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이후 1700여 개 시민사회 단체들이 모여 발족한 비상행동이 지난 10일 해산을 선언하며 7개월간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시민사회 연합체인 비상행동은 윤석열 퇴진을 향한 광장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데는 효과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은 반면, 다음 단계인 사회대개혁을 향한 목소리 내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각양각색의 단체들이 모인 만큼, 방향성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잡음이 일기도 했다. 특히 지난달 13일 열린 비상행동 11차 운영위원회 회의에서는 그간 누적된 내부 이견이 거세게 분출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발단은 '성평등·여성 의제의 실종' 문제였다. 11차 운영위 회의가 열린 시점은 윤 전 대통령 파면 후 조기 대선 국면에서 거대 양당이 성평등·여성 공약을 배제해 '성평등이 실종된 대선'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던 때였다.
이날 회의에서 광장의 주요 구호로 '조희대 대법원 규탄', '사법개혁' 등만 제시되자, 회의 석상에서 거센 항의가 터졌다. 이보다 3일 전 열린 비상행동 광화문 집회도 주요 구호가 '사법부 정치개입 규탄'과 '내란청산' 중심으로만 채택돼, 성평등을 포함한 소수자 의제가 사라졌단 지적이 나온 터였다.
회의에서는 "사회대개혁 의제가 대선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주요 기조가 이렇다면, 광장의 시민들이 어떤 생각으로 참여하겠느냐", "여성들과 소수자들이 광장을 주도했는데, 이들이 열망했던 바가 비상행동에 거의 담기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한 활동가 A 씨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의제가 주요 구호에 나열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이게 지워지고 있는 대선이기에 더 중요하고, 지금도 사회대개혁 의제를 말 못하면 향후 정세에서도 풀어낼 수 없게 된다"고 항의했다. 또 다른 활동가 B 씨는 "성평등, 소수자 의제 등을 부차적인 것으로 대하는 일부 의장들의 태도에, 몇몇 활동가들은 정말 '부들부들 떨면서' 거세게 항의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운영위원회는 논의 끝에 '내란 세력 비호 대법원 규탄' 구호에 더해 '혐오정치 청산', '다양성의 정치 실현', '기본권 강화', '생존권 보장' 등을 주요 구호로 추가했다.
일부 의장의 더불어민주당 지지 행보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왔다. 비상행동 공동의장단 17명 중 8명은 지난달 1일 '광장대선연합정치시민연대' 추진위원으로 참가해 민주당 등 5개 야당과 연합해 이재명 대통령 지지를 선언했다.
이에 조직 내에서는 "민주당은 사회대개혁 과제를 대부분 삭제했는데, 비상행동 의장의 지지는 이런 민주당이 마치 광장의 요구를 반영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민주당 우경화에 힘을 싣고, 보수 양당 체제를 강화하기만 한다"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의장 측이 비판 의견을 회의록에 남기지 않으려 해 거센 반발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광장시민연대 참여를 긍정적으로 본 의장과 활동가들은 "비상행동이 아닌 의장 개인의 행보이기에, 운영위 회의로 다루는 것과 이를 회의록에 남기는 것 모두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들은 또 "광장시민연대도 내란 청산과 사회대개혁 추진이라는 같은 목표로 활동하고 그 방법이 다른 것"이라며 "비상행동 내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는 취지로 반박했다.
실제 경남비상행동에선 시민들이 모여 있는 SNS 공간이 4월 대선 국면 직후부터 민주당 선거운동용으로 전환돼 갈등이 가시화되기도 했다. 경남 시민 400여 명이 모였던 경남비상행동 카카오톡 대화방과 트위터 계정이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방이 아니"라는 의견을 낸 이들과 항의의 의미로 진보 성향의 민주노동당 후보 정보를 게시한 이들 일부는 대화방에서 강제 퇴장을 당했다.
지난 10일 비상행동이 해산을 선언한 현장에서 벌어진 소란도 이 연장선상의 일이라는 게 내부의 평이다. 해산 선언 기자회견에서 일부 참가자들은 "해산에 반대한다"거나 "참담하다"고 크게 소리치며 항의했다. 그러나 비상행동에 참여한 활동가 C 씨는 "해산 시점에 관한 판단은 제각각이었지만, 인력 등 실무적인 이유와 방향성의 차이로 '해산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은 많은 단체가 공유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활동가 D 씨도 "민주당은 사실상 사회대개혁 의제를 다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젠 여당이기에 견제의 대상"이라며 "비상행동엔 민주당 지역 시·도당 등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점이 비상행동의 대선방침 결정이나 사회대개혁 공론화를 어렵게 했다"고 해산에 동의한 이유를 말했다. D 씨는 "시민사회단체들은 대개 해산에 동의했고, 민주당과 협력적인 단체나 진보당 등의 정당들은 유지 입장을 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7개월간의 활동 평가서 작성을 준비하고 있는 비상행동은 한국진보연대,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세바넷) 등으로부터 비상행동 활동 평가서를 각각 제출받았다.
이 중 세바넷은 "윤석열 퇴진과 사회대개혁이 하나의 과제라는 점을 더 드러내야 했는데, 비상행동은 퇴진 투쟁 전술은 열심히 운용하면서 사회대개혁은 별도로 다뤘다"며 "결국 사회대개혁 요구들은 계속 차후의 문제로 남았다"고 비판 의견을 냈다. 또 "민주당의 선명한 우경화 행보에도 적절한 비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며 "이는 이후 비상행동 지도부 중 일부가 '광장연대'에 참여해 광장의 요구를 왜곡·축소하는 모양새로 이어지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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