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쳤다. 효과적인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더뎌지면서 위기가 깊어졌고, 백신이 개발된 이후에도 생산과 분배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더 짧은 주기로, 더 치명적인 '팬데믹 X'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위기는 한 나라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류 전체의 협력이 절실한 문제이다. 코로나19의 경험을 통해 미래의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당시 'K-방역'으로 주목받았던 한국 정부는 글로벌 위기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국제 사회의 일원이자 고소득 국가 중 하나로서 그 책무를 다했을까? 김지민·박지원·김선 연구팀은 당시 한국 정부의 '글로벌 백신 허브 프로젝트'의 속살을 깊이 파고든다(☞논문 바로가기: 글로벌 정의라는 수사의 기저: 한국의 글로벌 백신 허브 프로젝트를 통한 글로벌 헤게모니 통치성의 강화).
이 논문은 2021년 시민건강연구소에서 발간된 보고서 <코로나19 백신접종과 시민의 권리> 6장 '코로나19 백신의 글로벌 정의와 국제 거버넌스'에서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다(☞보고서 바로가기: 코로나19 백신 접종과 시민의 권리).
위기 속 탄생한 '글로벌 백신 허브 프로젝트'
코로나19 확산 초기인 2020년 상반기까지 한국의 정책은 방역과 국산 백신 자체 개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고소득 국가들의 백신 자국 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고 'COVAX(코로나19 백신에 대한 全지구적 접근, COVID-19 Vaccines Global Access)'를 통한 공평한 백신 조달을 옹호했다. 그러나 2020년 11월 이후 하루 평균 신규 확진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백신 물량 확보가 늦어지자 방역 실패에 대한 비판에 직면했다.
압력에 직면한 문재인 정부는 국내 백신 개발 지원과 동시에 해외 백신 물량을 신속히 확보하는 전략을 발표했고, 이어 2021년 5월 21일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글로벌 백신 허브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이 정상회담에서 '포괄적 한미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을 체결했는데, 이를 계기로 백신의 (위탁) 생산과 기술 이전·개발을 통해 한국을 "전 세계 백신 공급의 중심지"로 만드는 "글로벌 백신 허브화" 구상을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기업의 백신 개발을 "모든 행정력과 재원을 동원해 끝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G7 정상회의 등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백신 허브 최적국'"임을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원천 기술은 부족하지만 뛰어난 생산 역량을 바탕으로, 해외 백신을 위탁 생산하고 기술 이전을 통해 국산 백신까지 개발해 독자적인 '백신 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글로벌 정의'를 내세운 네 가지 통치 기술
이 연구는 한국 정부가 '글로벌 백신 허브' 정책을 추진하며 사용한 네 가지 핵심적인 통치 기술을 분석한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을 숫자로 보여주기'이다. 정부는 구체적인 투자 금액, 생산 목표치 등을 숫자로 제시했다. 이는 백신 문제를 누구에게 먼저 분배할 것인가와 같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해 이윤을 내는 경제적·기술적 문제로 바꿔버렸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공간은 순위 경쟁이 벌어지는 시장이 되었고, 백신 허브 프로젝트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국가 경영 전략으로 포장되었다. 불평등 문제는 자연스럽게 지워졌다.
둘째, '기업 지원을 국익으로 포장하기' 전략이다. 정부의 백신 허브 전략의 중심에는 대기업이 자리 잡았다. 한국 정부가 나서서 모더나, 노바백스 등의 미국 기업과 삼성바이오로직스, SK바이오사이언스 간 MOU 체결을 주선하였고, 또 정부가 민간 제약회사의 백신 개발, 생산, 수출을 위한 전 과정에서 재정적 지원은 물론 '기업애로해소지원센터'를 두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수행했다. 기업의 이윤은 곧 국익의 극대화로 정당화되었으며, 표면적으로 글로벌 위기 해결을 내세운 전략은 사실은 기존의 기업 활동을 활성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세 번째는 '특허에 대한 이중적 전략'이다. 정부는 선진국의 기술 이전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국내 기업들이 빠르게 특허를 획득하도록 지원하였고, 팬데믹 종식을 위해 전 세계 시민사회가 요구한 코로나19 백신·치료제 기술 지식재산권 유예안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보였다.
마지막 전략은 '외교를 국익의 도구로 삼기'이다. 백신의 글로벌한, 공평한 분배는 전 세계적인 문제로 COVAX와 같은 다자 간 협력틀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논의할 수 있었음에도, 한국 정부는 글로벌 협력 문제를 개별 국가들과의 외교 문제로 축소하였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선진 기술을 가진 국가들과는 협력을, 중·저소득 국가와는 지원이나 임상시험 등을 도모하는 식이었다. 특히 미국과의 '백신 협력'은 군사 외교와 연결되어 한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방역 모범국'이자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연대'는 상대국과의 관계를 통한 국익 추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였다.
인류의 생명 위기의 시기에도 발동한 '선진국' 욕망
이 백신 허브 프로젝트의 기저에는 '국익 추구'와 '발전'이라는, '선진국'을 향한 강력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백신은 인류를 구원할 공공재가 아니라 한국을 세계 백신 시장 탑 5위 안에 들게 할 수익성 높은 상품이었다. 한국은 스스로 성공적으로 'K-방역'을 해낸 '선진국'이자 이를 세계에 수출해 책임을 다하는 글로벌 '선도국'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행동과 효과는 달랐다. 한국의 글로벌 백신 허브 프로젝트는 글로벌 백신 불평등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이니셔티브가 아닌, 국익 추구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에 그쳤다. 이 과정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의 위기와 연대의 계기가 아닌,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경제적·외교적 기회로만 여겨졌다.
글로벌 정의의 '실패'는 지배적 체제의 '성공'이다
전 세계적인 백신 불평등은 결국 바이러스 변이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며 팬데믹 종식을 늦췄다. COVAX 등의 국제 협력체는 기업의 이익과 강대국의 이기주의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이 현상을 '실패-성공(failure-success)'이라고 부른다. 글로벌 협력의 '실패'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위기의 시기에도 기존의 불평등한 국제 체제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기존의 불평등한 체제가 강력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잠재적인 미래의 위기에서 이와 같은 '실패-성공'의 덫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국익과 이윤을 넘어, 생명과 글로벌 연대의 가치를 고민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상력이 위기의 시기에 발휘되려면, 이 변화를 위한 노력이 바로 지금, 우리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서지 정보
Gim, J., Park, J., & Kim, S. (2025). Beneath the rhetoric of global justice: Reinforcement of global hegemonic governmentality by South Korea's Global Vaccine Hub Project. Globalization and Health, 21(1),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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