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마라톤과 축구 운명을 어떻게 갈랐나

[이종성의 스포츠 읽기] 보스턴 마라톤대회 좌절과 월남 축구인들의 성공기

전쟁은 국민들의 일상생활을 파괴한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비규환 같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한국의 스포츠는 쉬지 않고 달렸다. 일제시기 '민족의 스포츠'로 자리잡은 마라톤과 축구가 그랬다.

흥미롭게도 이 두 스포츠는 전쟁 때문에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동메달의 빛나는 전통을 광복 후에도 이어왔던 한국 마라톤은 전쟁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반면 축구는 전쟁을 기점으로 1960년까지 '아시아 축구의 호랑이'로 군림할 수 있는 토대를 쌓을 수 있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1, 2. 3위 석권한 한국

광복 이후에 한국은 세계적인 마라톤 강국이 됐다. 그 시작점은 1946년 8월 9일이었다. 이 날은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한 지 10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다. 이 때에 1932년 LA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권태하, 김은배와 함께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인 손기정, 남승룡이 의기투합해 조선마라톤보급회를 조직했다.

정치적 혼란과 빈곤 속에서도 조선마라톤보급회는 우수 선수를 선발해 합숙훈련을 시킬 정도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이를 통해 기량이 급성장한 서윤복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로부터 3년 뒤 한국은 보스턴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보스턴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각각 1, 2, 3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선수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최윤칠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스턴에 도착한 이후 신경통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대회 참가가 쉽지 않았지만 최윤칠은 근육경련 속에서도 끝까지 완주해 3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 코치로 참가한 손기정은 다른 두 동료 선수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끝까지 역주한 최윤칠의 투혼이 한국의 보스턴 대회 석권을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미국 언론들은 대회를 휩쓴 한국 마라톤에 집중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보스턴 글로브>는 "한국에서 마라톤은 국민 스포츠이며 어려운 국가재정을 고려하면 용품이 필요 없는 마라톤은 한국에 이상적인 스포츠"라는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함기용도 "한국은 자동차가 교통수단인 미국과 달리 도보가 일상적인 교통수단이라 다리 근력을 키우는데 좋다"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하지만 미국 언론은 마라톤을 가난한 한국의 헝그리 스포츠로만 치부하지 않았다. 한국인은 빠른 두뇌 회전과 유쾌함 때문에 동방의 아일랜드인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으며 키는 작지만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스포츠를 매개로 한국인의 민족적 특징이 최초로 서구 언론에 등장했던 사례였다.

미국 이상으로 한국의 보스턴 마라톤 대회 석권에 관심을 표명한 국가는 일본이었다. 한국 선수단이 귀국하는 중 일본에 들렀을 때 공항에서부터 일본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이어졌다. 함기용은 당시 일본 기자들에게 "한국이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낸 이유는 정신력에 있다. 또한 동양인은 마라톤에 적합한 체격과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1, 2, 3위를 석권한 한국 선수들(왼쪽부터 송길윤, 최윤칠, 함기용) ⓒBoston Globe, 1950년 4월 20일.

한일 마라톤 역사의 분기점 된 195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1950년 6월 25일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 마라톤은 휴식기를 맞는 듯 했다. 하지만 전시 한국정부의 배려로 마라톤 선수들은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을 비롯한 마라톤 선수들은 온천으로 유명한 동래에서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목표는 한결같았다. 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마라톤으로 희망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195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하지만 대회를 주관하는 보스턴체육연맹의 월터 브라운 회장은 한국 선수들의 참가를 승인하지 않았다. 브라운 회장은 "수많은 미군이 한국을 위해 참전해 목숨까지 앓는 상황에서 한국 마라토너가 군 입대를 면제 받고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4월 19일에 펼쳐질 예정이었던 보스턴 대회를 목표로 합숙훈련 중이었던 최윤칠은 이 결정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지난 해(1950년)에 우리가 1, 2, 3위를 석권한 게 실수였다"고 말했다. 보스턴체육연맹의 결정에는 한국 마라톤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의심이었다.

브라운 회장이 한국 선수들의 보스턴 대회 참가를 거절한 진짜 이유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1951년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한 1·4 후퇴 이후 연합군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의 전황이 심각하게 전개됐고 이 와중에 미국의 해리 트루만 대통령이 한국전쟁에 원자폭탄 사용까지 고려했다는 점은 브라운 회장의 결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제적인 측면도 브라운 회장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농구, 복싱 등 경기가 펼쳐졌던 다목적 경기장 보스턴 가든을 운영했던 브라운 회장에게는 한국전쟁이 악재였다. 미국 정부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해야 했고 이에 따라 미국의 소비심리는 한국전쟁 기간 중에 악화됐다.

한국 마라토너가 출전하지 못한 195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는 일본이 참가했다. 이미 1년 전 국제육상연맹에 가입한 일본은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위한 조직까지 만들었다. 195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일본 마라톤 역사의 분기점이 됐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다나카 시게키가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은 보스턴 마라톤 대회 남자부문에서 무려 9번이나 우승을 획득하며 마라톤 강국으로 부상했다. 반면 한국 마라톤은 이로부터 40여년이 흐른 뒤에야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하게 됐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2001년 이봉주가 보스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마라톤이 비로소 부활했다. 한 마디로 1951년을 기점으로 일본 마라톤과 한국 마라톤의 힘의 균형이 일본 쪽으로 쏠리게 된 셈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1951년 보스턴 대회에 참가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1951년 10월 최윤칠은 광주에서 펼쳐진 대회에서 2시간 25분 15초의 비공인 올림픽 마라톤 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이 해에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아직도 한국 마라톤계가 1951년의 상황을 아쉽게 생각하는 이유다.

▲ 1951년 한국 선수단의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을 금지시켰던 월터 브라운 보스턴 체육연맹 회장. ⓒBostoncelticshistory.com

북에서 내려온 축구 유망주, 혹은 '빨갱이'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축구는 계속됐다. 그 중심에는 최대 적산(敵産) 기업인 조선방직이 존재했다. 당시 조선방직의 본사는 부산에 있었고 대구에도 공장이 있었다.

1951년 조선방직의 강일매 사장은 부산과 대구에 각각 축구팀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흩어졌던 축구 선수들을 모아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참가시키기 위해서였다. 흥미롭게도 대구 조선방직 축구팀에는 한국전쟁 중에 남으로 내려온 월남(越南)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1951년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 전쟁고아 구제를 위해 마련된 대회에서도 역시 우승을 거머쥐었다.

당시 언론은 대구 조선방직을 월남인이 중심이 돼 박력 있고 공격적인 축구를 하는 팀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조선방직에서 뛰고 있는 월남인 축구 선수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 남하했던 이 선수들은 '빨갱이'로 의심받는 경우 허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축구 실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들은 언제든 '빨갱이 사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들에게 구세주는 특무대였다. 특무대는 공산당 색출이 임무였기 때문에 이들이 더 이상 빨갱이로 의심받지 않고 축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안식처였다. 더욱이 특무대 대장(隊長) 김창룡 소장은 이들과 같은 월남인이라 북에서 내려온 축구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특무대를 이끌었던 김창룡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잡는 일본 관동군 헌병이었다. 그는 해방 공간에 이북에서 친일 전범으로 몰렸지만 월남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때부터 그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입대한 후에는 공산당을 잡는 일에 집중했다. 그는 여수·순천 사건 이후 군에서 공산당 색출 바람이 거세게 불 때 큰 공헌을 했다. 이를 계기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김창룡은 1951년에 특무대장이 됐고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다.

이승만 정권에서 군 장성들 간의 파벌 경쟁이 극에 달한 상황에 축구 경기는 이들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특히 군대 내에서 정보와 감찰 업무를 수행했던 특무대와 헌병사령부 간의 축구 경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더욱이 김창룡은 갑작스러운 승진으로 다른 군 장성으로부터 견제를 심하게 받고 있었다. 김창룡은 축구로 다른 군 장성들을 제압하고 싶어 했다. 김창룡은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신조로 선수들을 다그쳤고 선수들은 승리를 향한 집념으로 똘똘 뭉쳤다. 하지만 특무대 축구팀의 선수들과 김창룡은 승리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1953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대구에서 펼쳐진 이 경기에서 특무대와 조선방직은 무승부를 기록했다. 결국 추첨으로 우승 팀을 가려야 했다. 추첨 결과 우승은 조선방직이었다. 이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창룡은 지프차에 탑승한 채 경기장에 난입해 공포탄까지 쏘며 결과에 거세게 항의했다. 주심은 이에 깜짝 놀라 진해까지 줄행랑을 쳤고 우승 팀을 확정 짓지 못한 채 대회가 막을 내렸다.

그라운드에서 일군 '38 따라지' 성공 신화, 그 배경에는…

특무대는 그라운드의 폭군이었지만 축구 실력은 뛰어났다. 1954년 한국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도 특무대 소속 선수들의 활약이 컸다. 최정민과 박일갑이 그 주인공이었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남쪽으로 내려온 두 선수는 힘과 스피드를 앞세워 한국 축구의 새 바람을 일으켰고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에서 빛을 발했다.

최정민과 박일갑의 스피드는 한국 축구의 특장점이었던 '킥 앤 러시' 스타일에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궂은 날씨 때문에 진흙탕에서 펼쳐졌던 일본과의 예선 1차전 경기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일본과의 경기에는 두 선수 외에도 4명의 월남인 선수들이 대활약을 했다. 이들은 귀국길에 지프차에 나눠 타고 경무대까지 행진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를 나눴다. 월남인 축구 선수들은 이 순간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38 따라지'에서 '축구 영웅'으로 변신했다. 축구는 월남인들이 이남에서 가장 먼저 성공 신화를 만든 분야 중 하나였다. 월남인 축구 선수들은 한국전쟁 시기에 남쪽으로 내려온 '38 따라지'들에게 희망봉이었다.

월남인 축구 선수들의 활약으로 한국은 1956년과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2연패를 차지했다. 이들 가운데 최고 스타는 '아시아의 황금 다리' 최정민이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북한 축구 대표선수가 됐다. 1·4 후퇴 때 남하해 한국 축구 황금기를 만들었던 그는 이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얻으며 당시 아시아 축구 중심지였던 홍콩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에 그와 대다수 월남인 축구 선수들이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한국 축구는 암흑기를 맞이했다.

▲ 한국전쟁 시기에 월남해 1950~60년대 한국 축구 최고의 스타로 부상했던 최정민 ⓒ나무위키

월남인 축구 선수들이 다시 한 번 한국 축구의 중심에 서게 된 건 1967년이었다. 1966년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른 북한 축구를 의식해 중앙정보부의 후원 하에 생겨난 축구단 '양지'는 군대에 복무 중인 우수한 축구 선수들을 모두 선발했으며 아직 입대하지 않은 선수 가운데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도 군대에 입대 시킨 뒤 영입했다.

여기에는 북한 축구를 제압한다는 일념으로 이 팀을 열성적으로 지원했던 이북 출신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역할이 컸다. 그는 양지 팀의 감독과 코치에 월남인 축구 선수였던 최정민과 박일갑을 각각 선임했다. 당시 양지 팀에서 가장 돋보이는 선수는 향후 최정민의 후계자가 되는 골잡이 이회택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 도중 남하한 월남인이었다. 축구 반공주의의 상징이었던 양지 팀에서 이처럼 월남인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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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프레시안> 스포츠 전문기자 시절, 스포츠와 사회·문화·역사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에 주목했던 언론인 출신 학자다. 이후 축구의 본고장 영국으로 건너가 드몽포트대학교에서 '남북한 축구사'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야구의 나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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