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980년대 미술 속의 미국 (1)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청년 미술가들을 저항 운동가로 이끌었다.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나자 '광주 자유미술인협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 미술가들은 다양한 선전활동을 펼쳤다. 사람들에게 전단과 피켓 그리고 현수막 등을 돌리고 자동차, 건물 벽, 전봇대, 길거리 등 조그만 여백이라도 있는 곳엔 반정부 및 반미 구호를 그렸다. 1982년엔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나아가 외세와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봉건잔재에 대한 투쟁에 초점을 맞춘 민중미술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민중미술 운동을 전개했던 다른 진보적 미술인 모임은 '현실과 발언'이었다. 이 그룹은 1980년부터 한국의 정치와 사회 상황에 초점을 맞춘 전시회를 해마다 열었는데, 1980년 11월 첫 전시회에서부터 반미적 작품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오윤의 '마케팅 I - 지옥도'는 한국이 코카콜라를 비롯한 미국산 소비재들로 가득 찬 생지옥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원동석의 '달러를 쳐다보는 원숭이떼들'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지배를 암시했다.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이 그룹은 1988년 말 미국에 대한 한국의 종속을 주제로 반미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미국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강연과 토론회도 가졌다. 전시된 작품 가운데 임옥상의 몽타주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 I'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 역사를 보여주고, 박불똥이 미국 국기와 코카콜라병 등 혼합재료로 설치한 '코화카염콜병라 (코카콜라 화염병)'은 미국이 붕괴되길 바라는 뜻을 담았다.
미술평론가 최열에 따르면, 1983년부터 대학생들이 미술운동 동아리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원광대학교 등에 민중미술반, 민화반, 판화반 등이 들어선 것이다. 1984년 7월엔 전주에서 대학생 미술활동가들을 위한 연합수련회가 일주일간 열렸는데 여기서 채택된 그들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민중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미술 활동을 통해 통일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나아가 한국이 신식민주의와 봉건독재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민중미술 운동의 목표를 외세와 봉건독재 그리고 독점자본 등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세력들을 물리치는 데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1985년 11월엔 150여 명의 진보적 미술가들이 '민족미술협의회'라는 전국적 단체를 출범시켰다. 그들은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는 제도적 압력과 책동을 극복하고 한반도 통일에 기여할 것을 선언했다. 그들의 미술운동에 획기적 사건은 <그림마당 민>이라는 미술관을 연 것이었다. 1986년 2월 문을 열면서부터 민중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다양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었으며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미술 활동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자주 확립', '외세 거부', '신식민주의 반대' 등의 말을 통해 표출되었다. 민족미술이나 민중미술은 선전선동 차원에서 반미감정을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미술운동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도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 1984년 8월 30일 자 보도에 따르면, 1980년부터 1984년까지 1980년대 전반기에만 130회 이상의 전시회가 열렸고, 이 운동에 참가한 예술가들은 10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수의 반미적 작품이 전시된 '해방 40년 역사전'은 1984년 8월부터 12월까지 36일 동안 5개 도시에서 4~5만 명의 관중을 기록했다.
반미 미술작품을 그 형태에 따라 일곱 종류, 그리고 내용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어보았다. 첫째, 1980년대 초 새로운 미술운동의 가장 대중적 매체는 판화였다. 비교적 싸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술가들은 1983년부터 민중이 직접 만들며 즐길 수 있도록 대중을 위한 다양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분야의 선도자는 수많은 반미 판화를 만들어낸 홍성담이었다. 1982년 한국 최초로 판화 달력을 제작했던 작가다.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광주항쟁을 연결해 구성한 작품 '세월오월'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묘사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판화를 통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조를 폭로하고 미국과 일본의 신제국주의 아래 놓여있는 한국을 묘사했다. 한국인이 미국인을 상징하는 엉클 샘을 짓밟고 미국 국기를 찢는 모습을 통해 한국이 미국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판화를 만들기도 했다. 1985년엔 광주항쟁에 관한 200여 점의 작품이 경찰에 압수당하기도 했는데, 그는 1987년부터 몇 권의 판화집을 출판했다.
황재형의 '코카콜라' (1985), 문영태의 '광화문 거리' (1986), 김방죽의 '오뉴월 땡볕 공화국' (1986) 등은 한국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지배를 보여주었다. 유연복은 '미국에 대한 독립투쟁' (1989)을 통해 한국인들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을 거부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박경훈은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 당신의 조국' (1992)에서 제목이 가리키듯 미국의 통제 아래 있는 한국의 군사독재를 묘사했다.
둘째, 1980년대 후반 정치적 집회가 허용됨에 따라 커다란 걸개그림이 민중미술 운동의 유력한 도구가 되었다. 흔히 여러 미술가들이 집단으로 창작한 거대한 그림은 1980년대 말 학생데모나 노동쟁의 등을 포함한 대규모 집회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유행했다. 많은 미술가들은 걸개그림에 미국을 상징하는 대통령, 엉클 샘, 성조기, 핵무기, 그리고 미국의 공산품이나 농산물 등을 물리치거나 파괴하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반미주의를 드러냈다.
1980년대에 최초로 등장했던 걸개그림은 '민중의 싸움'으로, 1984년 광주의 한 문화행사에 전시된 가로 12미터에 세로 25미터 짜리였다. 한국인들이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미국인들에 대항해 투쟁하는 내용이었다.
1987년까지 아마 가장 반미적인 걸개그림은 전정호와 이상호가 그린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1987)였다. 폭 6미터, 높이 3미터의 그림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담고 있었다. 노동자는 성조기를 불태우고, 농부는 성조기를 반으로 찢으며, 미국 핵무기는 한국인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전투경찰이 시민의 목을 조르고, 그 전투경찰의 머리를 쓰다듬는 전두환 대통령의 머리를 레이건 대통령이 쓰다듬는데, 레이건의 머리 위에 젊은이가 남북한의 국화를 들고 오줌을 싼다.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들이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원하는 미국을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던 것이다. 이 그림은 광주에서 1987년 8월 광복 42주년을 축하하는 문화행사에 처음 전시되었고, 일주일 뒤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그리고 1987년 9월 제주에서 전시되던 중 경찰에 압수되었고, 작가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미 걸개그림은 1980년대 말까지 주로 대학생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1988년 조선대학교에 걸린 '민족통일 민중해방', 전북대학교에 걸린 '우리는 하나', 1989년 호남대학교의 '미 제국을 처단하자', 한양대학교의 '양키는 미국으로' 등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그들 모두 한국인들이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해 미국인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87년 가을 노동자들의 '대투쟁'을 거친 뒤에는 대형 그림들이 노동 현장이나 다른 공공장소에도 걸렸다. 여성 미술가들의 모임 '둥지'는 1988년 '맥스텍에서의 투쟁'이란 작품에 여성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초국적 기업을 운영하는 미국 자본가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그렸다. 1988년 부산의 메리놀 병원에 등장한 '우리의 노동조합'엔 미군들이 한국에 에이즈 (AIDS)를 들여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겼다. 1988년 부산 시내 길거리에 내걸린 '아! 양영진'은 그해 10월 부산대학교에서 "양키 고 홈"을 외치며 투신자살했던 양영진이 부활해 반정부 및 반미 데모를 벌이며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을 체포하고 미국 국기를 찢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그는 한국의 군사독재와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다 그에 대한 정부의 보복으로 군대에 강제 징집을 당한 터였다.
1990년대 초까지 가장 크고 가장 주목받았던 걸개그림은 1989년의 '민족해방운동사'였다. 1980년대 말 전개된 통일운동의 영향을 받아 200여 명의 미술가들이 1988년 12월부터 1989년 3월까지 11개의 패널로 창작한 것이었는데, 높이 2.6m에 폭이 무려 77m였다. 이 그림은 1894년부터 1989년까지의 한국 역사를 담고 있는데 이 가운데 미국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드러났다.
1945~48년의 남한 점령, 1950~53년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1961년부터의 군사독재 지원, 1980년 5월의 광주학살 방조, 1987년의 6월항쟁 개입, 그리고 1987년 이후 민족자주 및 통일운동. 나아가 미국 국기를 훼손하는 모습을 통해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힘을 모아 미국을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 그림은 1989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국에 걸쳐 15개 이상의 대학교에서 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 시내와 부산역 광장 등에도 걸렸다.
게다가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이 1989년 6월 평양으로 보내져 북한 미술인들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원본은 경찰에 의해 파괴되고 10여 명의 작가들이 체포되었다. 창작을 주도했던 홍성담이 7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자, 국제 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다른 미술가들은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1990~91년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 아래 전국적으로 '민족자주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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