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대선' 뒤에 '불만의 겨울' 온다

[프레시안 뷰] 우리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습니까?

인터레그눔, 그라운드 제로, 그리고 2016 총선

작년 첫 글에서 저는 '총선 이후, 그라운드 제로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관련 기사 : "내년 총선, '그라운드 제로'를 준비하자")

지금은 하나의 시대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 사이의 인터레그눔(interregnum), 곧 최고 권력의 공백 상태 또는 헌정의 중단 상태로서, 통치하던 왕이 죽었으나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전의 상황이며, 우리는 대재앙의 현장이면서 급격한 변화의 출발점, 새로운 변화의 중심으로서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라운드 제로의 핵심에는 4.13 총선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총선을 앞 둔 2월, 저는 총선이 박근혜와 유승민의 전쟁이 될 것이고, 유승민과의 전쟁에서는 박근혜가 승리하겠지만, 결국 국민에게 질 것이라고 썼습니다. (☞관련 기사 : 4월 총선, 박근혜와 유승민의 전쟁)

그리고 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저는, '4월 13일, 박근혜 정부의 실질적 임기가 종료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총선 자체가 아니라, 그 다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당의 지도자들에게 '박근혜 이후, 절대 절명의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정치에 임하기를 바랍니다'라고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관련 기사 : "4월 13일, 박근혜는 끝! 문제는 그 다음")

총선 이후, 야당들은 어땠습니까? '창피한 줄'을 몰랐습니다. 총선에서 야당이 선전한 이유는 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과 친박계가 무리한 공천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총선 이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더민주는 원내 1당이 되었지만, 정당 투표에서는 3위로 밀려났습니다. 국민의당에게도 졌습니다. 정당 투표만 보자면 3당입니다. 국민의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 투표에서 더민주를 제쳤다면서, 자신들이 실질적인 제1야당이라고 합니다. 한심합니다. 호남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안철수를 제외하고 단 한 석만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경쟁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관련 기사 : "문재인은 아직도 호남을 모른다")

총선 이후 야당의 모습들

총선 이후 최순실 보도가 나오기 이전인 10월 3째주까지, 민주당의 지지율은 여전히 새누리당에 뒤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민주당의 지지울이 40%에 육박하지만, 이런 지지율은 거품에 불과합니다. 총선에서의 공천 파동과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결과일 뿐입니다.

상대의 잘못과 실수 때문에 반사 이익을 얻어서 지지율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것이지, 스스로 무언가를 잘 해서 얻은 결과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운과 호의에 의해 얻은 권력은 가장 위험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 지지율이 유지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어차피 정권만 잡으면 그만이지 그 다음 5년이 굳은 짝 아니냐고 한다면, 저도 드릴 말씀이 더는 없습니다.

국민의당에게 진정한 기회는 총선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있었습니다.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 국민의당 공천을 받은 사람들이 경쟁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것이 지역구 선거 패배의 원인이었습니다.

반면, 총선 이후에는 당세를 확장하고 본격적으로 '탈호남 전국정당화'를 추진할 호기를 맞았습니다. 인재를 영입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원외 정당을 강화해서 작지만 단단한 대안 정당, 정책 정당으로 커나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고, 당은 호남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공천 헌금 수사가 발목을 잡았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김성식 대신 주승용을 선택해놓고 전국정당화나 제3지대 같은 허황된 말을 늘어놓은 것이 바로 엊그제 아닙니까? 제3지대가 아니라 제4지대를 해도, 국민의당 지지율은 스스로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촛불을 다시 생각합니다

촛불 정국에서 야권의 대선 주자들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은 박근혜 4년, 아니 이명박 정권까지 합쳐 9년 간 억눌린 자유와 민주주의의 울분이 드러난 것이며 그 대안은 정권 교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촛불의 원인이라는 말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합니다. 촛불은 지난 4년이나 9년의 문제가 아니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년 간 악화된 양극화와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문제의 사건사적 분출입니다. 작금의 심각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면죄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 그리고 촛불을 들고 나올 여유조차 없는 시민들이 분노한 이유는, 자신들은 물론 자식들의 삶, 곧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가 모두 더 없이 절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헬조선'의 절벽에 서 있는 국민들이 특권과 반칙으로 부와 권력을 누려온 자들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으로 보아야 촛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야당이 여전히 '정권 교체'가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촛불이 지난 20년 간 쌓인 한국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적폐'의 결과라면, 절반의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으며, 새로운 시작은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제발 직시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정권교체는 무의미합니다.

'불평등'이라는 한국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대안도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정권 교체가 답'이라고 말하는 것, 저에게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제가 대통령이 되면 한다잖아요!'라고 말했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선 이후가 더 걱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탄핵 인용과 벚꽃 대선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 합니다.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누가 집권해도 국회에서 1/3 이상의 지지를 얻는 대통령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은 포용과 타협을 통해서 국회를 존중하고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능력, 국회가 국정에 협조하지 않을 수밖에 없을 정도에 뛰어난 정책적 능력, 그리고 대선 이후에 오히려 늘어나는 국민의 지지로 굳건해 지는 통치 기반 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을 갖춘 대통령 후보, 지금 있습니까?

그래서 대선 이후가 더 걱정입니다. 누가 당선되든, 대선 직후부터 대통령은 고립무원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당의 반대는 물론이거니와 자당 내의 기반도 확고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 여건과 대외 환경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지난 1년은 물론이고, 박근혜 정부 내내 손을 놓다시피 한 경제정책을 수습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트럼프의 취임으로 미국은 보호무역주의를 노골화할 것이고, 미국 수출기업과 하청업체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사드 문제로 꼬인 한중관계를 다시 풀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드를 철회하기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개성공단까지 폐쇄한 마당에 김정은의 북한은 더 이상 한국에 아쉬울 것이 없고,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는 북한에 대해 무작정 화해의 손짓을 내밀기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축제가 끝난 뒤 국민들은 냉정하게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바뀐 것은 없고, 삶은 더욱 팍팍해질 것이며, 절망감은 깊어질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대는 높은데, 현실은 만만치 않고, 이를 타개할만한 능력은 부족한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 청와대가 당황해서 허둥지둥 대다가 정치적 스텝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새 정부는 여름이 되기도 전에 지지율 하락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올 해말 우리는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Discontent)'을 맞게 될 것입니다.

'불만의 겨울'은 1978~79년 겨울, 영국에서 노동당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민과 중산층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공공 부문 노조가 광범위한 파업을 벌인 사건을 말합니다. 그 귀결은 대처의 집권이었습니다.

만약 정말로 '불만의 겨울'이 온다면, 정권은 터무니없이 이른 시기에 레임덕을 맞게 될 것입니다. 국민들은, '내가 이러려고 지난 겨울 그 추운데 촛불을 들고 나갔나.'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1년 전 찬란하게 빛났던 촛불을 뒤로 하고 '혐오의 민주주의'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출현하게 될 새로운 정치인은, 백마 탄 초인을 자처하고 저질스런 언변으로 상대를 공격하며, 소수자를 멸시함으로써 다수의 지지를 동원하는 선동가입니다. 히틀러와 트럼프의 후예가 2020년 대한민국의 정치를 지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박근혜를 탄핵시킨 국민의 열정이 아직 채 식지도 않았는데, 연초부터 너무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 것은 저에게도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딱히 다른 미래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에서부터 변화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요? 정권 교체가 답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정치 교체, 세대 교체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혹자들은 종종 역사적 흐름을 읽고 조응한다는 의미에서 '시대정신'을 읽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이것도 낡았습니다. 서유럽으로는 19세기, 우리로 따지면 1980년대식 역사관에 불과합니다.

시대의 교체는 어떨까요? 우리가 알고 있던 시대, 우리가 살아야 한다고 믿어왔던 시대, 우리의 삶의 토대가 되는 운명으로서의 시대, 그것 자체를 바꾸는 것 말입니다.

자본주의적 신분제인 정규직-비정규직, 붕괴한 공교육과 자살하는 학생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검찰과 국정원, 비리를 먹고 사는 국방부, 세계 유일의 족벌 경영 체제, 세계 1위의 자살율과 최하위의 출산율.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아닌가요?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 시대 교체. 그것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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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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