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것'은 미원이나 먹어라? 구로의 이유 있는 폭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0> 6월항쟁,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노동자 두 번 죽인 블랙리스트를 대규모로 활용한 전두환·신군부 정권

프레시안 : 1987년 6월항쟁에 이어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노동자 대투쟁이 6월항쟁과 짝을 이뤄 일어난 데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독재 타도 문제와 더불어 노동 문제는 1980년대 민주주의를 향한 고투의 양대 축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노동자 대투쟁 이전 노동 운동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노동 운동이 1980년대 중반에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자.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노동 전문가 이원보가 쓴 글을 많이 참조했다.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1980년 12월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을 신설하는 등 노동 관계법을 개악했다. 또한 소위 노조 정화 작업 등을 통해 민주 노조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일부 민주 노조 활동가들을 삼청교육대로 끌고 가서 이른바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게 하기도 했다. 1982년 11월에는 원풍모방 노조의 핵심 간부 11명을 전원 체포하면서, 1980년부터 계속된 원풍모방 노조 파괴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것은 1970년대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민주 노조들을 파괴하는 작업이 일단락됐음을 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대 노동 운동이 새롭게 전개됐다. 원풍모방 노조 파괴 작업이 일단락되고 나서 1년쯤 지난 1983년 말, 1984년 초에 블랙리스트 철폐 투쟁이 전개됐다.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는 1978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2월 21일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을 바르고 똥물을 뿌리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러고 나서 그해 4월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가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 전국 사업장에 배포하면서 이 문제가 시작됐다.

블랙리스트는 전두환·신군부 정권에 들어서서 더 큰 규모로 작성되고 활용됐다. 이 블랙리스트에 한 번 오르면 해당 노동자는 취업을 거부당했고, 아주 힘들게 취업되더라도 갖가지 이유로 바로 해고를 당했기 때문에 살아갈 길이 막혔다. 한마디로 해고 노동자들의 밥줄을 끊어놓는 것이었다.

1978년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노동자 등 6명이 1983년 10월 인천 지역 공장에서 해고되는 일이 일어났다. 다른 여러 곳에서도 민주 노조 활동을 했던 노동자들이 해고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블랙리스트 문제가 부각되고 철폐 투쟁이 전개됐다.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전국 평의회는 1983년 12월 부당 해고자 복직, 블랙리스트 철폐 등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종교 단체와 민권 운동 단체들은 1984년 1월 민주 노동자 블랙리스트 문제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활동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블랙리스트 철폐 운동이 일반 노동자들 속으로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노동자들이 민주 노조 활동을 한 것을 문제 삼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생긴 중요한 문제였지만, 해고 노동자들의 문제로만 인식되면서 그렇게 됐다.

1984년 대구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들고일어난 택시 노동자들

ⓒ오월의봄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는 1970년대 민주 노조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려잡았다. 그렇지만 민주적인 노동 운동 조직을 만들려는 노력은 계속되지 않았나.

서중석 : 전에 학림 사건을 다룰 때 1980년 5월 초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 결성됐다고 얘기하지 않았나. 1981년 2월에 결성된 전민학련(전국민주학생연맹)과 연결된 노동 쪽 조직이었는데,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전민노련 사건을 일으켜 관계자들을 혹독히 고문하고 전민노련을 탄압했다.

그 후에도 노동 운동 단체를 만들려는 활동은 계속됐다. 1983년 말 유화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노동 운동을 지원할 조직체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면서 1984년 3월 2000여 명의 노동자, 학생, 시민들이 모여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약칭 노협을 결성했다.

노협에는 원풍모방, 동일방직, 청계피복, 반도상사, YH무역, 콘트롤데이타, 한일공업, 고려피혁, 서통, 동남전기 등 1970년대에 가혹한 탄압 속에서 활동했던 민주 노조 간부들이 다수 참여했고 대학생 출신 활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1970년대 민주 노조 간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과거에 볼 수 없는 새로운 노동 운동 조직이었다.

노협은 <민주 노동>을 기관지로 발간하면서 교육, 선전, 상담, 법정 투쟁 지원 등의 활동을 했다. 그와 함께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 노동법 개정 운동을 했다. 그렇지만 노협은 현장 대중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해고된 민주 노조 간부와 활동가들로 조직됐기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노협의 활동 중 하나로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을 얘기했는데, 그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자.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1981년 1월 6일 청계피복노조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청계피복노조는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구속되기도 했다.

청계피복노조 활동가들은 1984년 3월 청계피복노조 복구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4월 8일에는 청계피복노조 복구 대회를 열었다. 청계피복노조는 1984년 9월과 10월, 1985년 4월과 11월, 1986년 4월에 합법성 쟁취 대회를 열고 가두 투쟁을 벌였다. 1984년 9월 19일에 열린 1차 대회 때에는 노동자, 학생, 시민 등 2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청계천 고가 도로와 동대문, 혜화동, 원남동 일대 도로를 1시간 이상 점거하면서 경찰과 싸웠다. 아주 격렬한 시위였다. 그러나 청계피복노조는 1987년까지도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전두환이 물러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1988년 5월 2일이 돼서야 합법성을 인정받게 된다. (청계피복노조사 편찬위원회에서 기획해 2007년에 펴낸 <청계, 내 청춘>은 7년여에 걸친 기나긴 투쟁 끝에 불법이라는 부당한 딱지를 떼던 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한 장의 종이로 된 신고필증이 노조에 도착했을 때 조합원들은 차라리 허탈감에 맥을 놓아버렸다. 마구 끌어안고 손뼉을 치고 기쁨으로 환성을 올려야 옳은데 대체로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겨우 이 한 장의 종이가 지난 7년 세월을 그토록 고단하게 만들었는가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였다.

여성 간부 하나가 속상하고 화가 나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자 다른 조합원들도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가진 자들이 만든 법률에 우롱당하고 구박당하고 버림받은 지난 시간들이 너무나 원통했다. 합법적 노조가 없던 그 긴 시간 동안 장시간 저임금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온 청계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먼저 쏟아져 나왔다. 신고필증이 도착한 농성장은 서러운 울음소리로 숙연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84년부터는 지역 단위에서 규모가 큰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나. 택시 기사들이 그 문을 열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서중석 : 1984년 5월 25일 새벽, 대구 택시 노동자들이 연좌 농성을 벌이며 파업에 들어가 대구 시내를 마비시켰다. 노동자들은 과중한 사납금 인하, 노조 탄압 중지 등을 요구했다. 대구 택시 투쟁은 삽시간에 부산, 경산, 구미, 대전, 포항, 서울, 광주, 영주, 강릉 등지로 확산됐다. 그러면서 각지에서 노조가 많이 결성됐고 노동 조건도 부분적으로 개선됐다. 대구의 경우 파업에 돌입한 5월 25일에는 택시 노조가 12개였는데 7월 중순에는 50여 개로 늘어났다. 전국적으로는 1984년 4월 말 330개였던 택시 노조가 6월 말에는 423개로 늘어났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불합리한 사납금 제도 등 택시 노동자들이 아주 불리한 노동 조건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비롯된 불만을 바탕으로 강력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 1984년 11월 30일에는 서울 민경교통 기사 박종만이 노동 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분신자살로 항거하는 일이 발생했다. 노조 간부 복직,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하던 중 회사 측이 동료 3명을 해고한다고 위협하자 분신자살로 맞선 것이다.

굴지의 재벌 굴복시킨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

프레시안 : 1985년에는 1980년대 노동 운동사에서 빠지지 않는 두 개의 커다란 투쟁이 일어났다.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 동맹 파업이다. 두 투쟁이 주목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 동맹 파업은 노동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투쟁이었다. 전자는 막강한 재벌 그룹을 굴복시켰다는 점에서, 후자는 기업별 노조의 벽을 넘어 여러 노조가 노조 탄압 중지라는 정치적 요구를 내세우고 동맹 파업을 벌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부터 살펴보자. 대우자동차는 1984년에 노동자가 7000명이 넘는 재벌 기업이었다. 그런데 기존 노조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충실히 대변하지 못했다. 그런 속에서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 1980년대 초반 송경평을 비롯한 대학생 출신들이 들어와서 활동했다.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은 노동자들 사이에 확산된 여러 가지 불만 사항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면서 노동 현장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학습과 교육으로 의식을 높여갔고, 회사와 노조 집행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노조 대의원 22명 중 12명을 민주파로 당선시켰다.

1985년도 임금 교섭 시기가 왔을 때 노조 집행부는 임금 인상 투쟁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대우자동차가 창업 이래 최대 순이익을 올렸는데도 노조가 그런 모습을 보이자, 노동자들은 <근로자의 함성> 등의 소식지를 돌리면서 독자적으로 모임을 열었다. 현장에서 파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현장에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자, 미온적이던 노조 위원장도 결국 4월 16일 파업 돌입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부평 공장이 파업에 돌입하자 그 분위기가 부산 공장 등 다른 곳으로 바로 확산됐다. 노동자들은 경찰의 강제 해산 움직임에 대비해 각목 등으로 무장하고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과 회사 측의 위협이 가중되는 속에서 임금 협상이 처음에는 결렬됐다. 그렇지만 대학생 출신인 홍영표 대의원과 김우중 회장이 단독 협상을 해 드디어 4월 25일 새벽에 합의를 봤다. 노동자의 승리였다.

열흘에 걸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국내 굴지의 재벌 기업과 맞서 자신들의 요구를 쟁취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현장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주동자들은 철저히 준비된 투쟁을 전개하면서, 상황에 따라 탈법적인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우자동차 임금 인상 쟁취 투쟁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특징으로 지적된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너무 경제적 요구 위주로 투쟁한 것 아니냐. 그것에 매몰된 것 아니냐'는 비판, 당시에는 이런 걸 경제주의 비판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 비판과 별개로 대우자동차 투쟁이 다른 사업장의 투쟁을 촉발하고, 정부와 자본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무력화했으며, 노동법 개정 논의도 불러일으킨 건 분명하다.

노동 현장에 스스로 들어간 대학생 출신 노동자, '학출'

프레시안 :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이 주로 경공업 부문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달리,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분수령으로 중화학 공업 부문을 다수 포함한 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이 이른바 노동 운동의 주력군으로 등장하게 된다. 노동자 대투쟁에 앞서 그러한 변화의 징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학출'로 불린 대학생 출신 노동자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은 대우자동차 투쟁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구로 동맹 파업 투쟁에서도 그러했는데, 이들은 일반 노동자들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노동 운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30년이 넘은 지금도 나는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 당시 활약한 송경평, 홍영표 같은 이름이 기억난다. 그 정도로 대학생 출신 노동 활동가들이 1980년대 중반에 많은 활동을 했다.

학생들이 노동 현장에 한꺼번에, 여럿이 들어간 건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유신 체제 시기였던 1974~1975년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주로 그때부터 대학 출신들이 노동 현장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노동 현장에 들어간 사례가 그전에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간 건 이때가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도 그때 들어갔다. 1970년대 후반에 오면 야학, 조금 있으면 노동 야학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그러한 야학에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노학 연대의 한 모습을 보여줬다.

1980년대에 들어가면서 그러한 '학출'이 크게 부각됐고, 위장 취업자라는 이름으로 전두환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된다. 그러면 몇 명이나 들어갔느냐. 그건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경인 지방에서만 1000명 내외 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들어갔다고 얘기됐다. 전국적으로는 수천 명이 노동 현장에 들어갔다. (1986년 10월 말 기준으로 위장 취업자로 적발된 사람이 전국 373개 업체, 699명에 이르렀다. 노동 현장에 들어간 실제 인원은 단속된 인원보다 훨씬 많았다. 이에 관한 기록이 여럿 있는데, 그중 구해근의 <한국 노동 계급의 형성>에 인용된 한 '학출'의 이야기는 당시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나는 위장 취업자로 인천에 있는 종업원 140명의 소규모 전자 공장에 일하러 갔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이나 하겠는가? 140명 가운데 10명의 위장 취업자가 있었다. 즉각 나는 누가 활동가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작은 공장이 활동가들로 넘쳐흘렀다." '편집자')


▲ 대우자동차 노사 협상 타결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85년 4월 25일 자 11면. 협상 후 회장 김우중과 노동자 대표였던 '학출' 홍영표가 나란히 걸어 나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동아일보

대학생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을 버리고 아주 힘든 노동 현장에 들어가서 노동 운동을 벌였다는 건, 그것도 적은 숫자가 아니라 정말 많은 인원이 들어갔다는 건 세계사상에도 드문 일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브나로드 운동('인민 속으로'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이 농촌에 들어간 운동) 같은 게 있긴 했지만, 한국에서 1980년대에 '학출'들이 노동 현장에 대거 들어가서 활동한 것은 한국 현대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탄압에 맞서 동맹 파업 택한 구로공단 노동자들

프레시안 : 구로 동맹 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적 동맹 파업으로 불린다.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대우자동차 투쟁이 있은 후 두 달이 지나서 구로 동맹 파업 투쟁이 일어났다. 대우어패럴 노조는 구로공단에 있는 민주 노조 중 하나였는데, 바로 이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이 1985년 6월 22일 구속된 것을 계기로 동맹 파업이 일어났다.

대우어패럴 노조는 1984년 6월 결성된 후 회사 측의 심한 탄압에 계속 맞서 싸웠다. 부당 노동 행위 구제 신청도 하고 고발, 진정 등도 하고 한국노총 회관 및 민한당사 점거 농성도 하고 회사 내 농성 등도 전개하면서 싸웠다. 1985년 임금 교섭에서도 강력한 투쟁을 벌였다. 임금 교섭은 40여 일 만에 마무리됐는데, 임금 투쟁이 이미 끝난 후인 6월 22일에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 등 3명을 연행, 구속한 것이다.

이틀 후인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같은 날 가리봉전자 노조, 효성물산 노조, 선일섬유 노조도 대우어패럴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에 돌입했다. 대우어패럴 및 그 주변 업체들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동맹 파업을 한 것이다.

동맹 파업을 결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우어패럴 노조에 대한 경찰의 탄압은 대우어패럴 노조만의 문제가 아니며, 구로공단의 민주 노조들을 각개 격파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본 것이다. 전두환·신군부가 1970년대에 활약한 민주 노조들을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하나하나 깨뜨린 것처럼 이번에는 구로공단의 민주 노조들을 겨냥해 그렇게 하려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당하지 말고 뭉쳐서 싸우자', 이렇게 된 것이다.

동맹 파업 돌입 후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노조 등으로 연대 투쟁이 확산됐다. 그러면서 동맹 파업, 연대 투쟁을 전개하는 노조가 10개, 노동자가 2500여 명에 달했다. 민주화 운동 단체들과 종교 단체들은 지지 투쟁을 전개했다. 6월 26일에는 학생, 청계피복노조, 민청련 등이 주축이 돼서 가리봉 5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구로 동맹 파업은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6일 동안 계속됐다. 전두환 정권은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깡패와 사원을 가장한 사복 경찰을 동원해 폭력으로 대우어패럴 노조부터 차례로 농성을 제압, 해산했다. 구로 연대 투쟁으로 43명이 구속됐는데, 이 중 9명은 지원 투쟁을 하던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38명이 불구속 입건되고 47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700여 명이 해고 또는 강제 사직을 당했다.

멸치는 비싸니 미원이나 넣어라? 노동자 분노 키운 자본의 오만

프레시안 : 구로 동맹 파업은 대우자동차 파업과 달리 경공업 부문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뤘다. 그 점에서는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물론 동맹 파업이라는 점, 그 이후 노동 운동에 끼친 영향 등은 다르다. 어쨌건 그러한 구로 동맹 파업의 밑바탕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병폐인 저임금 장시간 노동 및 차별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우어패럴의 1985년 임금 교섭 과정에서 이 점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노조는 설문 조사와 근처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최저 생계비를 산정하고, 일당 1080원을 인상해 최저 생계비의 70퍼센트 수준을 맞춰달라고 주장했다. 회사는 이를 일축했는데, 구로 동맹 파업 동지회와 구로 동맹 파업 2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2007년에 펴낸 <아름다운 연대>에 따르면 그 대응 논리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월) 4만 원이면 생활이 충분하다더라", "국 끓일 때 비싼 멸치 넣지 말고 미원 좀 넣어서 먹으면 돈이 덜 들지 (않느냐.) 왜 비싼 것만 먹느냐."

후자는 노조에서 작성한 최저 생계비 내역 중 '한 달에 돼지고기 반 근, 멸치 180그램' 부분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그리고 "(월) 4만 원이면 생활이 충분하다더라"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는 1984년 12월 19일 노동부가 발표한 '85년도 임금 조정 지도 지침'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지침에서 노동부는 월급 10만 원을 1985년도 최저 임금선으로 설정하고, 우선 10인 이상 업체에 이를 실시하도록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노동자는 뒷전이고 자본가를 편든다는 비판을 오랫동안 자초한 노동부, 그것도 전두환 정권의 노동부가 최저 임금선으로 월 10만 원을 공표하는 상황인데도 회사는 "4만 원이면 생활이 충분하다"고 강변했다.

이건 대우어패럴이라는 특정 업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로공단의 다른 업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한국의 기업들 상당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까닭 없이 욕먹고 무시당하며 아랫것 취급을 받는 것도 많은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매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구로 동맹 파업은 그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발생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업체 간 장벽을 뛰어넘어 동맹 파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동맹 파업을 가능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구로 동맹 파업은 그 이후 노동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구로 연대 투쟁은 어느 날 갑자기,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었다. 각각의 민주 노조가 자체 내에서 충실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노조 간 연대 활동을 지속적으로 한 결과물이었다. 그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어떤 영향을 줬느냐. 이것에 대해 노동 전문가 이원보는 구로 연대 투쟁을 겪으면서 노조 운동에서 한계를 느끼고 '정치 투쟁이 노동 운동의 본령'이라는 주장으로 선도적 정치 투쟁을 내세우는 경향이 나타나게 됐다고 말한다. 구로 연대 투쟁 이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 건 구로 연대 투쟁에 '학출'이 깊이 관여했다는 걸 보여준다. 이 당시 '학출' 노동자 상당수는 진보적, 급진적 서적을 읽으며 정치 투쟁 노선으로 기울었다. 그러면서 기존 노조나 노동 운동이 경제주의 투쟁을 하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런 속에서 구로 연대 투쟁 두 달 후인 1985년 8월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이 결성됐다. 서노련 결성에 참여한 단체는 청계피복노조, 노동 운동 탄압 저지 투쟁위원회, 구로 지역 노조 민주화 추진 연합, 노동자 연대 투쟁 연합 등이다. 서노련은 서노련신문을 발간했다. 서노련신문은 1986년 3월에 노동자신문으로 통합, 개편됐다.

1986년 2월에는 '인천 지역 노동자 연맹'(인노련)이 결성돼 서노련과 결합했다. 그렇게 결합한 조직은 약칭 서인노로 불렸는데, 서인노는 고도로 무장된 전위들이 정치 조직을 만들어 선도적인 정치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대중의 정치 의식을 고양하고 정치 투쟁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인노는 정치 투쟁을 강조하면서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을 건설하려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인노에 대해 남서울노동운동연합(남노련) 같은 세력들은 반발했다. 그런 가운데 1986년 인천 5·3사태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사태를 계기로 전두환 정권은 노동 운동 단체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면서 서인노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얼마 후에는 내부 논쟁이 격화되면서 소멸하기에 이르렀다.


▲ 구로 동맹 파업의 밑바탕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병폐인 저임금 장시간 노동 및 차별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은 봉제 작업을 하는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들(1986년 3월 15일). ⓒ연합뉴스

'학출', 일부 과오는 있지만 세계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일

프레시안 : '학출' 문제를 더 짚었으면 한다. '학출'이 노동 현장에 대거 들어간 것에 대해 앞에서 높이 평가했다. 존재 이전으로도 불린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의 헌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영향만 끼친 건 아니지 않나. 예컨대 이념 과잉 또는 교조적인 경향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 않았나.

서중석 : 일부 '학출'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의 반감이나 불신이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여러 군데에서 노출된 건 사실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조심스럽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대목인데, 지식인 노동자들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의 거리감도 부분적으로 작용했다. 일부 '학출'의 지나친 정치 투쟁 중심 활동도 반감을 살 수 있었다. 그러면서 19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학출'의 역할은 축소되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날 때에는 '학출'보다는 현장 노동자 출신이, 물론 여기에는 '학출'과 함께 학습한 사람도 포함돼 있긴 하지만, 주도적으로 각 현장에서 노동자 대파업을 이끌어가게 된다. 1990년대 이후에는 '학출'이 노조에서 대학생 출신이 할 만한 일을 주로 담당하는 쪽으로, 그러한 분야로 역할이 축소됐다고 대개 연구자들이 쓰고 있다.

'학출'에 대해 내가 한국 현대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라고 앞에서 얘기했는데, 역사에는 그런 것이 있다. 뭐냐 하면, 예컨대 1825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한 번 생각해보자. 한계가 분명했고, 주동자인 청년 장교들은 귀족들이었으며 낭만적인 면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실 지금 와서 따지면 문제가 많은 사람들 아니냐', 이렇게 얘기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역사에서는 큰 역할,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난 본다. (데카브리스트(12월이라는 뜻)의 반란은 1825년 12월 14일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들은 전제정과 농노제 등으로 찌든 러시아를 위로부터 개혁할 꿈을 꿨으나 새로운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진압됐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그 후 새로운 러시아를 꿈꾸는 혁명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한편 니콜라이 1세는 반란 주동자 중 일부는 처형하고 일부는 머나먼 시베리아로 유형(流刑)을 보냈다. 시베리아로 추방된 정치범들은 쇠사슬에 묶여 광산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 하는 등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추방된 정치범들 및 그들과 함께 시베리아로 온 여성들은 의학을 비롯한 학문과 문화, 새로운 농법 등을 지역 사회에 전했다. 그렇게 해서 정치범들의 유형지는 시베리아의 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편집자')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든 이들 중에도 '학출'처럼 경직적 사고, 투르게네프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 나오는 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고 풍족하게 살 수도 있던 사람들이 농촌 현장에 뛰어들었다는 건, 그리고 그것이 역사에 일정하게 기여했다는 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초중반에 '학출'이 현장에 대거 들어간 것은 도식적이고 경직적인 면을 일부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의 고통을 함께하려는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학출'의 상당수는 1980년대에 아주 헌신적으로, 희생적으로 일했다. 이런 점들은 그것대로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1970년대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노동 문제에서 어쨌든 중요한 활동을 많이 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 와서는 '학출'이라든가 새로운 노동 활동가들의 출현으로 종교 기관과 관련된 그런 방식의 활동이 큰 역할을 못하게 되는데, 그건 다 역사의 한계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학출'도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서노련처럼 극단적인 정치 투쟁 중심의 사고를 한 사람들이 노동 운동을 급진적으로 이끌면서 적잖은 문제를 노출한 건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하고 노동 현장에 그렇게 많은 대학생들이 뛰어들었다는 것은 각각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고 난 본다.

'학출' 활동가가 현장에 대거 들어간 건 그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일제 때 학생들이 독립 운동이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지하투쟁 같은 데 헌신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때도 학생 또는 지식인이 사회주의 운동을 펴는 과정에서 경직적이고 도식적인 면을 적잖게 드러낸 건 사실이다. 영웅주의적인 면도 일부 있었고 폐단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제 때든 1980년대든 그러한 폐단이 생기는 것하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노동 현장에 들어가서 싸우려고 노력한 것하고는 각각, 거기에 맞게 평가를 해줘야 한다. 그런 것들이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말이다. 구로 연대 투쟁에서도, 대우자동차 투쟁에서도 '학출'이 상당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그런 것하고 비슷한 것이다. 뭐냐 하면 NL들, 그중에서도 특히 주사파들의 극단적인 노선이 그동안 적잖은 문제점을 노출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대중적인 NL에서 볼 수 있는 민족 자주, 분단 문제, 통일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가지는 같은 데에서 움직이는 흐름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평가를 잘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와 반대로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그중 일부가 신한국당·새누리당 그쪽에까지 달라붙어 활동하는 것도 후자에 속할 텐데, 어쨌든 그러한 두 측면은 각각, 거기에 맞게 평가를 해야 한다. 난 그렇게 본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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