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식 부정 선거, 이승만 때 못지않았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6> 유신 쿠데타, 스물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1967년 6.8선거는 1960년 3.15선거와 더불어 아주 잘못된 선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3.15선거 때는 투표 당일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6.8선거 투표일에는 어땠나.

서중석 : 6월 8일 투표에서도 갖가지 사태가 일어났다. 여수, 벌교에서는 유권자들이 단체로 공화당 운동원이나 공무원들에게 여당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를 보여준 다음 투표함에 넣다가 발각됐다. 공개 투표를 하다가 걸린 것이다. 괴한이 투표소에 난입해 야당 참관인을 강제로 밀어낸 다음, 미리 기표해둔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무더기로 쏟아 넣는 일도 일어났다. 야당 참관인들이 항의하다가 공화당원들한테 손찌검을 당하고 쫓겨나는 일도 벌어졌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화순·곡성, 아산, 문경, 영등포갑 등 여러 선거구에서는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야당 측에서 선거를 포기하고 참관인이 철수했다.

개표에서도 문제가 심각했다. 동대문갑 구, 그리고 장준하가 옥중 출마한 동대문을 구에서는 공화당원들이 개표소에 난입해 선관위원과 야당 참관인들이 곤욕을 치렀고, 야당 참관인이 없는 가운데 개표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인천을 구에서는 개표가 공포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다며 선관위원이 전원 사표를 내고 퇴장했다. 이와 같은 폭력과 개표 중단 사태가 곳곳에서 야기됐다.

자유당이 1958년 5.2선거에서 했던 악명 높은 개표 부정, 그게 또 나타났다. 야당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를 무효표로 만드는 피아노 표, 빈대 표가 무더기로 나왔다. (피아노 표는 이미 기표가 된 투표지에 손가락으로 주르륵 인주를 묻혀 손도장을 1개 추가하는 것을 말한다. 빈대 표는 개표 종사자가 야당 표에 인주를 묻혀 무효표로 만든 것으로, 빈대 잡기 표로도 불렸다. <편집자>) 전북 무주·진안·장수 지구에서는 개표 결과 투표자가 유권자보다 674명이나 많아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투표 다음 날인 9일 아침 김수한 신민당 부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정부·여당의 투·개표 부정을 견디다 못해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 후보들이 선거를 사실상 포기하고 개표 참관인을 철수시켰으며 6개 지역에선 부정 선거 규탄 데모가 벌어졌다고 밝혔다.

프레시안 : 여러모로 이승만 집권기가 떠오르게 하는 풍경이다. 6.8선거를 다룬 당시 신문 기사들이나 신민당에서 조사해 발표한 <6.8 부정 선거 백서>를 정리한 자료 등을 보면 3.15 부정 선거 때 양상과 겹치는 게 많다. 그만큼 문제투성이였던 6.8선거, 개표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개표를 해보니까 전체 의석에서 여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유사 이래 가장 높았다. 지역구에서 공화당은 무려 103석, 신민당은 겨우 27석, 대중당은 1석을 확보했다. 전국구에서는 공화당이 27석, 신민당이 17석을 차지했다. 이를 합하면 공화당 130석, 신민당 44석으로 개헌선인 117석보다 무려 13석이나 더 공화당이 얻었다. 그야말로 압승을 거둔 건데, 이건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3선 개헌을 위해 온갖 무리수를 강행한 결과 공화당은 이 선거에서 전체 의석의 약 4분의 3을 차지했다. 선거 다음 날인 9일,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이렇게 많은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사실상 원내에서 여야 세력 균형이 깨진 건 사실"이라며 적정선을 넘은 과다 의석 확보를 우려하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편집자>)

옥중 출마한 신민당 장준하도 당선됐다. 장준하와 마찬가지로 옥중에서 출마한 대중당 서민호는 선거 운동 기간에 보석으로 풀려났는데, 이 사람도 당선됐다. 14명을 뽑은 서울에서는 야당에서 13명이 당선되고 여당에서는 1명만 당선됐다. 부산에서는 야당이 5명, 여당이 2명 당선됐다. 이렇게 대도시에서는 야당이 압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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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선거 투·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태를 보도한 <동아일보> 1967년 6월 9일 자 3면. 이날 <동아일보>는 "난장판", "사상 최악의 부정 선거"라는 제목으로 6.8 부정 선거 상황을 전했다. ⓒ<동아일보>


6.8 부정 선거에 분노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학생들

프레시안 : 선거 운동 기간에 관권과 금권 등이 난무했고 투·개표 과정에서도 여러 사태가 벌어진 만큼 후폭풍이 만만찮았을 것 같다. 어떠했나.

서중석 : 3.15 부정 선거에 버금가는 혼탁한 선거였기 때문에 후유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 다음 날인 6월 9일 신민당은 6.8선거를 3.15 정부통령 선거보다 더한 사상 최악의 부정 선거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장송(葬送)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규탄했다. 이날 자연 발생적인 항의 시위가 여러 군데에서 일어났다. 청주, 순천, 곡성, 남원, 안동, 상주, 무안 등 여러 지역에서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신민당원과 유권자들이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와 행진을 했다. 보성에서는 신민당원들이 시작한 시위에 보성중·고등학생 1000여 명이 가담하면서 시위 규모가 커졌다.

11일 밤에는 군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신민당원 20여 명이 시위를 벌이자 3000명이 넘는 시민이 여기에 합세했다. 시위대는 경찰과도 충돌했다. 이날 춘천에서는 개신교인들이 부정 선거 규탄 종교인 궐기 대회를 열었다. 12일에는 광주, 대구, 울산, 충무, 보성, 영천, 장흥, 양평 등 여러 지역에서 신민당원들이 민주주의의 상여를 메고 시위를 했다. 중앙당 차원에서도 유진오 당수와 당선자 44명, 그리고 당원들이 신민당사에서 광화문 중앙청까지 시위를 했다.

규모가 큰 시위는 학생들이 벌였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데모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12일 서울대 법대생 500여 명이 이 선거를 우발적·국부적이 아닌 전반적·조직적·계획적·지능적 부정 선거로 규정했다. 그러고는 시위에 나섰는데, 경찰과 충돌해 165명이 연행됐다. 그러자 법대에서는 바로 13일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시위는 13일부터 대학가에서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이날 서울대 문리대 정문 앞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내가 최초로 참여한 시위이기도 한데, 이현배라는 사학과 선배가 정문 앞에서 시작했고 나중에 규모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서울대 상대와 사범대, 농대, 공대, 미대에서도 이날 규모가 큰 시위가 벌어졌다. 고려대에서는 무려 3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부정 선거 규탄 대회가 열렸다. 그러고는 교문으로 진출했다. 연세대에서도 이날 2000여 명이 규탄 대회를 열었고, 그 후 500여 명이 신촌으로 진출해 시위를 했다.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학생들도 성토대회를 열거나 시위를 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는 문리대, 법대, 상대 학생들이 이날 밤 '망국 투표함 소각식'을 열고 선거의 공명성을 사수하자고 호소했다.

14일 시위는 더 널리 확산된다. 동국대생 1500여 명이 성토대회와 시위를 하면서 경찰과 충돌했고, 경희대생 1000여 명도 고려대생 600여 명과 합류해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연세대생 2000여 명은 이화여대 입구까지 진출하면서 경찰과 싸웠다. 연세대생 시위에서는 학생 5명이 다치고 220명이 연행됐다. 이날 한양대(1700여 명), 중앙대(1500여 명), 부산대(1000여 명) 학생들도 시위를 했다.

이미 많은 학교에 휴교령을 내린 상태였지만 6월 15일에도 학생들은 거리로 나왔다. 연세대, 광운공대, 외국어대, 가톨릭의대, 홍익대, 숙명여대 학생들이 가두시위나 성토대회를 했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에서도 많이 나왔다. 동성고, 배재고, 양정고, 용산고 등 20여 개 고교에서 학생들이 집회를 열고 시내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했다. 일부 고등학생들은 공화당사, 국회 의사당, 중앙청 부근까지 진출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날 전국에서 28개 대학, 129개 고교가 휴업에 들어갔다. 엄청나게 많은 고교까지 휴업에 돌입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이 농성을 계속했다. 17일에는 연세대 의대생들이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6.8 악성 종양 절제 화형식'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의 경우 6월 17일까지 휴교했는데, 시위가 끊이지 않자 19일 또다시 휴교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7월에 가서는 아예 조기 방학에 들어가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휴교, 조기 방학 이어 동백림 사건 터트린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1960년 4월혁명 당시 용감하게 교문 밖으로 나섰던 고등학생들이 1967년에도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1967년 이때 고교생 시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 시기에 고등학생들은 6.8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6월 13일 대광고 학생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보성중·고등학생들도 거리에 나섰다. 그 시절, 대광고는 데모를 무척 잘하는 곳이었다.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한 4월혁명 때에도 대광고와 동성고가 제일 유명했다.

고등학생 시위는 계속 번졌다. 성남고, 중앙고, 보성고, 중동고, 서울공고 학생들이 14일에 시위를 했는데, 학교별로 수백 명씩 거리에 나왔다. 16일에는 경기고, 휘문고, 중앙고 학생들이 연합 시위를 벌였다. 청량리종합고등학교, 서울북공고, 인창고 등 여러 고등학교의 학생 6000여 명도 가두시위를 했다. 이날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에서도 고등학생들이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했다. 동래고, 원예고, 브니엘고 학생 등이 시위를 했는데 특히 동래고 학생 1500여 명은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고 가두시위를 맹렬하게 벌였다. 대광고, 동성고와 마찬가지로 동래고도 4월혁명 때 규모가 큰 시위를 한 학교다. 17일에도 경남고, 부산상고, 부산고, 경남공고, 배정고 학생들이 시위를 했다. 4월혁명 때 부산에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참 많이 했는데, 1967년 이때도 거리에서 시위를 적극적으로 벌였다.

이렇게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하자, 고등학교에도 휴업령이 떨어졌다. 6월 17일까지 휴교에 들어간 전국의 고등학교가 150개에 이르렀다. 경북과 전남에서는 농번기에 일손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휴업을 하기도 했다.

프레시안 : 6월 20일 이후 시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6월 21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건국대 등 5개 대학 학생 대표들이 '부정부패 일소 전국 학생 투쟁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때까지 산발적으로 벌여온 6.8 부정 선거 무효화 투쟁을 범대학, 범국민 운동으로 펼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휴교령이 내렸지만 27일에는 경희대 학생들이, 29일에는 연세대와 중앙대 학생들이 성토대회와 시위를 했다. 30일에는 성균관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궐기 대회라든가 시위를 했다. 7월 3일에는 서울대를 비롯한 일부 학교를 빼놓고 대부분 휴업이 해제되긴 했지만, 학생들은 기말 시험 일정을 거부했다. 그러고는 성토대회와 시위에 나섰다. 이날 중앙대생 4000여 명, 연세대생 3000여 명, 경희대생 2500여 명, 고려대생 2000여 명, 동국대생 1000여 명, 숭실대생 600여 명이 성토대회와 시위를 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서울 지역의 다른 여러 대학 학생들과 충북대 학생들도 성토대회를 하거나 시위를 벌였다.

휴업을 풀자 이렇게 극심한 시위가 일어나니까, 20개 대학이 서울대처럼 조기 방학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계속 거리로 나왔다. 7월 4일에도 고려대생 3000여 명이 시위를 했고, 연세대생 1500여 명은 아현동 로터리까지 진출해 경찰과 충돌했다. 경희대, 충북대, 충남대, 제주대 학생들도 데모를 계속 벌였다. 7월 5일에는 부산대생과 원광대생, 6일에는 경북대생, 7일에는 공주사대생들이 시위나 규탄 대회, 농성을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인 7월 8일, 동백림 사건이 발표됐다. 동백림 사건은 이때부터 며칠씩 간격을 두고 7차례나 발표됐다. 당국은 7월 8일에 1차, 11일에 2차, 12일에 3차 발표를 하는 식으로 여러 차례로 나눠서 발표했다.

프레시안 : 왜 그런 식으로 발표한 것인가.

서중석 : 그런 식으로 나눠서, 띄엄띄엄, 여러 차례 발표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고 여러 차례 발표함으로써 시위대에 압력을 넣고, 국민들의 관심을 6.8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서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여튼 1965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이렇게 각처에서 벌어지고 부정 선거 파문이 굉장히 커지자, 박정희 정권은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당은 화성 지역 당선자인 권오석을 제명한 데 이어 6월 14일에는 청와대 비서관 출신으로 보성에서 당선된 양달승도 제명했다. 선거 부정을 너무나 눈에 띄게 했다가 그렇게 된 것인데, 이 두 사람은 제명 직후 구속됐다. 6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은 화성, 보성 지역 외에도 평택, 군산·옥구, 영천, 고창, 서천·보령, 화순·곡성의 지역구 당선자를 공화당에서 제명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 정도 조치로는 분노한 민심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6.8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는 6월 16일 이후에도 계속됐다. 7월 1일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지만 국회는 계속 공전했고 시위는 시위대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런 상태에서 공화당은 공화당에서 제명된 무소속 의원까지 참석하도록 해서 국회 개원식을 했다. 그러나 신민당에서는 전면 재선거 실시를 거듭 주장하고, 의원 등록을 계속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대학가에서는 8월 21일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에서, 다음 날에는 상대에서 학생들이 모여 부정 선거를 규탄했다. 9월 11일에는 서울대 상대에서 다시 시위가 벌어졌는데, 6.8선거 규탄 데모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이 시위로 인해 서울대 상대에서 제적생이 나왔다. 김근태가 이 상대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근태는 6.8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앞장서다가 제적된 후 군대에 강제로 끌려간다. <편집자>) 이처럼 9월 11일에 시위가 일어나긴 했지만, 2학기에 시위가 더 이상 커지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기 국회가 9월에 열렸는데 계속 공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9월 하순에 공화당은 4명의 의원을 다시 제명했다. 그런데 10월 3일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이동원 등 4명이 제명을 자청하는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다.

6.8선거 후유증으로 국회는 반년 넘게 공전

ⓒ오월의봄
프레시안 : 왜 그런 일이 생긴 것인가.

서중석 : 왜 이렇게 됐느냐 하면, 이미 제명된 9명이 있는데 거기에다 4명을 더해 13명으로 무소속 원내 교섭 단체를 만들려 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공화당 단독 국회가 아닌 것처럼 해서 국회를 열려는 꼼수를 쓴 것이다. 인원은 나중에 12명으로 조정됐는데, 이 사람들은 10·5구락부라는 교섭 단체를 구성해서 공화당의 우군이 됐고 3선 개헌에도 적극 참여한다. (공화당 단독 국회를 위한 들러리 아니냐는 비판을 받으며 탄생한 10·5구락부는 출범 직후부터 대표 선출, 상임위 배정을 놓고 불협화음을 빚어 관심을 모았다. 자청 제명파와 징계파로 갈려 대표 선출을 놓고 이전투구를 하는 웃지 못할 장면도 나타났다. <편집자>)

공화당은 10월에 10·5구락부를 끼고서 국회 운영이라는 걸 하기는 했지만, 이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러면서 공화당과 야당의 고위 간부들끼리 회의를 열고, 11월 6일에는 여야 전권 대표가 모여 시국 수습 여야 대표자 회의라는 걸 열었다. 그래서 결국 11월 19일과 20일, 이틀 동안 이 대표자 회의에서는 의정서라는 것을 기초했다. 합의 사항은 6.8선거를 시정하기 위해 강제 수사권을 가진 특별조사위원회를 새로운 법에 따라 구성하고, 경찰관을 비롯한 공무원의 선거 관여를 금지하며, 부정 재발을 막는 제도적 보장을 강구하기 위한 국회 특위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1월 29일 신민당 소속 의원들이 의원 선서를 했다. 이제 국회에 들어온 것이다. 12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여야 대표자 회의에서 통과시킨 합의 의정서에 관한 결의안을 이의 없이 통과됐다.

그런데 바로 공화당 내에서 '이 의정서는 위헌이다'라는 위헌론이 제기됐다. '선거 부정 조사 국회 특별조사위원회를 둔다'고 한 부분에서 강제 수사권과 의원 자격 심사 규정이 위헌이라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정구영도 이건 위헌이라고 주장했더라. 이 문제하고 예산안 심의 때문에 12월 하순에 국회 운영은 다시 마비됐다. 1967년이 끝나가던 12월 28일 오전 1시 8분, 공화당은 새해 예산안을 단 3분 만에 벼락 치듯이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이렇게 변칙 통과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공화당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과 육박전을 벌였다.

결국 6.8선거 후 1967년 연말까지 국회는 계속 공전하면서 국회의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8년에 가면, 지난번에 이야기한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이, 그 이틀 후에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베트남 구정 공세도 전개되고 하면서 국회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1968년에도 계속 여야 합의 의정서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의정서가 조인된 지 1년이 넘은 1968년 12월에 들어서서 선거법, 정당법, 정치 자금에 대한 법 개정안, 선거관리위원회법 개정안 등 법률 개정안과 16개 의원 선거구가 증설된 보장 입법에 대해 여야 대표자 회의에서 합의한다. 그런데 12월 16일 국회의원 선거법에서 특히 '지방 사업을 공약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해 여당 의원들이 또 반발한다. 제일 문제가 됐던 선심 공약 관련 부분인데, 이것을 여당 의원들이 문제 삼으면서 결국 '지방 사업은 합동 연설회, 개인 연설회 같은 걸 통해서만 할 수 있고 벽보, 방송을 통해서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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