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의 깃발'이 '인공기'?…검사의 착각"

[문학예술 속의 반미]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V.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1980~1992

7. 1980년대 시와 미국 (2)

셋째, 미국은 노동 시와 농민 시에서 경제적 '착취자'나 '침략자'로 묘사되었다. 김용신은 <거리의 순교자> (1985)를 통해 '식민지 조국'에서 택시를 몰며 '노예의 거리'와 '능욕의 거리' 그리고 '이방인의 거리'를 보여주면서 '움츠린 노예의 삶'을 거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양성우의 <김사장네 신발공장에 가면> (1988)과 백봉석의 <지옥선4> (198?)는 한국의 공장노동자들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한다고 한탄하는 내용이다.

김남주는 세 편의 연작시 <달라> (1988)에서, 그리고 이재무는 <일어서는 나라> (1990)에서 "달러가 들어와 토산품을 다 잡아먹고, 조선놈들의 심장을 다 갉아먹는" 등 미국 자본이 한국 경제를 침탈한다고 분노했다. 문병란의 <농민의 모습> (1986), 김용택의 <소> (1988), 농부시인 홍일선의 <5월에 농민들은 말한다> (1990) 등은 "미국놈들 수입소 때문에 수입담배 때문에 미국놈들 수입과일 때문에" 한국 농민들이 "농약 마시고 죽어야 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1980년대엔 노동자 시인들이 등장해 유명해진 게 주목할 만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노동자 시인으로 1984년 <노동의 새벽>을 펴낸 박노해를 들 수 있는데, <가리봉 시장>을 통해 공장 노동자들이 "물 건너 코큰 나라" 사람들을 위해 희생당하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1993년 펴낸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에서는 미국에 대해 이전보다 더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1988년 <만국의 노동자여>를 펴낸 백무산은 그 무렵 다른 어느 노동자 시인보다 더욱 급진적이고 전투적이었다. 그는 <전진하는 노동전사>에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거부하며 '양키 제국'을 물리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목숨 걸고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김해화의 <인부수첩18> (1986)과 박영근의 <파업> (1988)은 노동자들이 미국 자본을 등에 업은 한국 자본가들에게 속고 혹사당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9년엔 다양한 노동자들이 쓴 노동 시를 묶어 편집한 시집 <통제구역>이 출판되었는데, 여기엔 노동 투쟁에서부터 핵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의 반미 시가 수록되었다. 마산-창원 지역의 노동자들이 조직한 '참글'이라는 문학 동아리는 <현해탄 푸른 물결을 건너> (1990)라는 제목의 서술적 시에서 다국적/초국적 기업들의 모든 악행을 묘사했다. 그리고 미국의 압력 아래서 체결된 한미무역협정에 의해 한국이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 기업들의 낙원이 되었다고 풍자했다.

넷째, 일부 시인들은 한국 현대사의 재해석에 영향을 받아 대개 수천 행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를 통해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관해 비판했다. 문병란은 1860년대부터의 한미관계를 서술하면서 미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동소산의 머슴새>를 1983년 발표했다.

이산하는 장편 서사시 <한라산> (1986)에서 1948년 제주 4.3항쟁을 다루며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첫 부분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1945년 불볕 여름 / 한 손엔 '빵'과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 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그들은 / 마침내 / 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 ..... / '창살 없는 감옥'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 ... /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 / ..."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1948년 4월 3일 / 미군정 압제에 반대하여 /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외치며 / 제주도 인민은 일제히 봉기했다 / ... / 비전투원의 무차별 공격과 대량학살이 / ... / 아니 오히려 UN의 탈을 쓴 / 그 중심국에 의해 / 저질러졌다"

이 시 때문에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혔는데, 검찰은 공소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 사회로 파악하고, 무장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항쟁으로 미화하며, 인공기를 찬양하는 등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했다" 여기에 검찰의 무지와 억지가 드러난다.

이 시의 첫 부분에 1948년 4월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이 죽어가면서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의 깃발을"이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공의 깃발'을 북한의 국기인 '인공기'로 착각했던 것이다. 북한은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948년 9월 수립되었는데 말이다. 이산하가 시에서 얘기한 '인공'은 서울의 여운형과 평양의 조만식 등이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바탕으로 수립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을 가리켰다. 당시 검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여운형이 주도했던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을 제주항쟁 이후인 1948년 9월 김일성에 의해 주도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으로 착각하고 공소장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김형수 역시 <지리산> (1988)을 통해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빨치산 투쟁을 '양키들이 점령한 식민지'에서 전개한 민족해방 투쟁으로 묘사했다. 오봉옥은 "항일무장투쟁에서 반미항전으로 이어지는 혁명전통의 주류를 복원한 서사시집" <붉은 산 검은 피> (1989)에서 1946년 8월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봉기를 묘사하면서 미 군정을 비난했다. 그는 이 장편의 시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노동자 시인 정해동은 어머니의 비참한 삶을 묘사하면서 한국의 '굴욕적인 식민지 역사'를 끝내겠다고 결의하는 <어머니> (1989)를 발표했다.

다섯째, 시인들은 미국이 한반도 통일을 막고 있다고 비난하며 제3세계에서의 제국주의 활동을 비판했다. 널리 알려진 목사 시인 문익환은 1982년 <땅의 평화>에서 1958년부터 한국에 배치되었던 미국 핵무기를 거부했다.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해방 40년 기념 민족시 선집" <민중과 하나 되는 그 날까지> (1985)의 출판을 축하하면서, 시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시를 썼다. "다국적 이빨에서 / 이 겨레를 건져주는 / 용사가 되어주렴 / 남북으로 두 동강난 내 조국을 / 하나로 뭉쳐놓는 / 평화의 역군이 되어주렴"

문병란은 <그 날이 올 때까지>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나라들이 / 저만치 물러나 / 우리 일에 간섭하지 않고 / 자기들의 깃발을 강요하지 않고" 통일이 되기를 기원하며, "핵지뢰 핵미사일 온갖 무기"가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통일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김선웅은 장편 연작시 <물결 저 너머 내 조국> (1988)을 통해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해놓고 대규모 군사훈련 '팀 스피릿'을 실시하며 한국 내정에 간섭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생목숨 꺾어 난자질하는 아메리카의 살육"이 무섭고, "목덜미 찍어 누르는 한반도의 핵무기"가 무서우며, "붉게 물들여 토막 내는 양키의 휴전선"이 무섭다고 했다. 그리고 "성조기 깃발 아래서 / 무슨 무슨 통일회담 부질없습니다 / 성조기 깃발 아래서 / 무슨 무슨 통일행사 거짓입니다"고 단언했다.

유채림은 <핵보라> (1989)에서 '해방염원 42년' (1986년) 4월 반미 시위에서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며 온몸을 불살라 죽어간 당시 서울대학생 김세진과 이재호를 기리며, 미국의 핵무기 아래 놓여있는 '식민지 조국'에 대해 몹시 괴로워했다. 이 장편의 시 첫 부분에 1945년 8월 '미제'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과 관련해 "살육의 제국주의 일제는 / 그렇게 끝이 났고 / 학살의 제국주의 미제는 / 그렇게 시작했다"는 표현이 재미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듯 그 '왜놈의 땅'엔 '조선의 민중들'이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람직하다.

참고로, 우리는 1945년 8월 역사상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인식 때문인지 당시 핵무기의 피해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심지어 핵무기 사용에 관해 고맙게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했고, 이 때문에 조선의 해방이 앞당겨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핵무기에 따른 우리 선조들의 피해 역시 매우 크고 끔찍했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제4권에 따르면, 1945년 8월 핵폭탄의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은 히로시마에서 42만 명, 나가사키에서 27만 명으로 총 69만여 명인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히로시마에서 5만 명, 나가사키에서 2만 명으로 총 7만여 명이라고 한다. 방사능 노출로 죽은 사람 23만여 명 가운데 조선인은 약 4만 명으로 추정된단다. 조선인이 전체 피폭자 가운데서는 약 10%이며 폭사자 중에서는 약 17%를 차지한 것이다.

김남주는 <조국은 하나다> (1988)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신의 슬로건으로 "조국은 하나다"를 외쳤다. 백기완은 시집 <백두산 천지> (1989) 머리말을 통해 "분단을 틀어쥐고 있는 제국주의와 그 세력의 앞잡이"에 맞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해방통일의 어기찬 물결에 끝까지 따라 붙어 이 민중에 의한 해방통일 민족통일이 완결되는 것을 내 생애의 과업으로 다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맹세"했다. 실로 김남주와 백기완은 미국을 한국의 자주와 한반도 통일에 가장 큰 장애물로 간주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미국이 제3세계에서 전개하는 제국주의 활동 역시 반미 시의 주제가 되었다. 김정환은 <해방 서시> (1985)에서 제3세계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 투쟁으로 피로 물들고 있다고 썼다. 문병란은 <커피를 들며> (1986)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면 아르헨티나와 니카라과 등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을 동정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한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과 경제 침투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1986)를 통해서는 미국의 아르헨티나에 대한 군사 개입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조와 연계시켰다.

김남주는 <아메리카여 아메리카여 아메리카여> (1992)에서 미국의 노예무역,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리비아와 파나마 그리고 그레나다와 이라크 등에서의 살상 등을 떠올리며 미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성전'에 야유를 보냈다.

이렇듯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의 시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와 종속, 억압과 착취, 신식민주의와 민족해방 등과 연계되어 흔히 '미제'나 '외부의 적' 또는 '경제 침략자'나 '착취자' 등으로 묘사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시인들은 작품에 "양키 고 홈"이란 구호를 직접 삽입했다. 예를 들어, 문병란은 <우리들의 8월> (1986)에서 미국인들은 즉시 자기들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리고 1988년 6월 전북 군산에서 술에 취한 미군 4명이 운전기사를 집단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린 사건이 터지자 이를 규탄하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때 윤용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양키는 가라> (1988)라는 제목의 시를 <한겨레> 신문에 보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양키는 가라 / 가서 돌아오지 마라 / 절대 돌아오지 마라 / ... / 악마 같은 살인자 양키는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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