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亡者'들, 'IT 축제'에 나타나다

반올림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외면한 잔혹한 축제"

12일 정오 '2010 한국전자산업대전(KES2010)'이 열린 경기 고양 킨텍스 앞. 전시회를 보기위해 몰려든 이들이 입구 앞에서 저마다 걸음을 늦췄다. 벤치에서 점심 식사 중이던 이들의 시선도 한 곳으로 집중됐다. 12개국 900개 기업의 첨단 IT 기술이 소개되고 해외 바이어들까지 몰려든 이곳에 느닷없이 반도체 사업장에서 쓰이는 방진복을 입은 무리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김봉규)
이들의 등에는 저마다 영어로 쓰여진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Hwang Yumi(1985~2007), Operator of Samsung Semiconductor, Died from Leukemia at age 22)'.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만 22살에 백혈병으로 숨진 故 황유미 씨였다.

'Lee Sookyoung(1976~2006), Operator of Samsung Semiconductor, Died from Leukemia at age 30)'. 故 황 씨와 같이 기흥공장 3라인 디퓨전 공정에서 일하다 똑같이 백형병으로 숨진 故 이숙영 씨였다. 故 연제욱, 故 박지연 씨의 이름이 이어졌다.

전자산업대전을 찾은 해외 기업과 바이어들을 상대로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나선 이들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었다. 고인들이 숨지기 전 일하던 모습으로 퍼포먼스에 나선 이들은 13명이었지만, 이들 옆에는 아직 접혀진 채 쌓인 방진복이 수북했다. 반올림이 지금까지 파악한 피해 노동자 중 사망자가 30명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잡은 반올림의 공유정옥 산업전문의는 "이번 한국전자산업대전의 슬로건이 'IT's my life'이다"라며 "삼성 반도체에 입사한 이들은 한 때 삼성이 자신들의 '삶 자체'이었을 수도 있지만 공장은 이들의 삶 자체를 앗아가 버렸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방진복을 입은 '고인'들은 비어있는 방진복을 하나씩 들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옆에 선 동료들이 쓰러진 그들에게 장미 꽃잎을 뿌린 뒤 자신도 그 옆에 누웠다. 지켜보던 한 외국인이 카메라에 그들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공유정옥 전문의의 말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열리는 전자산업대전의 그늘에는 너무나 많은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이 서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화려한 축제는 너무나 잔혹한 축제이기도 합니다. 삼성도, 정부도 직업병 피해자들의 외침을 철저히 외면해왔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김봉규)

방진복을 입은 반올림 회원들이 천천히 쓰러져가는 동안 기자회견문이 낭독됐다. 반올림은 "미국과 영국에서 대규모 환경오염과 직업병 피해를 일으켰던 전자산업이 대만·태국·한국으로 이전하면서 직업병 피해자들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며 "인간의 건강권과 존엄을 짓밞고 생산되는 전자제품의 축제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고 말했다.

반올림은 또 "그들의 일터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직업병과 사망자들에 대해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며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숨이 서린 그 제품을 찬양하기 전에 죽은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자회견은 공유정옥 전문의가 그 동안 숨진 반도체 노동자 32명의 이름과 병명을 모두 부른 다음에야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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