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봉준호 감독께 사과는 하셨나요?

[기자의 눈] 봉준호에서 시작해 '기승전 문재인 비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7일 오후 2시 황교안 대표 주재의 상임위원장·간사단 연석회의에 참석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 주말에 굉장히 반가운 소식을 온 국민이 기쁘게 보았다. 한국영화 100년의 선물, 봉준호 감독이 가져다주었다. 황금종려상을 받았는데, 봉준호 감독에게 진심으로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칸 영화제 소식 중에 흥미로운 것이 또 하나 있다. 알랭들롱 배우가 일곱 번째 실패 끝에 칸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래서 알랭들롱 영화를 갑자기 생각을 해봤는데, 알랭들롱이 데뷔를 한 영화가 <태양은 가득히>다. 그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들롱이 맡은 역할이 '톰 리플리'다. '톰 리플리'의 역할이 뭐냐. '거짓말을 하면서 스스로 거짓말이 아닌 진실로 믿게 된다'는 그런 역할이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제가 그걸 딱 보면서 생각나는 게 문재인 정부였다. 문재인 정부, 바로 지금 '경제는 나아지고 있다. 좋아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는 이유, 그리고 리플리 증후군이 떠오르게 되었다.

이 현란한 연상법을 보면서 제1야당 대표의 메시지가, 혹은 메시지 라이터가 모종의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즉각적으로 떠오른 이런 노래가 있는데, 이 단순한 노래는 논리학의 오류를 설명할 때도 동원되지만, 시작에서 자유연상법의 사례로도 인용될 수 있다. 물론 나 원내대표의 발언은 이 노래가 사례로 인용되는 논리학적 오류(매개념부주연의 오류)에 해당한다기보단, 시작에서 간혹, 혹은 종종 사용되는 '자유연상법'에 가까운 모습이다.

다소 어려운 말을 쓰느라 송구한데, 쉽게 풀면 '무리수'라 보면 되겠다. 실패다.

정치인의 메시지는 유권자에게 호소력을 갖고 스며들기 위해 쓰여진다. 유권자들이 거북해 하거나, 어려워하거나, 논리적 혼란을 일으키게 하거나, 뭔가 이물감이 있게 만드는 메시지는, 실패한 메시지다. '봉준호에서 문재인 정권 비판까지' 흘러오는 나 원내대표의 이 메시지가 실패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지적할 만한 게 있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블랙리스트'라는 음침하고 거북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국정원개혁위원회는 2017년 10월 진상조사를 통해 이명박 정권 시절 국정원이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봉 감독이 포함돼 있었다. '문예계 주요 左성향 인물 현황'이라는 문건에는 '봉준호 - 민노당 당원'이라고 적혀 있다. '민노당'이란 건 2011년까지 존재했던 민주노동당을 뜻하지만 2007년 권영길 후보 대선 패배 이후 분화돼 사실상 반쪽이 됐던 역사를 유념해 본다면 2007년 이명박 당선 이전, 즉 참여정부 시절 봉 감독의 민주노동당 당원 활동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과 그 세력은 정권을 잡자마자 문화 예술인의 과거 이력을 뒤져 '블랙리스트'를 만든 셈이다. 이건 '보복'도 아니다. '보복'은 먼저 봉준호 감독이 이명박 정권에 해코지를 했어야 하는 것이니.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이 정권을 잡게 될지 알수 없었던 시절의 '민노당원' 봉 감독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건 조금 더 고약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현실 세계의 반정권 인물'이 아니라 '잠재적 반정권 인물'로 분류한 것인데, 조지 오웰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발상이다. 이명박 정권 시절의 블랙리스트가 파렴치한 이유다.

그 이명박 정권을 책임 졌던 당이 지금의 자유한국당이다. 그리고 나 원내대표는 이명박 정권 당시 '친이계 주류'에 속했던 인물로 정권에 책임을 나눠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은 블랙리스트를 '심화·발전(?)'시켰다. 안타깝게도 언론사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는데,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은 물론, <프레시안>도 피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덕분에 <프레시안>은 정부 광고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그래도 꼭 해야 할 질문이 있다. 과거 자신들이 만든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대해 한국당이 제대로,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적이 있었나? 이 쯤에서 나 원내대표의 메시지가 '거북하게 받아들여진' 원인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다.

봉 감독은 2017년 프랑스 AFP 통신과 인터뷰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대단한 악몽이다. 많은 한국인 예술가들이 심한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AFP 통신은 지난 5월 25일자 봉 감독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봉 감독이 독재자 박정희의 딸로 2017년 3월 탄핵된 대통령 박근혜 정권 하에서 '리스트 누아(liste noire,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일을 적어서 수많은 매체에 타전했다. 이 통신은 친절하게도 박찬욱 감독을 포함해 9500명이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던 정권이 선사한 '국격'의 수준이다.

최근 나 원내대표의 메시지를 보면 몇 가지 특성이 포착되는데, '혐오 발언 논란'도 불사하겠다는 듯 거친 단어를 사용하거나(달창 논란), 새로운 조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좌파 독재), 언론의 헤드라인(속칭 '미다시')를 배려한 언술(김정은 대변인) 등이 그것이다. 신선한 메시지를 내려 하는 긍정적 의미의 조바심은 읽힌다. 그런데 그런 조바심이 잘못 반영되면 '봉준호에서 시작해 문재인 정권 비판'으로 이어지는 '무리수' 논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덕분에 '권력과 불화'를 겪은 감독 봉준호를 떠올리게 됐으니 다르게 볼 수도 있겠다. 칸이 사랑하는 '좌파' 영화감독 켄 로치와 동급이 됐으니 이 정도면 '국위 선양'일 수도. 물론 켄 로치가 영국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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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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