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돈 펑펑 쓴 박정희 분노 "표차가 이것밖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2> 유신 쿠데타, 스물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1971년 대선은 박정희의 신승(辛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3선에 성공하긴 했지만 박정희로서는 여러모로 불만스러웠을 것 같다. 어떠했나.

서중석 : 뚜껑을 열어보니까 박정희 후보가 634만여 표, 김대중 후보가 539만여 표를 얻었다. 박 후보가 94만여 표를 더 얻었다. 박 후보는 개표가 끝난 직후 "하마터면 정권을 도둑맞을 뻔했다. (…) 돈을 또 얼마나 썼는데 표차가 이것밖에 안 돼. (…) 이런 식의 선거 제도라면 안 되겠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용을 분석해보면 순전히 경상도 몰표 때문에 박 후보가 이긴 것이지, 전반적으로 볼 때 박 후보가 이겼다고 할 수가 있느냐고 볼 수밖에 없는 측면이 대단히 강하다.

경상도 몰표 덕분에 가까스로 김대중 따돌린 박정희

프레시안 : 총으로 권력을 쥔 것으로도 모자라 막무가내로 3선 개헌까지 한 사람이 "정권을 도둑맞을 뻔했다"고 운운하는 것은 매우 기괴한 풍경이다. 어쨌건 지역별 득표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김 후보는 호남에서 박 후보에게 62만여 표를 앞섰는데, 경상도에서 박 후보는 158만여 표를 앞섰다. 그 차이가 96만여 표였다. 그러니까 경상도와 호남의 표 차이를 보면 박 후보가 경상도에서 앞선 표에서 김 후보가 호남에서 앞선 표를 뺀 96만여 표, 이건 박 후보가 전체적으로 앞선 94만여 표보다 2만 표나 더 많은 것이었다. 한마디로 경상도 표 때문에 박 후보는 이길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특히 전라도건 경상도건 충청도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고 문화 시설이 제일 많고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수준이 낫다는 서울을 보면 박 후보가 80만 표, 김 후보가 119만 표로 무려 39만 표나 차이가 났다. 서울에서는 박 후보 표의 거의 50퍼센트에 달하는 표를 김 후보가 더 얻었다. 기본적으로 서울에 야당 성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럴 경우 정말 박 후보가 이겼다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게 돼 있었다. 영호남을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에서 누가 더 많은 표를 얻었는가를 보면 서울, 경기에서 김 후보가 앞선 표가 강원도 등 다른 지역에서 박 후보가 이긴 걸 합친 표보다 많았다. 그러니까 특정 지역을 제외하면 김 후보 표가 더 많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각 지역의 득표를 비율로 분석해보면 경북에서는 무려 7.6 대 2.4, 경남에서 7.4 대 2.6, 부산에서 5.6 대 4.4로 박 후보가 우세했다. 김 후보는 전남북에서 6.4 대 3.6으로 우세했지만 경남북보다는 그 비율이 낮았다. 전남북의 득표 비율은 서울에서 김대중 후보가 6 대 4로 우세했던 그 비율과도 별 차이가 안 났다. 1987년 이후 대선을 보면 김대중 후보는 전남북에서 이것보다 훨씬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는데, 어째서 1971년에는 6.4 대 3.6이라는 비율이 나왔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왜 그랬던 것인가.

서중석 : 그건 아직도 관권이라는 것이 선거에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관권은 전국 어디서나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남북에서 예컨대 경남북에서 드러난 차이와 비슷한 비율이 될 수 있었는데도 이렇게 6.4 대 3.6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관권 개입을 놓고 이야기해도, 전체적으로 박 후보가 정말 이겼다고 보기는 아주 힘들게 돼 있었던 면을 보여준다. 또 어떻게 보면 호남 지역주의가 아직은 경상도 지역주의보다 덜 셌다는 것을 이 선거가 조금 보여준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망국적인 지역 이기주의라는 것이 이 선거에서 상당히 나타났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투표율을 보면 역시 경남북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경북은 85.4퍼센트, 경남은 83.2퍼센트였다. 그것에 비해 전북은 80.0퍼센트, 전남은 79.9퍼센트로 영남에 비해 4∼5퍼센트포인트 낮았고 서울은 71.2퍼센트, 부산은 75퍼센트로 역시 경남북보다 낮았다. 경남북 유권자들이 단단히 맘먹고 투표장으로 향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박정희 "돈을 또 얼마나 썼는데 표차가 이것밖에 안 돼"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특정 지역의 몰표 문제는 이효상을 비롯한 박정희 후보 쪽 인사들이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긴 것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에 더해 박정희 후보 진영과 김대중 후보 진영은 조직과 자금 측면에서 워낙 차이가 크지 않았나.

서중석 : 이 선거에서 박 후보가 개표 직후 "하마터면 정권을 도둑맞을 뻔했다. (…) 돈을 또 얼마나 썼는데 표차가 이것밖에 안 돼", 이런 얘기를 했다고 김충식 기자가 쓴 책에 나오는데 사실 돈 문제에서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났다고 볼 수 있다.

서울지하철 관계로 미쓰비시 등이 1971년 4월에 120만 달러를 미국 은행 계좌로 이전한 것을 뺀다고 하더라도,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밝힌 대로 걸프사에서 300만 달러 등 미국 기업에서 850만 달러를 받아낸 것을 비롯해 1971년 국가 예산인 5242억 원의 10퍼센트가 넘는 600억 원 내지 700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선거 자금을 썼다고 김충식 기자는 당시 여당 고위층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연탄 한 장이 20원, 80킬로그램 정부미 한 가마가 7000원이던 시절에 그렇게 큰돈을 썼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유세에서 "중앙정보부는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다 하고 있다. (…) 오늘날 독재의 총본산은 중앙정보부다. 요즘 경제인 수백 명을 불러다가 '김대중에게 돈을 주면 사업을 망쳐놓겠다'고 협박하고 절대로 돈을 안 주겠다는 각서를 받고 있다"고 폭로했다.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던 정일형도 이전 선거에서는 아는 사람 등을 통해 선거 자금이 좀 들어왔는데 이 선거 때는 돈이 정말 들어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중앙정보부가 총력전을 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 소주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진로소주하고 목포의 삼학소주였는데, 삼학소주를 만들던 회사가 이 선거 후 얼마 안 가서 망했다. 대선 후 삼학이라는 소주가 잠깐 팔리기는 했지만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이 회사가 망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충분히 짐작들을 하고 있다. 호남의 또 다른 큰 회사가 미원이었는데, 여기에 난데없이 세무 사찰이 들어오면서 김 후보의 돈줄을 얽어맸다고 한다. (삼학소주는 시장 점유율이 한때 60∼7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인기 있는 술이었다. 그에 힘입어 삼학양조는 국내 100대 기업에 들어갈 정도로 잘나갔다. 그러나 1971년 대선을 거치며 국세청의 조사를 받고 사장이 구속되면서 급속히 몰락했다. 결국 1973년 문을 닫게 되는데, 이에 대해 대선 때 김대중 후보에게 자금을 대줬다가 괘씸죄에 걸린 탓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편집자>)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빼더라도, 공화당은 압도적인 조직망 등을 이용했다. 176만 명의 기간 당원 조직으로, 이건 실수(實數)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사랑방 좌담회를 개최하고 리, 동의 말단 행정 조직 등을 활용해 두더지 작전을 폈다고 한다. 공영 방송 등 미디어의 편파 방송도 박 후보 쪽에 큰 힘이 됐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한 신문은 전반적으로 볼 때 호남과 서울에서 강력한 행정력의 작용과 조직, 자금 때문에 김대중 바람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하면서 더 나올 표가 못 나왔고 반면에 영남에서는 70퍼센트를 상회하는 몰표가 박정희 후보에게 간 것 아니냐고 분석했다. 영남의 경우 예컨대 경상북도를 놓고 볼 때 1963년 대선에서는 투표장에 간 사람의 61퍼센트가 박정희 후보를 찍었는데 1967년에는 그게 71퍼센트였다. 그런데 1971년 대선에서는 1971년 선거 때보다 5퍼센트포인트 더 높은 76퍼센트를 기록했다. 당시 상황을 볼 때 굉장히 심했다고들 이야기한다.

민심이 박정희 경제를 높이 평가했어도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프레시안 : 1971년 대선은 여러 측면에서 박정희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박정희 대통령은 이 선거 결과를 보고 착잡하다고 할까, 마음이 몹시 안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해서 관권을 동원해 총력전을 폈고, KBS 등 매스컴으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자신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게 하지 않았나. 또 선거 자금으로 무려 1년 예산의 10퍼센트를 상회하는 600억 원 내지 700억 원의 돈을 썼는데도 경상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 효과를 충분히 못 보지 않았나. 거기에다가 지방색까지 총동원했다. 그래서 흑색선전만 하더라도 "우리 경상도 사람이야 다 아는 것 아니냐. 쌀밥에 뉘가 섞이듯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경상도 사람 쳐놓고 박 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이라는 선동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호남 표가 단결해서 야당을 미는데 영남도 여당에 몰표를 줘야 한다"는 식의 흑색선전도 난무했다. 이런 것이 농촌의 경우 더 심하게 나타났다. 그런 식으로 지방색을 총동원했는데도 실질적으로는 승리라고 볼 수가 없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그리고 선거 도중에도 참 간담이 서늘한 장면을 여러 번 보지 않았느냐, 이 말이다. 그래서 결국 '이번 선거가 나한테는 마지막이다. 후계자를 육성하겠다', 이런 공약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도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나.

4.27 대통령 선거를 보면 민심이 박정희를 그렇게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박정희의 경제 정책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호남에서 김대중 후보가 앞선 건 지방색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서울, 경기 같은 지역은 그렇지 않지 않나. 서울, 경기 지역에서 '박 대통령이 경제 정책은 아주 잘 쓰고 있다. 정말 경제 대통령이다', 이런 평가가 나왔다고 한다면 박정희 후보가 그렇게까지 저조한 표를 얻었을 리가 만무하다. 박정희에 대한 강한 비판이 결국 서울에서 표가 4 대 6으로 나뉘게 한, 박 후보보다 무려 약 50퍼센트나 더 많은 표가 김 후보에게 가게 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나에게 마지막 선거다. 후계자를 육성하겠다'고 한 것은, 앞부분은 맞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뒷부분은 그야말로 국민을 기만해도 그렇게 크게 기만할 수 있느냐는 것이 불과 1년여가 지나면 10.17쿠데타에 의해 드러난다. 이건 1961년 5.16쿠데타 때 '혁명 공약' 6항에서 과업이 성취되면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고 천명해놓고 지키지 않은 것, 그리고 1963년 민정 이양 과정에서 2.27 선서를 통해 '군은 중립을 지켜야 하고 민간인이 좋은 정치를 하기 바란다'고 하면서 자신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전 국민에게 공약을, 이름 그대로 선서를 해놓고 저버린 것과 꼭 닮은꼴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1971년 대선 때 그야말로 박정희 최대 공약이라고 볼 수 있는 '후계자 양성'이라는 공약을 해놓고 불과 1년여 만에 그럴 수 있는 건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아울러 여기서 박정희의 유신 시대에 많이 나오는 이른바 생산적 정치와 결부해 생각해볼 게 있다.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경상도 몰표 때문에 간신히, 겨우 당선되긴 했지만 이 선거에서 된맛을 보고 만 박 대통령은 '그러한 선거를 다시는 치르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이 안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1971년 선거와 관련해 10.17쿠데타를 합리화하는 이유를 여러 번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게 뭐냐 하면 유신 시기에 박정희가 '선거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생산적 정치를 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1963년, 1967년, 1971년의 대선과 총선에 엄청난 돈이 들어간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여당 측에서 쓴 것이었다. 1971년 대선, 총선이건 1963년 대선, 총선이건 여당 측 또는 박 후보 측은 야당의 10배 또는 수십 배의 돈을 썼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야당이 대선, 총선에서 쓴 돈의 규모를 보면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 정도는 돈을 안 쓸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를 운영하는 데 비용이 어느 정도 들어간다고 볼 수 있지만, 여당 쪽은 분명히 문제가 있게 많이 썼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야당 후보가 돈을 제대로 못 쓴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돈을 많이 쓴 것만을 기준으로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선거는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선거 무용론을 들고나와서 유신 체제를 합리화했다.

독재자는 다 그런 것 같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참 지나친 합리화 아니냐고 볼 수 있다. 독재자들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을 개발해내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서 유신 체제 때 정치 자금이 없었느냐 또는 적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게 볼 수 없다. 국내외 기업들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선거 때, 예컨대 1978년 12.12총선 때 들어간 비용 같은 건 선거이기에 불가피하게 들어간 돈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정회라든가 공화당을 유지하는 비용 같은 건 여전히 들어갔고, 유신 권력을 유지하고 유신 체제에 절대 충성을 바치게 하기 위해 많은 촌지를 안 쓸 수가 없었다. 검은돈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육성 증언>을 보면, 전두환이 유신 체제 말기 박정희와 차지철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차지철 경호실장한테 엄청난 권력을 맡긴 박정희가 차지철의 잘잘못을 제대로 따지지 못했고 차지철에 대한 보고서 같은 게 올라오면 직접 차지철에게 주는 식으로 했는데, 정치 자금도 차지철을 통해 마련하고 신세를 너무 많이 져서 그런 것 아니었겠느냐고 전두환은 이야기한다. 유신 체제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을 차지철이 걷어서 쓰도록 한 것 때문이기도 하지 않겠느냐, 이 얘기다. 이런 걸 보더라도 유신 체제라고 해서 돈이 안 들었던 게 아니고 음성적으로, 양성적으로 큰돈이 계속 들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박정희 친위대' 위주로 공천한 공화당, 진산 파동에 휘말린 신민당

프레시안 : 1971년 대선 직후 총선도 예정돼 있었다. 이 총선은 어떻게 치러졌나.

서중석 :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좀 어수선했다. 학생들은 부정 선거 규탄 대회를 열었다. 그러면서 '선거가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며 총선 거부 운동을 재야와 학생들이 들고나오고 그랬다. 그보다 훨씬 어수선한 일은 바로 야당 내부에서 일어났다.

정부는 총선 날짜를 5월 25일로 잡았다. 여당, 야당 모두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공화당의 경우 전국구 1번을 김종필로 하고 2번을 정일권, 3번을 백두진으로 했다.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밀려난 김형욱은 5번이 됐다. 그런데 전국구 6번이 권오병 전 문교부 장관이었다. 권오병은 욕을 참 많이 얻어먹던 사람인데, 6번이라는 높은 순번을 차지하고 있었다. 권오병이 얼마나 욕먹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텐데, 그런데도 6번을 차지했다는 건 박정희가 권오병을 얼마나 총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다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좋은 순번에 배치됐다.

10.2 항명 파동으로 4인 체제가 무너지고 공화당이 박정희 대통령의 친정 체제로 들어간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여당의 5.25총선 지역구 공천 상황을 보면, 이때는 아직 10.2 항명 파동이 있기 전인데 이미 박정희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천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역구 공천자 88명 가운데 군 출신이 무려 41명이었다. 청와대 경호실 출신도 8명이나 됐고 대구사범학교 출신도 3명이나 됐다. 88명 중 절반을 훨씬 넘는 수가 박정희 직계였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이들 말고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많았다. 10.2 항명 파동 전이니 아직 4인 체제였다고는 하지만, 공천을 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공화당에 친정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의중이 이미 여기서도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이 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아주 어수선했다고 이야기했다. 야당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나.


서중석 : 문제는 야당이었다. 야당에 큰 난리가 나버렸다. 5월 6일 유진산 당수 집에 청년 당원들이 쳐들어와서 유 당수를 막 잡고 흔들고 하면서 그 집 집기를 부수고, 또 당사에 걸려 있던 유 당수 사진을 불사르는 일이 일어났다. 이게 유명한, 또 하나의 진산 파동이다. 야당에서는 유진산과 관련된 파동이 이때뿐만 아니라 여러 번 일어났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유진산은 이전에 영등포갑 구 후보로 총선에 나왔다. 그러니 영등포갑 구로 다시 나오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여기에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을 지낸 장덕진이 여당 후보로 나오자, 유진산은 스물아홉 살이던 박정훈을 자기 대신 신민당 후보로 영등포갑 구에 내세우고 자신은 전국구 1번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장덕진은 청와대와 친인척 관계(육영수 언니의 사위, 즉 박정희의 처조카 사위)였다. 하여튼 유진산의 행보는 '여기엔 틀림없이 모종의 거래 의혹이 있다. 도대체 여당 후보를 당선시켜주기 위해 당수가 그런 식으로 지역구를 넘기고 전국구 1번으로 나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이 진산 파동은 당권 싸움으로 가는 과정을 밟는다. 사실 당연히 그렇게 가게 돼 있었다. 진산 파동은 진산계와 김대중 등이 이끌던 반진산계의 싸움으로 번졌다.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야당은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김홍일 전당 대회 의장에게 당수 권한 대행을 맡김으로써 일단 수습은 됐다.

이 선거는 야당 내부 분란을 빼놓고는 국민들한테 크게 관심을 살 만한 일이 별로 없었다. 선거를 3일 앞둔 5월 22일 한 신문의 보도를 보면 "공화당은 안정세를 낙관하고 신민당은 호헌선 확보에 비관적이다", 이렇게 돼 있다. 야당의 호헌선 확보가 또 어려워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나서 3일 후 선거가 치러졌는데 그다음 날 신문은 '총선 개표 진행, 신민당 예상 외로 강세', 이렇게 보도했다. 정말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 중에서 제일 놀라운 선거, 어째서 이렇게 됐나 싶을 정도로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온 선거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도 그야말로 멋진 선거 아니었나. 정책 대결도 있고 유권자들이 지대한 관심도 표명했고 참 멋진 선거였다. 바람도 막 불지 않았나. 그런데 개표를 하고 보니까, 이 5.25총선도 아주 멋진 선거였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 김대중(왼쪽)과 유진산(1972년 8월 25일 모습). ⓒ연합뉴스

대구·부산·경남에서도 이긴 신민당, 5.25총선 실질적 승리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서울의 경우 19개 지역구 중에서 예상대로 영등포갑 구에서만 여당 후보가 당선되고, 나머지 18곳에선 다 여당 후보가 떨어지고 신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서울에서 낙선한 공화당 후보 가운데에는 여당의 중진이라고 볼 수 있던 장기영, 민관식, 박준규, 김현옥 그리고 김구의 아들인 김신, 박충훈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전부 떨어졌다. 부산에서는 8개 선거구 가운데 신민당이 6개를 쓸어버렸다. 대구의 경우 5개 선거구 가운데 4개 선거구에서 신민당 후보가 당선됐다. 대구가 대선 때 제일 박정희 후보를 많이 찍은 데였는데도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제3공화국 초기부터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이 바로 이 대구에서 낙선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신진한테 패했다. 그만큼 대구 분위기도 달랐다. 특히 경남, 부산 이 지역에선 26석 가운데 17석을 야당이 차지했다.

노무현 정권 때 부산에서 의석을 확보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잘 안됐고, 문재인이 대표를 맡은 후에도 야당은 부산, 경남에서 참 어려운 상황 아닌가. 그런데 1971년 이때는 이렇게 달랐다. 전국 32개 주요 도시에 64개 선거구가 있었는데, 공화당은 17석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신민당이 무려 47석이나 차지하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지역구에서 공화당이 86석, 신민당이 65석, 전국구에서 공화당이 27석, 신민당이 24석을 차지했다. 그렇게 해서 공화당은 113석, 신민당은 89석을 확보했다. 야당의 실질적인 승리 아니냐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떤 사람은 대승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개헌 저지선이 69석인데, 야당은 그보다 무려 20석이나 많은 89석을 확보했다. 전체 의석(204석)의 절반에서 13석 모자라는 의석을 확보한 야당은 이제 독자적으로 국회를 소집할 수 있고, 국무위원 출석 요구를 해서 국무위원한테 질의를 할 수 있게 됐다.

프레시안 : 1971년 대선에서는 지역주의가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그런데 한 달 후 치러진 5.25총선에서는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왜 그랬던 것인가.

서중석 : 대통령 선거에서 지방색이 너무 심한 것 아니었느냐고 해서 많은 사람이 크게 우려한 게 사실이다. 그 우려를 경상도 쪽에서 얼마나 멋지게 이 총선을 통해 씻어내려 했는지가, 그걸 위해 노력한 모습이 정말 눈에 보일 만큼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비록 대통령에게 몰표를 줬지만 국회에서 견제를 잘해서 균형 잡힌 정치가 이뤄지도록 해달라', 이것 아니었겠나. 다른 말로 한다면, 대선에서는 지방색이 강하게 드러났지만 총선에서는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희구, 의지 같은 것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나 경제 정책이 심판을 받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정말 경상도 쪽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틀림없는 경제 대통령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표가 나오겠느냐, 이 말이다. 이 총선에서 여당 후보들이 누구를 내세워서, 뭘 자랑하면서 선거 운동을 했겠나. 그것에 대해 심판을 내린 것이니까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볼 수 있다. 이건 1963년 선거는 물론이고 1967년 선거 때 야당 후보가 부산, 대구에서 당선됐던 것보다 훨씬 많이 1971년 선거 때 당선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대구 같은 데서 그랬는데, 이처럼 '이제 정말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가야 한다'는 것을 대구건 부산이건 경남 지역이건 어디건 1971년 총선에서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슬기로운 우리 국민들은 여당에게는 안정선을 구축해준 반면 야당에게는 호헌선이란 방파제를 쌓아주어서 견제와 균형이라는 기능을 부여해주었다는 점,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 역량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처럼 세력 균형을 이룩하게 된 일이 일찍이 없고 주권의 자각과 민도(民度)의 수준이 이제는 어떠한 관권의 위력도, 어떠한 금권의 유혹도, 어떠한 흑색선전의 교묘함도 이를 감연히 물리치고 주권다운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양심의 명령에 따랐다", 이렇게 사설에서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제 여야의 세력 분포가 이처럼 균형 상태를 이룩하게 됐다면 국정의 만기(萬機)가 오직 국회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새로운 선량들에게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박정희가 쿠데타 결심 굳히는 계기가 된 1971년 대선·총선

ⓒ오월의봄
프레시안 :
박정희 세력에게 1971년 대선 결과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5.25총선 결과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총선 결과는 박정희 쪽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해방을 모든 이가 기뻐하지 않고 친일파들은 날벼락이 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듯이 이러한 견제와 균형, 주권의 자각, 높은 민도, 국회가 이제는 정치의 중심이 된다는 것 등에 대해 '이건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다. 더더군다나 이 총선을 보면 이제는 개헌을 해가지고 박정희가 계속 대통령 후보로 나올 수 있게 하는 방식도 불가능하게 됐다.

이것은 1958년 5.2총선을 겪고 나서 자유당이 고민했던 방식을 연상하게 한다. 자유당이 내각 책임제도 생각해봤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지 않았나. 부통령 러닝메이트 제도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헌법을 고쳐야 하는데 5.2선거에서 야당에 호헌선을 내줘서 그것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던, 노하우가 잔뜩 쌓였던 부정 선거로 1960년 3.15선거에 대처하지 않았나.

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에게 남은 방법은 이제 쿠데타밖에 없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절대로 권력을 남한테 안 주려 한 사람 아닌가. 민주주의를 하라고 국민들이 대선과 총선에서 이렇게 열띤 분위기를 보여준 것인데, 그것이 박정희가 '쿠데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굳히는 방향으로 가게 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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