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비문 읽어주는 영국 AI, 역사도 이제 기계에 맡기나?

[김성수의 영국이야기] 2000년 전 돌멩이가 갑자기 수다쟁이가 됐다

로마시대 비석 하나가 박물관 구석에서 조용히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세월의 풍파로 글자는 반쯤 지워지고, 학자들은 몇십 년째 "이게 뭘 말하는 거지?"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영국 노팅엄 대학교와 구글 딥마인드가 공동 개발한 인공지능 '아이네아스(Aeneas)'가 나타나서 "아, 이거 황제 찬양하는 글이고, 기원후 150년경 스페인에서 새긴 거네요"라고 척척 답한다.

17만6천 개의 고대 라틴어 비문을 학습한 이 똑똑한 기계는 72%의 정확도로 로마 62개 속주 중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맞히고, 제작 시기도 13년 오차 범위 내로 추정한다. 인간 학자가 평생 걸려 해석할 일을 몇 초 만에 해치우는 셈이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자 로마 건국신화의 주인공 이름이다. 베르길리우스의 대서사시 주인공이 이제는 디지털 세상에서 고대 문명의 비밀을 풀어헤치는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고대 영웅이 현대기술로 환생한 격이니, 이보다 멋진 작명이 또 있을까.

역사학자들의 복잡한 심경해방인가, 실업인가?

유명한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는 이를 두고 "혁신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학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어떤 이는 "드디어 해방이다!"라며 환호하고, 또 다른 이는 "기계가 역사를 써도 되는 건가?"라며 걱정한다.

사실 이런 걱정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의 밥벌이는 고대 문헌을 해석하고, 조각난 비문을 맞춰보고, "이 글자가 'A'인지 'B'인지" 두고 학회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계가 나타나서 "다 됐어요!"라고 하니, 마치 수십년간 직소 퍼즐을 맞추던 사람 앞에 완성품이 뚝 떨어진 격이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의 고민이 깊다. "라틴어 10년 배워서 박사학위 따고, 이제 막 고대 비문 해석에 재미를 붙였는데, 기계가 다 해버리면 나는 뭘 하라고?" 한 대학원생의 푸념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제야 진짜 연구다운 연구를 할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글자 하나하나 맞추느라 평생을 보내는 대신, 그 글자가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맥락을 파헤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게 됐으니까.

72% 정확도, 과연 믿을 만한가?

아이네아스의 72% 정확도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일까. 대학교 시험으로 치면 낙제점 아닌가 싶지만, 고고학 분야에서는 놀라운 성과다. 지금까지 인간 전문가들도 고대 비문의 출처나 연대를 정확히 맞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이네아스는 단순히 맞추기만 하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근거도 제시한다. "이 비문에 쓰인 단어 조합은 2세기 중엽 갈리아 지역에서 주로 사용됐고, 석재 가공 기법도 그 시대 특징을 보인다"는 식으로 말이다. 학자들이 수십년간 쌓아온 경험과 직감을 데이터로 학습해 체계화한 셈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아이네아스는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학습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비문이나 예외적인 경우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수 있다. 마치 교과서만 달달 외운 모범생이 응용문제 앞에서 당황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가짜 역사' 걱정은 기우일까?

더 심각한 우려도 있다. 인공지능이 추정한 내용이 틀렸다면? 후세 사람들이 그걸 '진짜 역사'로 받아들인다면?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인공지능이 지어낸 역사"가 정설이 될 가능성을 경고한다.

실제로 비슷한 사례가 있다. 위키백과에 잘못된 정보가 올라갔다가 수년간 그대로 인용되며 '사실'처럼 퍼진 경우들 말이다. 만약 아이네아스가 잘못 해석한 비문이 교과서에 실린다면? 학생들은 그걸 외우고, 다음 세대 학자들은 그걸 기준으로 연구한다면?

하지만 이런 걱정에 대해 개발진은 웃으며 답한다. "학자들이 수십 년 고민해도 못 푸는 문제를 72% 정확도로 푸는 게 어디야. 게다가 이건 도구일 뿐이지, 최종 판단은 여전히 인간 몫이야."

실제로 아이네아스는 공개 소프트웨어로 제공돼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개발진이 독점하려는 게 아니라, 전 세계 연구자들과 함께 발전시키겠다는 의도다. 이런 투명성이야말로 '가짜 역사' 우려를 불식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기계와 인간, 누가 더 역사를 잘 읽을까?

생각해보면 인간도 완벽하지 않다. 같은 비문을 두고 학자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떤 교수는 "이건 분명 종교의식 관련이야"라고 하고, 다른 교수는 "아니야, 상업 계약서야"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같은 학자가 10년 후에 자신의 이전 해석을 뒤집는 경우도 있다. 그럼 둘 다 틀렸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반면 인공지능은 최소한 일관성은 있다. 같은 입력에 같은 출력을 낸다. 물론 틀릴 수는 있지만, 적어도 "오늘 기분이 나빠서 다르게 해석했다"거나 "이번에는 다른 학파 이론을 따라보자"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직감과 상상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로마시대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 그들이 비문에 담고자 했던 진짜 의미를 읽어내는 건 아직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이다. 아이네아스는 "언제 어디서"는 잘 맞히지만, "왜 그랬을까"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고고학계의 새로운 바람

아이네아스의 등장은 단순히 편의성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해독되지 않았던 수많은 비문들이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박물관 창고에 잠들어 있던 로마시대 유물들이 다시 빛을 볼 날이 온 셈이다.

특히 자원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의 연구진들에게는 더욱 의미가 크다. 이제 라틴어 전문가가 없어도, 몇십 년 경력의 고고학자가 없어도, 컴퓨터만 있으면 고대 로마의 비밀을 엿볼 수 있게 됐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발견되는 로마시대 유물들도 더 빠르고 체계적으로 연구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전문가의 필요성을 완전히 대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 연구자들은 더 깊이 있는 분석과 해석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래는 협업의 시대

결국 답은 "둘 다"인 것 같다. 인공지능이 1차 분석을 하고, 인간이 그걸 검토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번역 앱이 나왔다고 통역사가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인공지능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더 높은 차원의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일부 연구진들은 아이네아스를 활용해 흥미로운 발견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로마 속주 간의 문화적 연결고리를 찾아내거나, 특정 시대의 사회상을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기계의 속도와 정확성, 인간의 창의성과 직관이 만나면서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2천 년 전 로마인들이 돌에 새긴 글이 21세기 기계에 의해 다시 읽힌다는 건, 그 자체로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고대인들이 현대기술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 자신들이 새긴 비문에 이런 내용을 추가했을 것이다: "미래의 기계들아, 우리 글 함부로 바꾸지 마라! 하지만 정확히 읽어준다면야 고맙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로마인들도 분명 우리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인류는 언제나 기술과 함께 발전해 왔다. 아이네아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중요한 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인공지능이 역사를 다시 쓰는 시대, 우리는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할까?

기계의 도움을 받는 것과 기계에 의존하는 것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자 로마 건국신화의 주인공 '아이네아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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