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980년대 음악 속의 미국
1980년대 독재정권이 정치적 집회를 금지하고 탄압하자 정권에 항의하는 노래가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집회가 열릴 수 있을 때 시위 노래를 부르면 국외자 또는 관중을 끌어들이고, 참가자들 사이의 연대를 강화하며, 전투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항의 노래의 초기 단계에서는 시위자들이 주로 유행가의 노랫말을 바꿔 부르는 이른바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노가바)가 일반적이었다.
시위 노래 만들기는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의식화 또는 지하 문화교육을 위한 필수 프로그램이었다. 노동자들이 바꾼 노랫말 내용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의식화했는지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사를 바꾼 노래들 가운데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깃든 부분을 몇 가지 소개한다.
요즘도 널리 불리고 있는 <독도는 우리 땅>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하와이는 미국 땅, 한반도도 미국 땅, 독도만 한국 땅" 1982년 크게 유행했던 <어쩌다 마주친 그대>라는 곡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붙었다. "어쩌다 빌려 온 양키놈 돈에 우리 공장 문 닫아버렸네. 어쩌다 빌려 온 쪽발이 돈에 우리들은 갈 곳이 없네" 원래 가사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이 내 마음을 빼앗아버렸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두 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네"였다. <가요 가요 나는 가요>는 다음과 같이 불렸다. "가요 가요 나는 가요 ..... 몸 팔러 가요 / ..... / 쪽발이 양키에게 몸 팔러 가요"
대학생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캠퍼스나 교회 등에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다. 1984년엔 민중 가수들이 개인적으로나 그룹을 만들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시위 노래를 창작해 팸플릿, 책자, 테이프, 디스크 등을 통해 유포했다. 이러한 민중 노래는 '투쟁을 위한 도구'에서 '생활가요'로 발전했고, 나아가 유행가를 대체하기도 했다. 민중 음악 또는 민족음악을 통한 노래운동에서 반미적 내용은 다음과 같이 표출되었다.
첫째, 음악 비평가들이나 음악학자들은 기존 유행가를 비판했다. 김창남은 유행가가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왜곡하거나 대중을 조작하는 데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이건용은 한국인들이 일본 가요뿐만 아니라 미국 팝송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본의 노래와 영화는 1945년부터 공식적으로 수입이 금지되었다. 우리를 식민통치했던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이에 반해 미국의 노래와 영화는 아무런 제한 없이 한국에 들어왔다. 이에 이건용은 한국이 미국의 문화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퇴폐적이고 쾌락만 추구하는 미국 팝송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는 데 대해 비판한 것이다. 김남일은 미국 팝 음악의 문화 제국주의적 특성을 지적했다. 미국이 팝 음악을 통해 제 3세계 대중의 인기를 끈 뒤 음악과 관련된 상품을 강제적으로 수출함으로써, 미국 팝음악이 제 3세계에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무기로 사용되어왔다는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전개된 생활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대학생들은 미국 팝송 부르지 않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비슷하게 서울지하철 노동조합 라디오방송국은 1988년 미국 팝송을 방송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둘째, 음악 비평가들이나 음악학자들은 한국의 제도적 음악교육을 비판했다. 이영미는 초등학교의 음악 교과서가 어린이들에게 반공, 안보, 근대화 등 국가 이데올로기나 정책을 주입시킨다고 주장했다. 조영주는 중고등학교의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는 국민가요가 반공정신을 주입시키기 위해 한국의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고교 음악책에 미국 민요가 압도적으로 많이 실려 있다며 음악 교과서 저자들의 미국에 대한 노예적 복종을 꼬집었다. 실제로 다섯 종류의 음악책을 조사해보니 미국 민요는 평균 12곡이 실린 데 반해 아시아 민요는 1곡, 라틴아메리카 민요는 2곡, 아프리카 민요는 1곡씩만 실렸다는 것이다.
셋째,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전통음악 부흥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널리 알려진 민중시인 신경림은 40여 명의 문인 및 예술인들과 함께 1984년 6월 '민요연구회'를 조직했다. 민요를 발굴하고 창작하며 유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국 민요의 부흥을 통해 민족의식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발맞춰 문승현은 라틴아메리카의 민요 부흥에 의해 미국의 재즈 음악이 근절되었다고 지적하며 민요가 신식민주의적 음악의 영향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주장했다.
'민요연구회'는 많은 반미 노래를 창작했다. 창작곡 <임진강 뱃사공>은 미국인들이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약탈했다며 한국에서 철수하라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해야 솟아라>에서는 외국의 노래와 춤 그리고 언어가 한국을 지배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한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가사를 붙인 <꼭두 아리랑>은 미국인들이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한인 여성들을 강간하며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원하는 것을 비난하는 등 강렬한 반미감정을 담았다.
이 연구회는 1990년 <아들아, 이젠 말하리라!>는 제목의 민요 판굿을 열기도 했다.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기업인 피코에서 1989~1990년 전개되었던 노동투쟁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었다. 이 판굿에서 <피코 투쟁가>와 <민족해방가> 같은 반미 민요가 불렸다.
1990년엔 일단의 음악인들이 부르주아 지배문화를 극복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다스름'이란 국악 모임을 만들었다. 이 진보적 국악인들은 노동계급이 미국 제국주의 아래의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선도하라고 촉구했다.
넷째, 1980년대 중반부터 민중 가수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대중가수였던 정태춘이 1980년대에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민중 가수였을 텐데, 그는 몇 곡의 반미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먼저 1983년 발표한 <인사동>에서 "양코쟁이 게다 신사 납신다"며 미국인과 일본인들을 비하했다. 1984년 발표한 <고향집 가세>에서는 "음,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 음, 융단 같은 골프장 잔디와"라고 노래함으로써 미군부대의 '오만한 외모'를 비꼬았다. 이 노래들이 디스크에 삽입되자 검열관들은 미국에 대한 부정적 묘사를 모두 지워버렸다. 미국에 대해 이처럼 완곡한 비판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1990년 발표한 <그대, 행복한가>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미국을 비판했다. 몇 소절을 그대로 아래에 옮긴다.
".../ 그대 행복한가 / 시장 개방 자유 경제 수입 식품에 / 입맛 돋으시는 그대 그대 / 그래 거기에도 칼로리와 땀 / 냄새는 있지 있어 / 그대 행복한가 / 주한 미군 기동 훈련과 / 핵무기에 고무 받으시는 그대 / 그대 그래 거기에도 평화와 / 인도주의의 구호는 있지 있구 말구 /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 우리 중 누가 그것들의 / 희생양이며 표적인지 / 정말 알고 있나 알고 있나 /..."
같은해 1990년 발표한 <아, 대한민국>에서는 "식민 독재와 맞서 싸우다 /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 사라져 간 사람들은 말고"라며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것을 암시했다. 이영미의 조사에 따르면, 이 노래는 1990년대 후반 각종 정치집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였으며 1980년대 3대 민중가요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민족예술> 1992년 8호에 의하면, 정태춘은 1991년 12월 '민주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뽑혔다.
정태춘의 음악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에서는 더 강렬한 반미감정이 드러났다. 음악극의 제목은 초등학교 1학년 음악책에 나오는 널리 알려진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전통 소는 노란색인데 반해 미국 소가 얼룩무늬를 띠고 있기 때문에, 동요의 '얼룩송아지'는 '누렁송아지'로 바로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음악극을 1989년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미국이 한국의 농업시장을 개방하라고 거센 압력을 가하는 것에 대해 농민들이 반미 시위를 자주 벌일 무렵이었다. 1980년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무역 마찰이 가장 심각한 품목이 미국산 쇠고기와 담배였기에, 농민들이 시위하면서 외친 구호 가운데 하나는 "한국 소 죽이는 미국 소 몰아내자"였다.
정세현은 광주 지역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잘 알려진 민중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87년 노래패를 만들고, 1990년엔 한국 음악에 대한 서양 문화의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 고전음악 연구회를 조직했다. 당연히 그는 많은 반미 노래를 불렀다. <통일은 언제일까>에서 분단을 원망했고, <꿈은 아닐레라>와 <혁명 광주>에서는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고 외쳤다. <통일의 나라로 가자>에서는 미국인들을 제국주의자로 부르며 적으로 간주했는데, 이 노래는 1988년 한반도 통일을 위한 노래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진군가>에서는 미국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민족해방투쟁을 주창했다. 이 밖의 많은 노래에서도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단어 두 개는 '해방'과 '통일'이었으니, 반미 내용을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정세현이 1980년대에 미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그가 1987년 어느 주말 한 라디오 생방송 음악 프로그램에 초대되었다. 사회자와 대담을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미국인들이 1945년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던 한인들을 쏴 죽였다고 비난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인 환영인파를 쏴 죽인 건 미군 사령관의 부탁을 받은 일본군들이었지 미군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사회자가 그의 말을 급히 가로막았는데, 그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하던 정보기관원이 나중에 사회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많은 학생 가수들은 미국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표출했다. 1980년대엔 거의 모든 대학에 노래패가 들어섰다. 그들은 민중가요를 수집하고 창작했으며 다양한 인쇄물을 통해 보급했다. 캠퍼스 안팎에서 공연도 했다. 내가 1993년 6~7월 전국의 38개 대학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노래 팸플릿과 책자들에 수록된 300여 곡의 노랫말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해방'이었다. 한국이 미국의 신식민지 아래에 있거나 진정한 독립국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몇 곡의 노래들은 제목 자체가 다음과 같이 반미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반미출정가> 시리즈, <반미 민족해방 통일가>, <들어라, 양키>, <반전반핵 양키고홈>, <민족해방가> 시리즈, <자주통일가>, <코카콜라>, <기지촌>.
아마 1990년대 초까지 대학가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널리 알려진 노래패는 1977년 만들어진 서울대학교의 '메아리'였을 것이다. 이 동아리는 유명한 민중 가수를 많이 배출했고 해마다 노래책을 발간해 일반서점을 통해 판매하기도 했다. 특히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출판된 제 7-9집엔 무수한 반미 노래들이 실렸는데, 이 가운데 제9집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배포 금지되었다.
윤민석은 한양대학교 노래패 일원으로 학생들에게 유행했던 노래를 많이 지었다. 1988년 발표한 <반미출정가>에서 그는 미국을 묘사하는 데 "철전지원수 미제" 등 극단적 어휘를 적지 않게 사용했다. 1989년 발표한 <애국의 길>에서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반미투쟁을 벌이라고 촉구했다. 이 반미 노래는 1990년대 초까지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그는 1991년 12월 '민주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두 번째로 선호하는 작곡가로 뽑혔다.
1987년 가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단체인 <노동자 노래단>이 1988년 창립되었다. 이들은 1992년까지 적어도 네 개의 노래테이프를 제작했고, 10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 다른 노래모임 <예울림>과 함께 <꽃다지>라는 이름으로 통합 확대되었다. 이들의 <노동조합가>는 한국의 민족자주, 민주, 한반도 통일을 주창했고, <전노협 진군가>는 노동자들에게 한국에서 날뛰는 외세들에 대항해 투쟁하라고 촉구했다. 이 두 곡은 1990년대 초까지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들이었다.
<꽃다지>는 노동과 관련된 노래만 부른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들은 <1노 2김가>를 만들어 보급했다. 1990년 대통령 노태우와 보수적 야당지도자 김영삼과 김종필이 진보적 야당지도자인 김대중에 대항해 이른바 '3당 통합'을 이룬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3당 통합'이 미국의 정치조작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이 노래는 1991년 12월 '민주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의 하나로 뽑혔다. 그리고 <한겨레신문> 1991년 2월 3일 자에 따르면, 많은 노동자들이 이 노래를 통해 그들이 왜 정치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를 만든 김호철이 주장했듯 민중가요는 민주화운동의 '훌륭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김호철은 위에 소개한 3곡의 노래를 포함해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 70~80곡을 만들었는데, 그는 1991년 12월 '민주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지지로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다섯째, 반미 노래는 문화운동이나 정치투쟁 대신 1980년대 말부터 흔히 열렸던 다양한 음악 행사에 자주 등장했다. 1988년부터 대학생들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연례 노래 경연대회를 갖기 시작했다. 대개 전국에 걸쳐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모이는 노래대회에 선보인 거의 모든 노래엔 반미적 가사가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미제놈'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묘사한 정세현의 <통일의 나라로 가자>는 1988년 제1회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국 민족예술인 총연합'이 주최한 두 가지 음악 행사는 다양한 종류의 비슷한 행사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하나는 1990년부터 매년 봄에 열린 <자, 우리 손을 잡자>는 음악회였다. 다른 하나는 1989년부터 매년 가을에 실시된 <노래 판굿 꽃다지>라는 음악극이었다. 이 두 가지 행사는 매일 수만 명의 관중을 동원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몇 곡의 반미 노래가 불렸다.
노래경연대회, 음악회, 음악극 등을 포함한 음악행사들은 흔히 대규모로 열렸다. 그 이유로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정치적 집회보다 문화 행사를 갖는 게 정부의 허가를 받기 쉬웠다. 둘째, 한국에서 민주화가 서서히 성취되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 행사가 정치적 집회보다 많은 관중을 동원할 수 있었다. 셋째, 노래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지식이나 큰돈 없이 유포되고 감상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넷째, 노래는 주로 연극을 비롯한 다른 예술 장르와 쉽게 통합될 수 있었다.
이렇듯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담은 노래의 형태는 가사를 바꾼 노래들, 행진곡, 민요, 영화주제가, 그리고 심지어 찬송가까지 포함했다. 그리고 가사에 드러난 반미적 내용은 민족 분단, 반전 반핵, 미군 기지촌의 현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등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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