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지도를 펼치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대규모 생산국이 있다. 바로 베트남이다.
많은 한국 소비자에게 베트남 커피는 '값싼 로부스타' 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그건 수입 단계에서 ‘조제 커피용 원료’로 들어온 일부 물량을 오래 봐서 생긴 인식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세계 2~3위권의 커피 생산국(해마다 달라지는 물량으로 인해 변경될 수 있음)이고 그 안에는 싼 커피도 있지만 비싼 커피도, 공업형 대량재배도 있지만 고지대·소농 단위의 스페셜티 지향 농장도 함께 있다.
베트남을 커피 도시/커피 원산지로 본다는 건 이 겹쳐 있는 층위를 나눠서 보는 일이다.
베트남 커피의 출발은 프랑스 식민지기다. 프랑스가 가톨릭 선교와 함께 커피나무를 들여왔고 토양과 기후가 맞는 중부 고원 일대에 재배지가 만들어졌다.
다만 아라비카가 아니라 로부스타가 베트남의 얼굴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로부스타는 병해에 강하고 생산성이 높아 대량 생산에 맞고 열대 몬순 기후에도 잘 견딘다.
여기에 1986년 도이머이(쇄신) 정책 이후 농업 개방이 추진되면서 중부 고원의 커피는 수출을 전제로 한 ‘속도전’ 구조를 갖게 된다.
이때 만들어진 노선이 바로 우리가 아는 “베트남=저가 로부스타”의 출발점이다. 빠르게 많이 생산해 국제 시장에서 점유율을 올리는 방향이 베트남 커피의 특징이 되어 버린 것이다ㅏ.
우리나라에서는 이 로부스타가 주로 믹스커피·조제커피용 원두로 들어왔다.
로부스타는 카페인 함량이 높고 쓴맛이 선명해 설탕·프림과 섞었을 때 존재감이 살고 가격도 아라비카보다 낮으니 산업적으로는 합리적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 한 단면이 한국 소비자에게 “베트남 커피=싸고 거친 맛”이라는 고정관념으로 각인됐다는 거다. 원료 커피를 봐 놓고 원산지 전체를 평가해 버린 셈이다.
하지만 베트남 커피를 현지의 눈높이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호찌민과 하노이의 로컬 카페들은 여전히 핀(phin)으로 천천히 떨어뜨리는 전통적인 추출을 하면서도 원두는 예전처럼 무조건 싸구려만 쓰지 않는다.
중부 고원(다낭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럼동, 닥락, 람동·달랏 일대)에서는 고도 1200m 안팎에서 아라비카와 카티모르 최근에는 카투아이 같은 품종을 시험해 스페셜티 등급을 노리는 농장도 있다.
또 한동안 “베트남 커피는 버터 로스팅해서 향만 진하다”는 말이 돌았는데 그건 현지 대량 소비층을 겨냥한 특정 스타일이지 베트남 전체를 말해 주는 건 아니다.
수출용 스페셜티 로스터리들은 국제 컵 점수에 맞춰 워시드·허니·내추럴 가공을 하고 그중 일부는 한국·일본의 스페셜티 시장으로도 들어온다.
이 원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싸지 않다. 생산비·가공비가 붙고, 물류·소량 수입 마진이 더해지면 어지간한 중남미 싱글오리진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된다.
베트남 커피가 ‘싸다’는 인식이 생긴 데는 또 하나의 사정이 있다.
베트남은 생산량이 많기 때문에 국제 가격 변동의 영향을 직접 받는다. 커머셜급 로부스타 가격이 떨어지면 싸게 느껴지고 올라가면 “그래도 원래 싼 나라”라는 인식 때문에 ‘비싸졌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하지만 같은 해, 같은 지역에서도 가공법과 선별을 바꾸면 전혀 다른 가격대가 형성된다.
스크린 사이즈를 키우고 결점두를 골라내고 체리 상태가 좋은 걸 골라 워시드로 가공을 하면 그건 더 이상 믹스커피용 생두가 아니다.
원산지가 아니라 품질을 결정하는 작업 단계가 가격을 정하는 구조다.
현지의 음용 문화도 짚어볼 만하다. 베트남 거리 카페에서 흔히 보는 건 카페 쓰어다(Cà phê sữa đá), 연유를 넣은 아이스 커피다.
연유는 식민지기 유제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 만들어진 대체품이었고 강하게 로스팅한 로부스타에 농축유당의 진한 단맛을 더해 맛의 균형을 잡았다.
이 포맷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베트남 커피=연유 넣어 먹는 달고 진한 커피”가 됐는데, 이 역시 현지 전체를 설명하는 시선은 아니다.
하노이의 카페젠, 호찌민의 서드웨이브 계열 매장들은 라테, 푸어오버, 에스프레소를 서울의 스페셜티 카페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낸다.
베트남은 로부스타 대국이면서 동시에 빠른 속도로 취향을 세분화해 가는 도시 커피 시장이기도 하다.
결국 한국 소비자가 베트남 커피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순서를 바꿔야 한다.
“베트남=저가”라는 인상에서 출발하지 말고 어느 지역에서, 어떤 품종을, 어떤 가공으로 만들었는지부터 본다.
그다음이 로스팅과 향미 스타일, 마지막이 가격이다.
중부 고원 내추럴 아라비카와 저지대 대량생산 로부스타를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건 생산자 입장에서는 부당하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걸 놓치는 일이다.
농장에서 체리 선별을 하고 워시드/내추럴로 제대로 가공한 베트남 아라비카는 산미가 단정하고 열대과일·견과류 노트가 올라오며 로부스타라도 핀이나 에스프레소로 깔끔하게 뽑으면 초콜릿·카카오·허브 계열의 향이 또렷하다. 이건 ‘싼 맛’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간단하다. 로스터리에서 베트남 단일산지 원두가 보이면 한 번은 마셔 본다.
상품 설명에 지역(람동, 닥락, 달랏 등)과 가공법이 적혀 있는지 확인하고, '믹스용' 으로 들어오는 대량생산 원두와 의도적으로 구분한다.
커핑 노트를 보면 스페셜티 기준의 계열이 뚜렷하게 적혀 있을 때가 있는데 이건 이미 생산 단계에서 품질을 끌어올린 원두라는 뜻이다.
그렇게 한두 번 경험이 쌓이면 ‘베트남=저가’라는 프레임은 금방 느슨해진다.
우리나라에서 바라보면 베트남은 가까운 커피 생산국이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마셔 본 적이 없는 나라에 가깝다.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가 모두 같은 품질과 같은 가격을 내는 게 아니듯, 베트남도 한 덩어리로 볼 수 없다.
값싼 대량 로부스타가 있고 한국식 믹스커피의 원료가 있고 동시에 세계 시장을 향해 품종과 가공을 끌어올린 고급 커피도 있다.
커피 한 잔과 도시를 연결해 본다면, 베트남은 “싼 커피 나라”라기보다 “생산 규모 위에 취향을 얹기 시작한 도시 국가”에 가깝다.
이제는 라벨을 조금 더 읽고, 지역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해 마셔 볼 때다. 그래야 가까운 생산국의 진짜 얼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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