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백혈병', 피해자에게 입증 떠넘기나?"

시민단체 "'삼성 백혈병' 역학조사 결과 공개해야"

삼성 반도체 공장의 직업병 논란는 몇 년 전부터 국회 국정감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2007년 세워진 후 접수된 피해 제보가 100여 건에 이르고, 이 중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이나 림프종 등 혈액암에 걸린 노동자만 42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의혹이 더해지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정부는 2008년 한국산업안전공단 역학조사의 결과만을 토대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발병과 근무환경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삼성이 지난 4월 반도체 사업장에 대한 역학조사를 자체적으로 벌이겠다며 논란 자체를 인정한 것보다 더 강경한 수준이다.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도 지난 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통계적 유의성이 없다"며 피해 노동자의 산재 인정 가능성을 일축했다.

반면 피해 노동자들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정황은 조금씩 더해진다. 새롭게 나타난 피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없는 삼성 작업장에서 격무에 시달리면서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일했다고 증언했다. 지난달 28일 참여연대가 입수해 공개한 서울대의 화학물질 노출평가 자문보고서에서도 삼성이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제품의 성분 파악을 공급자가 제공하는 자료에만 의존하고, 안전수칙을 지키며 작업하는 과정에서도 가스 누출이 일어났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삼성은 실제 작업 현장과는 다른 기준에서 작성된 보고서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정부·삼성과 피해 노동자들의 주장이 맞선 가운데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과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국정감사를 진행한다. 환노위는 이번 국감에서 서울대 자문보고서를 작성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공단 관계자들도 의원실을 찾아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 불승인 사유를 설명하며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자에 전가된 산재 입증책임 완화해야"

한국여성노동자회·환경정의·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1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가 근로복지공단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대해 철저한 국정감사를 시행하라고 촉구했다.

▲ 1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시민단체들이 '삼성 백혈병' 산재 인정 촉구 기자회견을 연 자리에서 숨진 백혈병 노동자를 상징하는 방진복을 입은 반올림 회원들이 쓰러져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남윤인숙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처음 반도체 노동자의 발병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이후 여러 피해 노동자들이 나타나고 서울대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점점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며 "국감을 계기로 사업장에 대한 더 자세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판정을 내리는데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체 암 발병 건수 중 직업병에 의한 암을 2~8%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를 한국의 한 해 암 사망자에 대입하면 2007년 기준으로 약 1300~5400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이 직업성 암을 인정한 건수는 2004년 기준으로 47건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박용선 환경정의 사무처장은 "한국은 노동자들이 산재 신청을 하면 작업 현장과의 상관관계를 본인이 스스로 증명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사무처장은 "기업이 필요한 정보를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데 노동자들이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며 "노동자에게 전가된 입증책임을 사업자나 국가가 발병원인이 업무와 무관하다는 것은 증명하는 방향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피해 노동자들의 불승인 처분의 근거로 들고 있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역학조사 결과 역시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사무직과 생산직 노동자가 각각 위험물질에 노출될 수 있는 정도가 다르지만 이를 구분하지 않았고, 채용단계에서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때문에 일반 인구보다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건강한 근로자 효과'도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컨데 핵발전소에 근무하는 건강한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보다 암 발생률이 적게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역학조사는 서울대의 자문보고서에서 지적한 화학물질 노출 상태와 성분관리 현황 등의 제반 조건마저 반영하지 않았다. 시민단체들은 "2008년 역학조사 결과는 여러 가지 제한점을 고려할 때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수준"이라며 "(보고서를 근거로) 반도체 종사업무와 암 발생간의 업무관련성이 낮다고 결론을 내리는 건 과잉해석"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사람의 생명·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알 권리는 회사의 영업비밀보다 우선한다"며 역학조사 및 반도체 사업장 유해요인 자료를 모두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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