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하나 집어 들 때, 우리는 그저 달콤함만 생각한다. 하지만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초콜릿 한 조각에 평등과 복지의 꿈이 녹아 있었다. 그 중심에 엘리자베스 메리 캐드버리(1858-1951)라는 여성이 있었다. 93년을 산 이 분은 초콜릿 재벌과 결혼했지만, 부자집 마님 노릇은 거부하고 평생을 사회개혁에 바쳤다.
본인부터 금수저를 거부한 귀족 출신 행동가
엘리자베스는 런던 펙햄 라이에서 열 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부모인 존 테일러(John Taylor)와 메리 테일러(Mary Taylor)는 독실한 퀘이커 교도였다. 퀘이커는 평화와 평등을 중시하는 개신교의 한 분파로, 귀족이든 평민이든 똑같이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어머니를 따라 구빈원과 아동병원을 방문하며 가난한 이들의 삶을 목격했다. 요즘 말로 하면 초등학생 때부터 '현장실습'을 한 셈이다.
1888년, 서른 살의 엘리자베스는 초콜릿 제조업자 조지 캐드버리(George Cadbury, 1839-1922)와 결혼했다. 조지는 재혼이었고, 엘리자베스는 다섯 명의 의붓자식을 포함해 총 열한 명의 아이를 키우게 됐다. 요즘 같으면 육아만으로도 인생이 끝날 판인데, 이 여성은 가정과 사회개혁을 동시에 해냈다. 대체 잠은 언제 잤을까?
초콜릿 마을, 유토피아를 꿈꾸다
조지 캐드버리는 형 리처드(Richard Cadbury, 1835-1899)와 함께 공장을 버밍엄 외곽의 본빌(Bournville)로 옮겼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식당과 운동장을 제공했고, 깨끗한 집과 정원이 딸린 마을을 만들었다. 19세기 영국 공장이라면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 소설에 나오는 그 끔찍한 풍경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본빌은 정반대였다. 노동자들은 녹지에 둘러싸인 정원이 있는 주택에서 살며 체육활동을 즐겼다. 자본주의 한가운데서 사회주의 실험을 한 셈이다.
엘리자베스는 이 본빌 마을 신탁(Bournville Village Trust)의 원래 위원이었고, 남편이 1922년 사망한 뒤에는 의장직을 맡아 50년 넘게 마을 개발을 이끌었다. 본빌은 단순한 주택 단지가 아니라 공동체였다. 학교, 병원, 공원이 모두 갖춰진 이 마을은 오늘날에도 저렴한 주택을 제공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자본가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한 사례로, 21세기 부동산 투기꾼들이 반성해야 할 역사다.
어린이에게 초콜릿 대신 건강을 선물하다
엘리자베스의 관심은 특히 어린이와 여성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휴양 시설 '더 비치스(The Beeches)'를 세워 도시 빈민가 아이들이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쉴 수 있게 했다. 당시 영국 도시는 석탄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빈민가 아이들은 결핵과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초콜릿 공장 사장 부인이 초콜릿 대신 신선한 공기를 나눠준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진정한 자선이었다.
그녀는 학교 의료검진제도를 주장하며 버밍엄 학교 검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건강검진 받는 게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아이들의 건강은 부모 책임이 아니라 사회책임이라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치다
엘리자베스는 열성적인 평화운동가였다. 1914년 국가여성협의회(National Council of Women)의 평화와 국제관계위원회 초대위원장을 맡았고, 1916년에는 국가평화협의회(National Peace Council)에 선출돼 재무를 맡았다가 부의장까지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비국민' 소리 듣기 딱 좋았다.
하지만 퀘이커교도들은 전쟁을 종교적 신념으로 거부했다. 엘리자베스는 폭력자체를 반대했고, 국제협력을 통한 분쟁해결을 주장했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자본가들이 넘쳐나던 시절, 초콜릿 재벌부인이 평화를 외친 건 통쾌한 역설이다.
여성의 목소리를 키우다
엘리자베스는 국가여성협의회 의장직을 역임하며 여성의 사회참여를 적극 지지했다. 당시 여성은 투표권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영국여성이 완전한 참정권을 얻은 건 1928년이었고, 엘리자베스는 그 과정에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1941년부터 1948년까지 버밍엄 연합병원(United Hospital) 원장을 맡기도 했다. 90세가 넘어서도 현역으로 일한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은퇴연령을 훌쩍 넘긴 나이에 병원장을 맡은 것이다.
초콜릿과 양심은 공존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 메리 캐드버리의 삶은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부와 양심은 공존할 수 있을까? 그녀의 대답은 명확했다. 돈이 있다면 그것을 사회에 환원해야 하며,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약자를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1951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나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 복지국가의 탄생을 목격한 인물이었다. 캐드버리 초콜릿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팔리고 있지만, 이제 그 회사는 다국적 기업에 넘어갔다. 본빌 마을은 남아 있지만, 엘리자베스가 꿈꾸던 그 유토피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엘리자베스 같은 부자가 몇이나 될까? 세금은 최대한 안 내고, 사회 환원은 홍보용으로만 하는 재벌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엘리자베스 메리 캐드버리는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그 초콜릿에 독을 타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자본주의가 꼭 착취의 역사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그런 자본가가 극소수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다음에 캐드버리 초콜릿을 먹을 때, 잠시 이 여성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한국의 재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초콜릿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 생각이 있는가, 아니면 그냥 돈만 쌓아 놓을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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