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아직 심판받지 않았다

[기자의 눈] 박근혜와 황교안, 환상의 결합?

전직 대통령의 정치 참여는 왕왕 문제가 돼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8년 9월 18일 민주주의2.0이라는 토론 사이트를 직접 기획해 오픈했을 때, 한나라당은 "사실상의 사이버 정치 복귀 선언이자, 사이버 대통령으로 군림하려는 것"이라며 "후안무치한 일"이라고 비난했다. 진보 성향의 <한겨레>도 사설을 통해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면서도 "전직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세 결집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건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이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참여정부 시절 정책을 뒤집을 때 노 전 대통령은 간혹 '우공이산'이라는 필명으로 댓글을 통해 여당 인사들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한나라당은 전직 대통령의 정치 참여에 대해 "요즘 정치상황에 대한 언급은 가히 '피해망상증'"(차명진 당시 대변인)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진보 진영도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 실패로 정권을 내준 데 이어, 그해 4월 총선에서 81석을 얻는 대참패를 맛 본 통합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 개입'에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이미 대선, 총선 두 번 심판 당한 '폐족'은 그 '원죄'를 곱씹을 시간이 필요했는데, 전직 대통령의 무리한 정치 개입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탓이다.

그런 한나라당이 지금 미래통합당이 되어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간 전직 대통령의 정치 개입에 대해 "옥중에서 오랜 고초에 시달리면서도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서신"을 칭송하고 "박 전 대통령의 애국심이 우리 가슴을 깊이 울린다"(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며 신파를 자극하고 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가 4일 '옥중 편지'를 공개했다. 미래통합당이 그걸 덥석 안은 걸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이 편지는 언제 어떻게 기획되었을까. 기획 단계에서 '부작용'의 우려 같은 건 제시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이미 보수 언론은 '박근혜의 메시지'에 주목하고 있었고, 박근혜 정부 법무부장관이자 마지막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낸 황교안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를 온몸으로 받았다.

또, 지금 미래통합당 권성동 의원(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위원장)을 비롯해 박근혜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의문도 든다. 이를테면 권성동 의원은 과연 공천을 받을 수 있을까?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오는 이런 의문들을 제외하더라도, 박근혜의 옥중 편지 내용은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의 편지를 들어보이고 있는 유영하 변호사 ⓒ 연합뉴스

첫째, 국정 농단으로 나라를 망가뜨리고 보수 궤멸을 촉발한 데 대한 반성이 없다. 되레 그는 당당하다. "비록 탄핵과 구속으로 저의 정치 여정은 멈췄지만"이라고 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전두환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당한 상태에서 감정이 멈춰있는 것일까. 그에게 촛불집회와 탄핵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의 멈춤에 불과하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린다"고 선동하고 "서로 분열하지 말고 역사와 국민 앞에서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란다. 여러분의 애국심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태극기 세력과 미래통합당이 함께 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둘째, 여전히 스스로를 '선거의 여왕'으로 여긴다. 미래통합당의 탄생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심지어 꾸짖는다. "나라가 전례 없는 위기에 빠져 있고 국민들의 삶이 고통 받는 현실 앞에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는 것 같은 거대 야당의 모습에 실망도 했"다며 꾸짖은 후 "하지만 보수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였다"고 승인한다. 여전히 그는 자신을 권력자로 여기며 현실 정치를 내려다 본다. 그는 여전히 보수파의 수장이다.

박근혜의 메시지를 공개한 유영하 변호사는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자유공화당·친박신당의 '지분 요구' 등을 겨냥,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자신의 입지를 늘리기 위한 기회로 삼으면 바로 심판받을 것이라 본다"며 "(박 전) 대통령의 뜻은 그것이 아니다. 큰 뜻을 자기들의 작은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면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박근혜는 '진박 감별' 중이고, 박근혜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자는 '심판'에 처해진다는 신화다. 박근혜가 메시지를 내리면 제사장은 그것을 해석해 규율을 만든다.

셋째, 자기 희생이 없고 욕망을 당당히 드러낸다. "나를 잊어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저도 하나가 된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다"고 당당히 외친다. 편지 한장으로 총선에 '공'을 세웠다고 느낀다면, 박근혜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대신 쓰는 박근혜 옥중서신'이라는 칼럼이 있다. <중앙일보> 2월 22일자 '선데이 칼럼' 꼭지에 실린 글이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내용 전체를 필자가 상상력을 동원해 창작한 것이다. 아마 보수파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게 취지일 것으로 짐작된다. 박근혜가 이런 편지를 써 줬으면, 하는 보수파의 바람이 녹아든 것으로 충분히 읽힌다. 이 글 마지막 즈음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칼럼 바로가기)

존경하는 친박 동지 여러분.

지금은 무엇보다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통합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희생할 사람들은 우리 같은 애국자밖에 없습니다. 미워도 할 수 없습니다. 보기 싫은 얼굴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은혜로운 친박 동지 여러분.

이제 저를 잊으십시오. 저와 함께 무대에서 내려옵시다. 제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은 여러분에게도 제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용서 가능성이 점점 희미해질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훗날을 도모할 기회 또한 따라 멀어질 것입니다. 이제 저를 놓으십시오. 끝까지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참 나쁜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때, 건강 유념하십시오.

요컨대, 이 글의 목적은 첫째, 박근혜가 실정과 보수궤멸에 대해 통렬한 '자기 반성'을 하고, 둘째, '보수 통합'을 절실히 호소한 후, 셋째, '저를 잊으라'고 스스로를 희생하며 정치적 안녕을 고하길 바라는 데 있는 것 같다. 이 정도의 상식을 박근혜에게 기대해보자는 취지인 것 같은데, 틀렸다. 진짜 옥중 편지 속 박근혜의 메시지는 정권 심판과 보수 통합의 전제인 '자기 반성'도, '자기 희생'이 없다. 보수의 비극이다.

편지 내용으로 보건데, 박근혜는 아직 심판받지 않았다. 4년 전 총선은 '탄핵 당하기 전 박근혜'의 선거였다. 박근혜는 이번 총선을 '탄핵당한 후 박근혜'의 선거로 만들고 있다. 엉뚱하게도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가 뒤섞여 있는 미래통합당은 박근혜의 메시지를 환영하고 있다. 탄핵은 탄핵이고, 선거는 선거라는 것인가? 박근혜의 옥중 메시지를 끌어 안은 미래통합당의 행태는 이번 총선에(혹은 총선 이후에) 박근혜에 '지분'을 인정하고 건네는 행위와 다름 없다. 사실 미래한국당에 제대로 된 전략가가 있었다면 이런 부분을 지적했겠지만 그런 사람은 눈을 씻도 찾아도 없는 것 같다. 물론 있더라도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정치란 오묘한 세계다. 자신을 버리겠다는 사람을 살려주고, 나를 버리지 말라는 사람을 고꾸러뜨린다. 겸손과 진심을 환영하고 오만과 거짓은 가차없이 쳐낸다. 실패를 인정하는 이에겐 관대하고, 성공을 확신하는 이에겐 매섭다.

박근혜의 편지를 보니, 총선 후엔 유승민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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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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