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사라지면 나 이제 어디가 ㅠㅠㅠ"
"추억하기에 너무 이른데 어떡하나."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일 서울 마포 강북노동자복지관 대강당 한편은 아쉬움이 푹푹 묻어난 글귀들로 메워졌다. 올해 말 운영을 종료하는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를 이용한 이들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종이에 써 붙였다.
다른 한편에는 나무가 2013년 운영을 시작한 이래 청소년들과 쌓아 온 추억이 사진으로 담겨 있었다. 옆에는 "우리는 사람이다. 밥 주고 잠 재워준다고 해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무에 와서 새로운 사람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말도 잘하게 됐다" 등 나무의 여전한 필요성을 보여주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이날 위기 여성 청소년을 만나 온 나무의 13년여 간 행적을 살피고 청소년 지원체계의 방향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사회자와 발제자들이 힘찬 목소리를 내려 애썼지만, 틈틈이 새어 나오는 한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나무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든 이용자와 종사자, 나무를 응원하는 시민 80여 명이 참가해 강당을 가득 채웠다. 이들은 3시간가량 이어진 발제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고요함을 유지했다. 그런데도 휴식 시간에는 "돌봄이 중요한데 갈수록 줄어든다"며 곳곳에서 탄식을 쏟아냈다.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는 탈가정과 성매매 등으로 위기에 처한 위기 여성 청소년을 지원하는 서울시 민간위탁기관이다.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이면 누구든 찾아올 수 있는 열린 공간, 거리로 내몰린 위기 여성 청소년을 찾아가 관계를 맺고 회복을 돕는 적극성이 이곳의 특징이다.
유튜브와 언론이 '성매매하는 10대 여성'으로 낙인 찍은 '경의선 키즈'는 독특한 복장과 문화에 경찰들도 기피한다. 하지만 나무만은 달랐다. 경의선 키즈가 모이는 서울 마포 경의선 일대를 찾아 청소년들과 함께 춤을 추는 등 친밀함을 쌓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활동가들이 격 없이 청소년들과 교류하는 모습은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정폭력, 성폭력, 자해, 성매매 등 각종 위기에 시달린 여성 청소년, 쉼터에 찾아갔으나 도움을 받지 못한 여성은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나무를 찾아갔다. 그들에게 나무는 혼자 책을 읽거나 잠을 자도 꾸짖는 이 없는 곳, 내밀한 이야기를 터놓고 말할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곳이었다. 물질적 지원에 집중하는 다른 기관들과 달리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활동가들이 있다는 점도 청소년들이 말하는 나무의 장점이다.
나무 이용자와 활동가 17명과 인터뷰를 진행한 한낱(활동명)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는 "이용자와 활동가들은 모두 나무가 가진 특별함으로 '편안함'을 꼽았다. 이는 친밀한 관계의 돌봄 속에서 쌓아간 시간과 감정이 응축된 결과"라며 "이용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취약함을 수용하는 개방성, 청소년의 몸과 마음 상태뿐 아니라 이들의 삶의 이력을 이해하는 관계 맺기 등이 모인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용자들의 호평에도 나무는 올해를 끝으로 문을 닫는다. 다른 기관과의 기능 중복을 이유로 서울시와 서울시의회로부터 기관 통폐합을 주문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 7월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도 유사한 이유로 폐쇄됐다. 서울시는 내년 신규 위기청소년 지원기관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시기와 지원 내용은 아직 정해진 바 없다.
'어른의 사정'으로 갈 곳 없어진 청소년들은 "나의 세상이 무너졌다", "고립될까봐 걱정된다", "실감이 안 난다. 너무 슬퍼서 오히려 감정이 안 느껴진다" 등 거세게 성토했다. 일부 청소년은 처음 나무 운영 종료 소식을 듣고 격분해 서울시의원들을 찾아가려고도 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나무 이용자 연(가명)은 "나무가 없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기관 하나 없어지는 게 아니라 위기 여성 청소년에 대한 복지 정책의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어느 순간에 나무는 이미 내 일상이 돼 있었다"라며 "내 의지가 아닌데 일상 중 하나가 사라지면, 거기서 오는 허탈감은 어떻게 보상해 주느냐"고 했다.
더 이상 청소년들을 돕지 못하게 된 나무 종사자들도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토론을 마치고 강당 앞으로 모인 종사자들은 소회를 밝히는 동안 한 명도 빠짐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나무 종사자 또잉(활동명)은 "청소년들과 일상을 함께한 나무는 활동가로서 제 일상이기도 했다"라며 "아직도 지원해야 하는, 도움받아야 하는 청소년들이 많아 마음이 놓이지 않고 너무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아쉬운 마음이 너무 크지만 오늘 토론회를 계기로 앞으로 청소년 기관의 지원 방향과 돌봄 정책이 다양해지기를 기대한다"며 "자리에 모인 여러분이 나무가 해온 활동들을 일상에서 실천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무 종사자들이 경의선 등 거리로 찾아가는 아웃리치 활동은 오는 8일을 끝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나무의 도움이 필요한 위기 여성 청소년(만 24세 미만)은 올해 말까지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나무 작업공간에서 도움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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