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 급여화 논쟁, '게으른 비판'을 넘어야 한다

[시민건강논평] 논쟁이 남긴 정치적 공허함과 건강권의 재정의

포퓰리즘적 의제 설정과 정책 효능의 괴리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급여화는 2026년 상반기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정책 논쟁 중 하나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말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를 생존의 문제로 규정하며 검토를 지시한 이후, 정부는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급여화 방안을 구체화했고, 7월 4일 국민참여단 200명이 참여하는 국민토론회 개최를 예정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공론화 절차를 밟기도 전에 막을 내렸다. 급여화를 둘러싼 비판이 커지자 여론을 의식한 정부가 정책 추진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토론회를 전격 취소한 것이다.

이 짧은 정책의 생애주기 자체가 공약의 성격을 드러낸다. 애초에 정치권이 제시한 그림이 제도적 혁신이라기보다 대중의 일상적 불안을 겨냥한 이벤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탈모 당사자 사이에서는 특허가 풀린 지 오래된 약을 저가로 처방 받거나, 전립선비대증 처방을 경유해 사실상 급여 수준의 비용으로 약을 구하는 관행이 시장에서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제도가 공식적으로 바뀐다고 해서 당사자들의 의료이용 행태나 지불 비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도 없는 상태였다는 뜻이다. 결국 정치는 시장에서 이미 우회로를 찾은 대중의 욕망을 공공성의 언어로 포장해 활용했을 뿐, 보건의료 체계의 지향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질적 효과도 담보하지 못하는 공허함만을 남겼다.

세대 간 재분배 구조와 청년 세대의 상대적 박탈감

그렇다면 실질적 효과가 미미한 이 공약에 왜 청년 세대는 호응했는가. 이를 공짜 복지를 향한 이기심으로 치부하는 것은 현상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다. 한국정치를 연구하는 작가 황두영은 이 논쟁을 겨냥한 비판들을 '게으르고, 습관적인 반응'이라 지적하며, 그 반박의 이면에 청년 정치를 지나치게 단순한 밈으로 취급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짚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탈모 급여화 논쟁은 한 세대가 어떤 사회에서 어떻게 나누며 살고 싶은지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사안이다.

2030 남성들이 제기한 목소리 이면에는 복지 국가와 보건의료 제도를 향한 청년 세대의 깊은 박탈감과 불신이 투영되어 있다. 매달 건강보험료를 성실히 내면서도, 정작 청년인 자신이 돌려받는 혜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고령화가 심화될수록 건강보험 재정의 혜택이 중노년층을 중심으로 한 만성·중증 질환으로 쏠릴 수밖에 없고, 상대적으로 건강한 청년들은 비용의 공급자 역할에 머물기 쉽다. 국가가 미래도, 고용도, 주거도 책임져주지 않는 각자 도생의 세계관 속에서 청년들은 내가 낸 돈의 일부라도 지금 나를 괴롭히는 가장 가시적인 고통을 해결하는 데 돌려받겠다는 일종의 보상심리를 분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원 희소성의 프레임과 생존/삶의 질 위계화의 문제

이 공약에 쏟아진 가장 강력한 반대 논리는 예산의 한계였다. 6월 29일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4대 중증질환 건강보험 보장률이 2021년 84%에서 2024년 81%로, 암질환 보장률은 같은 기간 80.2%에서 75%로 각각 하락했다는 통계를 제시하며 탈모 급여화 논의의 순서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확장기 소세포폐암을 앓는 아버지를 둔 한 참석자는 회견장에서 높은 본인부담을 호소하며 울먹였다. 이 호소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보장률은 하락 추세이고, 고액 비급여 치료비 앞에서 생명을 연장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환자들이 존재한다. 그런 상황에서 탈모라는, 상대적으로 생명에 직접적 위협이 되지 않는 의제에 재정이 먼저 투입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당사자들의 분노와 좌절은 지극히 정당하다.

문제는 이러한 호소가 다른 취약한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유일한 문법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다. 보건의료 재정을 둘러싼 공론장이 애초에 '누가 더 절박하게 죽어가는가'를 증명해야만 발언권을 얻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면, 중증질환자도, 희귀질환자도, 만성질환자도 결국 서로의 고통을 저울에 올려 경중을 다투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는 환자단체의 주장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한정된 예산 안에서 고통의 경쟁이라는 틀 외에는 다른 언어를 제공하지 않은 채 재정 배분을 논의해온 정치적 설계 그 자체 때문이다.

탈모약을 두고 대립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둘 다 '왜 나의 고통은 후순위인가'를 묻고 있으며, 그 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생존과 삶의 질이라는 경계 자체가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인 기준이 아닌 본래 정치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장 죽어가는 이들의 시급성, 자본주의 시장이 심어놓은 신체적 불안, 보험료를 내면서도 박탈감을 느끼는 청년 세대, 그리고 생존 프레임 뒤에서 늘 숨죽여야 하는 소수자들의 배제된 목소리가 하나의 의제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이 맥락을 한정된 자원 안에서의 우선순위라는 프레임에 넣는 순간, 삶의 질의 문제는 항상 후순위로 밀려난다. 이 논리대로라면 성소수자의 호르몬 대체 요법이나 정신질환 치료처럼 '당장 죽는 것을 증명하기 어려운' 의제들은 영원히 복지의 테두리 밖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건강보장의 원리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생존과 삶의 질은 취사선택의 대상이나 양립 불가능한 대립항이 아니다. 질병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만큼이나, 외모지상주의에 따른 낙인과 그로 인해 파괴되는 개인의 사회적 자존감 역시 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탈모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다시 저울에 올리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의 경중을 매번 증명해야만 제도가 응답하는 방식 자체가, 건강을 삶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좁혀온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가 궁극적으로 가져가야 하는 공공성의 초점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넘어 시민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는 보편적 건강보장의 원리에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국가의 책임 방기를 비판한다. 국가는 탈모 급여화라는 미시적인 정책안으로 대중의 욕망을 건드렸을 뿐, 한국 사회에서 건강보장의 외연을 어떻게 확장하고 재구조화할 것인가에 대한 거시적 비전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사회적 낙인으로 고통받는 시민들의 목소리와 건강보험 제도의 보편적 원리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에 대한 책임 있는 논의를 방치한 셈이다. 그 결과 제도의 부재 속에서 고통은 사사화(privatization)되고, 시민들은 서로의 고통에 서열을 매기는 불행한 논쟁에 동원되었다.

공공성의 경계 설정과 숙의 민주주의의 과제

이 논쟁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정답으로 마무리될 수 없다. 생존과 삶의 질, 다수의 불안과 소수의 고통 사이에 그어야 할 경계는 애초에 정치 밖에서 주어지는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번 논쟁이 남긴 결론이 아니라, 다음 논쟁이 반복되지 않도록 던져야 할 질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국가의 건강보장 제도는 언제까지 시민들에게 죽음의 증명만을 요구할 것인가. 다수의 일상적 불안과 소수의 치명적 고통이 공론장에서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공공성의 경계를 넓혀갈 수 있을 것인가. 이 과정을 회피하지 않고, 더 투명하고 성숙하게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의 원칙을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탈모 급여화라는 멈춰 선 논쟁이 우리 시대 민주주의에 남긴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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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민건강연구소는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의 싱크탱크이자, 진보적 연구자와 활동가를 배출하는 비영리독립연구기관입니다. <프레시안>은 시민건강연구소가 발표하는 '시민건강논평'과 '서리풀 연구通'을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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