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1일 하반기 전공의 모집이 시작됐다. 먼저 학교로 복귀한 의대생들에 이어 9월부터 전공의가 병원으로 복귀하면 1년 반 동안 지속된 의정갈등 사태도 마침표를 찍는다(☞관련 기사: 1년 6개월 의정갈등 마침표 눈앞…전공의·의대생 제자리로).
의정갈등은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여러 과제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는 민주 사회에서 의사 집단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지다. 일련의 사건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의사 집단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행위자 중 하나다. 특히 보건의료 정책에서 이들은 지금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핵심 관계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좋든 싫든 의사들을 이해하는 일은 긴요한 과제다. 집단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 별개로 이들의 '단일대오'를 가능하게 한 집단적 사고방식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의사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 미국의 사례는 일정한 도움을 준다. 한국과 미국의 보건의료체계는 간과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시장원리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기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의학교육 체계가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미국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오늘 살펴볼 연구는 정신과 의사이자 인류학자인 저자가 이데올로기와 훈육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미국 의사가 어떻게 '순응적 신체(docile bodies)'로 형성되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윤리적 위기로 이어지는지 분석한 글이다(☞논문 바로가기: 의료 이데올로기와 순응적인 의사 만들기).
먼저 저자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불평등한 세상과 사회 구조를 이해하게 하는 총체적 신념체계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이 신념체계를 통해 우리 자신과 타인의 위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안락함 속에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구조와 이를 지탱하는 권력에 대한 질문을 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일견 자명해 보이는 조건과 전제에 의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이데올로기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연구의 목적이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저자의 초점은 미국의 보건의료체계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장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알튀세르의 개념을 빌리자면 미국 의료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진료실과 병원에서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의사와 환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체화한다.
"건강과 안녕을 유지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국가가 모든 시민을 돌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오직 성실한 노동자여야만 의료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다."
특히 미국 의사들이 받는 교육과 훈련의 과정은 이들을 특정한 주체로 훈육한다. 도제식 수련체계에서 학생과 전공의는 선배 의사의 처방, 술기, 나아가 생각의 방식까지 모방하도록 규율된다. 이들은 의학교육을 통해 기성 체계에 대한 신뢰 자체를 학습하며, 비판적 사고와 질문을 억누르는 법을 훈련한다. '의학'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의 몸에 관한 것이며, 질병을 유발하고 사람들이 건강할 수 없게 만드는 정치적, 상업적, 사회적 조건들은 '의학적 판단'의 범위를 넘는다는 탈맥락적 사고방식을 학습한다.
의료 전문가를 고귀한 일에 종사하는 도덕적 개인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의료윤리 교육도 중요하다. 의과대학의 윤리 교육은 각종 딜레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선을 판단할 것인지 사고하는 훈련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율성 존중의 원칙', '악행 금지의 원칙', '선행의 원칙' 등 핵심 키워드를 암기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이 윤리적 주체라는 감각을 강화하는 과정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의사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인식론적 체계를 정당화하고, 이 체계에 대한 어떤 비판에도 방어적으로 반응하게끔 조건화된다. 자기 집단이 공유하는 윤리적 판단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집단적 규범은 철저히 내면화되고, 동의와 복종은 숙고한 선택이 아니라 자동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지배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정된 기능을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주체로 형성되는 것이다.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미국의 의학교육 체계는 의사들을 순응적 신체로 훈육하고, 의사가 환자를 객체화하는 '의학적 시선(medical gaze)'은 순응적 환자를 형성할 뿐 아니라 의사 자신도 그렇게 만들어 간다.
미국 의료는 매년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도 사람들의 건강을 충분히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만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초래한 코로나19 대유행은 미국 보건의료체계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체계 개혁을 향한 요구가 신속하게 무마된 배경에는 이처럼 지배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복무하는 순응적인 의사 주체가 있다.
한 가지 문제는 체제 모순이 극대화되는 상황 속에서 의사 스스로도 직업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최근 수년간 미국 의사의 번아웃 문제가 학술적, 정책적 공론장에서 꾸준히 논의되어왔다. 이 연구는 의사들에게 만연한 번아웃이 단지 노동 조건이나 과로 때문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내가 속한 보건의료체계가 구조적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지 않았다는 위화감,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파산'이야말로 번아웃의 근본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안으로 의학교육의 개혁과 함께 이데올로기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진료실에 갇힌 탈맥락적 임상주의를 벗어나 '건강과 정치경제'를 교육하고,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의료윤리를 학습하자는 제안이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돌봄의 정치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 돌봄이 기회, 자원, 권력의 불평등과 무관하지 않으며, 진정한 돌봄을 위해 정치적 투쟁이 필요하다는 인식 말이다. 의사들이 사회변화를 위한 정치 활동에 참여할 때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순응적 신체가 아니라 연대에 기반한 비판적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때의 비판은 사회적 실천인 동시에 직업적 신념과 자긍심을 회복하는 자기 돌봄이기도 하다.
이 연구는 미국 의사를 다루었지만, 한국의 맥락으로 가져오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를 짚어두자면 의사들의 순응적 신체를 본질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비판'적 관점을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개별 주체에 대해서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비판은 현재의 상태를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대안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자 태도다.
비록 한국 의사들이 어떤 주체로 형성되었는지 온 사회가 뼈아프게 경험했지만, 그 또한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구조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 구조가 아무리 강고하고 의사 주체들과 얼마나 긴밀히 엮여있다고 한들 결코 변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공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의지적으로 낙관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까? 희망은 발견되는 것이기보다 애써 발굴해야 하는 무엇이다.
*서지 정보
Reinhart, E. (2025). On medical ideology and the production of docile doctors: The politics of care in an age of authoritarianism. Social Science & Medicine, 383, 118428. https://doi.org/10.1016/j.socscimed.2025.118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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