라 일곱 종류, 그리고 내용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어보았다. 세 번째로 만화는 1980년대 말부터 홍보나 선전활동을 위한 대중매체가 되었다. 캐리커쳐, 연재만화, 만화책 등 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풍자다. 그러나 '6월항쟁'에 따른 민주적 조처로 언론의 자유가 조금 초래된 1987년까지는 진지한 정치 만화가 거의 등장할 수 없었다.

▲ 안의섭 화백의 연재만화 <두꺼비> ⓒ한국일보 갈무리
예를 들어, <한국일보> 1986년 1월 18일 자에 실린 안의섭 화백의 연재만화 '두꺼비'는 레이건 대통령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을 풍자했다. 네 컷짜리 만화에서 첫 번째 컷에 "대통령 각하 오래오래 사십쇼", 두 번째엔 "하는 짓이 마음에 쏙 듭니다", 세 번째엔 "건강하셔야 합니다"고 외치는데, 네 번째 컷에서 '레이건'을 가리키는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안의섭은 안기부에 끌려갔고 '두꺼비'는 1987년 8월까지 1년 반 이상 모습을 감추었다. 그날이 전두환의 생일이었으니 각하를 모독한 고약한 생일선물이었지만, 보복 치고는 참 치졸하고 지나쳤다고 할까.

캐리커쳐에서는 이희재, 반쪽이, 박재동 등의 만화가들이 미국을 종종 비판적으로 풍자했다. 이희재의 반미 캐리커쳐는 다양한 팸플릿과 잡지 등에 나타났으며, 반쪽이는 1985년 6월 창간된 진보적 월간지 <말>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실었고, 박재동은 1988년 5월 창간된 진보적 일간지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다. 김을호 역시 <한겨레신문>에 '미주알'이란 제목의 4컷 만화를 매일 연재했는데 남한에 대한 미국의 지배에 관해 풍자하는 내용을 자주 그렸다.

극화나 이야기 그림의 형태로는 민해의 <이 세상엔 공짜가 없어요> (1986)를 꼽을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제 3세계에 대한 미국의 억압과 약탈의 역사를 묘사한 작품이다. 최민화의 <핵무기 숭배> (1985)와 신종봉의 연례 시리즈 <핵충> (1985-1989)은 미국의 핵무기 정책을 풍자했다. 주완수의 <벗에게> (1988)는 한국의 군사독재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았다.

1986년엔 서울노동운동연합이 <사장과 진실>이란 제목으로 노동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만화집을 펴냈다. 다양한 형태의 만화 모음집에서 이은홍은 미국을 한국에서의 '착취자'로 묘사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혔다.

1987년부터 대학생들이 만화동아리를 조직했는데, 그들은 민중만화 또는 이념적 만화를 창작하는데 몰두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동아리로는 연세대학교의 '만화사랑'과 서울대학교의 '그림터'였다. 전자는 1987년 6월 데모하다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을 추모하기 위한 첫 번째 만화집을 1987년 펴냈는데, 여기엔 제국주의 미국에 대한 캐리커쳐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자는 1988년 5월 반미 구호를 외치며 투신자살했던 조성만을 추모하는 이야기 만화를 실은 첫 번째 만화 팸플릿을 1988년 찍어냈다. 그가 자살하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미국 제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다.

1988년경부터 삽화를 곁들인 사회과학 서적들이 유행하면서 진지한 반미 만화가 등장했다. 이념적 만화책들이 시리즈로 출간되기도 했다. 박규홍의 두 권짜리 만화책 <노동의 역사> (1989)는 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계급투쟁을 벌이라고 촉구했다. 그의 다른 두 권짜리 만화책 <친미양요> (1989)는 더욱 노골적으로 반미적이었다. 미국 제국의 속성과 조선에 대한 침범의 역사를 파헤치면서 민족해방 및 한반도통일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의 농산품 관세를 낮추라는 미국의 압력이 거세졌다. 이에 대응하며 농협중앙회는 50만 명에 이르는 초등학생들에게 한국의 농산물을 먹으라고 권하는 내용의 몇 가지 만화책을 만들어 배포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과 정신> (1990)이라는 제목의 만화책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외국 농산물은 유독성 화학물질, 항생물질, 방사능 성분 등을 포함하고 있다고 얘기하며 어머니에게 수입 농산물을 사지 않도록 확인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와 한국주재 무역관리들은 강력한 항의를 제기했고, <워싱턴 포스트> 1990년 12월 28일 자는 이를 "수입농산물에 대한 공식적 반대 운동의 징후"라며 "거의 광란적 (near-hysterical)"이라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협중앙회는 그러한 만화책을 계속 만들어 배포했다. <가찬이의 신기한 여행> (1991)에서는 즉석 (인스턴트) 식품을 비롯한 서양 음식이 어린이들의 비만을 불러온다며 한국은 외국으로부터 쌀을 수입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달리의 시골 기행> (1992)을 통해서는 한국인들의 서양식 식사 습관을 비판하며 수입 담배를 포함한 수입 농산품을 거부했다.

넷째, 사진이 생생한 폭로를 위한 매체로 점점 중요해졌다. 일부 사진작가들은 민중의 삶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계급의식을 일깨우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빈민가를 고급맨션과 비교해서 보여주는 사진 등을 찍은 것이다.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관련해 김용태는 1984년 6~7월 사진전시회에서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사진 300여 장을 소개했다. 미군 부대 기지촌 동두천에서 수집한 사진들을 통해 민족분단의 현실을 묘사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한 사진은 세 명의 미군 뒤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I Am Sure To Go To Heaven Because I Spent My Time In Hell (나는 확실히 천국에 갈 거다. 지옥에서 내 인생을 보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터에 그들은 한국을 지옥이라 여기면서도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는 역설적 현상을 보여주는 사진이랄까.

1987년 대통령선거 운동 기간 중 광주항쟁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광범위하게 전시되었다. 여당후보를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진들은 광주학살의 잔혹성을 생생하게 드러냈는데, 이는 1980년대 한국에서의 폭발적인 반미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게다가 광주학살에 관한 약 100장의 컬러사진이 그 학살에 미국이 방조했다는 기사들과 함께 <광주민중항쟁 비망록> (1989)에 실렸다.

1980년대 중반부터 반미 콜라주 (collage)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사진이 콜라주에 자주 적용된 것이 주목할 만했다. 신학철의 <한국 현대사 -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 (1990)는 미국의 통제 아래 있는 군사독재와 재벌의 다양한 상징, 외국 문화의 나쁜 영향, 코카콜라를 비롯한 수입 소비재 등을 보여주었다. 작품의 제목이 가리키듯 한국이 미국의 새로운 식민지라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손기환은 <벽화를 위한 습작> (1984)과 <식민지> (1985)에서 한국이 1945년 이전엔 일본의 식민지였고 1945년 이후엔 미국의 식민지로서 여전히 식민지라는 점을 암시했다.

콜라주 분야에서 가장 많은 반미 작품을 만든 화가는 박불똥이었다. 1985년의 연작품 <악몽>을 통해 그는 미국인이 한국의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자라고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1986년 창작된 일련의 <사령관 각하>는 한국의 군사독재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고 암시했다. 그리고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 (1990)과 <돈쟁> (1991)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신식민주의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러한 작품들 때문에 1985년 구금되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1984년부터 1993년까지 50회 이상의 전시회에 등장했으며, 일부 작품들은 1993년 우편엽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섯째,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캠퍼스, 공장지대, 농촌, 그리고 공공장소 등에 벽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민중미술가들은 벽화를 선전선동을 위한 미술운동의 가장 효과적 수단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다. 그러나 반미 벽화는 적절한 공간을 찾기 어려워 대학캠퍼스 이외의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1988년 전북 지역의 학생 미술가들이 <척양 척왜>라는 벽화를 그렸는데, 한국인들이 미국과 일본을 거부하고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서울대학교 미술대 학생들도 학생회관 외벽에 그림을 그렸다. 학생회와 다수의 학우들이 지원한 가운데 두 달 만에 완성된 벽화는 한 학생이 미국 국기를 찢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었다. 대학 당국이 1991년 7월 국립 대학교에 그러한 반미 벽화가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지워버리자, 학생들은 1991년 9월 다시 그렸고, 대학 당국은 1991년 12월 다시 지웠다. 이러한 갈등 끝에 학생들은 1992년 9월 학생회관 내벽에 "주한미군 철수하라"는 구호를 곁들인 다른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 반미 구호는 곧 "조국통일 완수하자"는 구호로 바뀌었다. 대학 당국이 벽화를 지우지 않는다며 타협한 결과였다.

여섯째, 조각 작품 역시 반미 운동에 활용되었다. 안규철은 1986년 <정동 풍경>이란 석고조각을 만들었는데, 한국의 젊은이가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정동의 주한미국대사 관저의 벽을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1989년 10월 6명의 대학생들이 소형 화기와 최루 가스 등으로 무장하고 주한미국대사 관저로 쳐들어가 "그레그 (미국 대사)를 처단하라" 그리고 "우리는 미국의 무역 압력을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폭탄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

'조소패 흑'이라는 조형미술가 그룹은 1990년 <분단의 원흉>을 통해 제목 그대로 미국이 1945년 한반도 분단을 주도했다고 암시했다. 이 작품 속에서 미군들은 한국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데, 한 쪽에는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을 해방자로 환영하는 모습을, 다른 쪽에는 한국인들이 놀라고 분노하는 모습을 조각했다.

1992년 10월 제5회 소형 조각 전시회에 출품된 조각 작품 가운데 김진영의 <모성>은 미국이 "변함없는 우호"라는 명분으로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원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김운성은 <무의식의 사회>를 통해 한국사회가 미국 문화와 수입 소비재의 영향 아래 무의식적으로 미국화하는 것을 암시했다.

일곱째, 다양한 형태의 많은 미술 작품들이 일상생활용품에 적용되었다. 생활미술운동의 영향을 받아 미술 작품이 달력, 우편엽서, 연하장, 손수건, 옷 등으로 활용된 것이다. 반미주의와 관련해서는 홍성담의 판화 달력과 박불똥의 콜라주 엽서가 주목할 만했다. 김인순을 비롯한 여성 미술가들이 창작한 걸개그림 <해방의 햇 새벽이 떠오를 때까지>는 우편엽서로 만들어져 1987년 대통령선거 운동기간 중에 널리 배포되었다. 이 카드는 곧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고 김인순은 체포되었다. 1990년 ‘흑손공방’이라는 미술가 단체는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기업 피코의 공장폐쇄에 맞서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전개된 노동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피코' 셔츠를 만들었다.

또한 민중미술은 시와 결합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반미 작품을 포함한 출판물은 일단의 미술가와 시인들이 펴낸 <그림과 시의 어울림> (1985), 홍성담의 판화와 김정환의 시가 어우러진 <해방 판화 시> (1987), 김준태의 시에 홍성담의 판화를 곁들인 <오월에서 통일로> (1989)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다른 형태의 미술 분야에서도 반미 작품이 적지 않다. 그들의 내용에 따라 다섯 가지로 분류해본다. 첫째, 미국의 정치 개입과 군사 지배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특히 최근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작품이 많다. 신학철이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창작한 <한국 현대사> 시리즈, 손기환의 <불청객> (1985), 손장섭이 1987년과 1988년 발표한 <역사의 창>, 김도기의 <조국의 봄> (1990), 이기홍의 <해방 전후> (1990), 김삼덕의 <정복자> (1991), 김희련의 <비핵 군축으로> (1991)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아마 이 분야의 가장 대표적 작품은 강요배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제작한 <제주민중 항쟁사> 시리즈일 것이다. 그는 50편의 그림 가운데 적어도 7편에서 1945년의 미국 점령군에 관해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들은 1992년 4월 전시회를 통해 선보였는데, <한겨레신문> 1992년 4월 9일 자 보도에 따르면, 2주 동안 매일 500명 이상이 관람했다.

둘째,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지배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민정기의 <관광지에서의 식사> (1982), 박형식의 <기념비> (1983), 주재환의 <미제 껌 송가> (1988), 김영기의 (1991), 최병수의 <명당자리> (1992) 등의 작품에 이런 반미감정이 담겨 있다. 참고로, 김영기의 작품 제목에 있는 'UR'이란 'Uruguay Round of Multinational Trade Negotiation'의 약자로, 줄여서 '우루과이 라운드'라 부른다. 우루과이에서 1986년 시작되어 1993년 타결된 다자 간 무역협상이다.

셋째, 미국의 문화적 영향을 풍자했다. 민정기의 <풍요의 거리> (1980), 남택운의 <농촌 문화, 교육, 수입 개방> (1990), 김운곤의 <영어 선생님 빤쯔는 빨간 빤쯔> (1990), 이경재의 <열린 교육 열린 세상> (1990), 임향한의 <톰과 미찌꼬> (1991), 함종호의 <아이들 I - 가라, 가라, 가라> (1992) 등의 작품이 이 범주에 속한다.

넷째, 이념 갈등이나 투쟁 역시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이인철의 <가라 자본가 세상> (1990), 전진문의 <자본가는 당신의 피를 '쪽' 빨아 먹는다> (1991)가 대표적이다. 임옥상은 <아프리카 현대사> (1988)에서 한국이 미국의 제국주의 아래서 고통받고 있다고 암시했다. 이 작품은 폭이 50m로 발표 당시까지 최대의 크기를 기록했는데, 이에 대한 감상평이 한 대학의 서양미술사 기말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

제 3세계에서 들어온 반미 미술작품이 책이나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9년 6월 '그림마당 민'에서 제 3세계의 포스터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담고 있었다. "중앙아메리카 인민들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당신의 손길!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라 (The People of Central America need a hand..... yours! OPPOSE U.S. INTERVENTION)"

다섯째, 위와 같은 이유로 수많은 작품들이 주로 미국 국기, 엉클 샘, 미국 무기 등 미국을 가리키는 다양한 상징들이 파괴되거나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요배의 <맥잡기> (1983), 김효형의 <좀 더 큰 몸짓으로> (1990), 전종호의 <어머니의 땅> (1990), 김영란의 <우리가 산다는 곳> (1991), 신학철의 <유월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도> (1991) 등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신학철의 1987년 작품 <모내기>는 한 농부가 모내기하면서 미국의 무기와 다른 물건들을 파괴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 그림은 1987년 8월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전시회에 출품되었는데, 전시 중에 압수당했고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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