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 150m 한평 남짓, 그녀가 차별 피해 올라간 곳

[인터뷰] 타워크레인 조종사 박미성 씨

1908년 미국 뉴욕 한 피복회사의 열악한 작업장에서 146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불에 타 죽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분노한 여성노동자 1만5000명이 1908년 3월8일 뉴욕 한복판에 모여 여성 노동자들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외쳤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 바로 3월 8일, 세계여성의날입니다.

현재를 사는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어떨까요. 통계청이 발표한 '2022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의 통계를 살펴보면, 2021년 여성 고용률은 51.2%, 남성 고용률은 70%입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평균(61%)보다 한참 낮은 수준입니다. 또한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OECD 가입을 했던 1996년부터 26년째 1위라는 불명예를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1년 기준 성별임금격차는 31.1%로 남성이 100만 원을 받을 때 여성은 68만 9000원을 받는 셈입니다.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편견과 차별까지 견뎌야만 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프레시안>이 만났습니다. 특히 여성 노동자가 적은 '남초 직군'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은 여성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일터는 각기 달랐지만, 이들이 느낀 차별과 편견은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철도 정비원, 화물차 기사, 타워크레인 기사, 조경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차별을 피해 도착한 곳은 상공 150m 높이의 타워크레인 조종실이었다. 한 평 미만의 좁은 공간, 소변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고공에서 여성은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 28년째 현역으로 건설현장을 지키고 있는 여성 타워크레인 조종사 박미성 씨의 이야기다.

크레인 위 조종실은 외롭고 위태로운 공간이다. 높이는 상공 60m, 높게는 150m에 이른다. 박 씨는 땅 밑의 동료들이 작은 점처럼 보이는 이곳에 홀로 앉아 기기를 조작해야 한다.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대부분을 하늘에서 보낸다.

1평도 안 되는 좁은 조종실에선 생리현상조차 사치다. 간식은커녕 물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여성 조종사는 더욱 그렇다. 오로지 집중, 자그마한 실수도 저 아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나마 돌풍이라도 불면 아찔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런데 40년 넘게 노동자로 살아온 박 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비율 5% 미만의 이 좁고 높고 외로운 조종실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차별 당하지 않는 일터를 찾았다"고 말한다.

"차별이 없는 곳을 찾다보니까 타워크레인을 하게 됐다."

대체가 힘든 고립된 전문직, 조종사가 가지는 일터 내의 특수한 지위가 도움이 됐다. 박 씨는 "거칠고 남성중심적인 건설현장에서 여성들은 더 얕보이거나 간섭에 시달리는 게 사실"이라며 "헌데 크레인 조종사는 혼자 일하기도 하고, 워낙 심적인 스트레스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직종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예우를 받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동자도 여성도 '예우' 받지 못하던 사회에서, 여성노동자 박 씨에겐 이 예우가 일종의 안식처였다. 80년대 처음 일터로 나와 방직공장을 다니던 시절에도, 주유소에서 탱크로리를 몰던 시절에도 남녀 임금차별은 박 씨의 일상이었다. 그 차별을 피해 버스기사로 취직했지만, 회사의 부조리에 할 말을 하니 회사는 "만만한 여성부터 잘라버렸다." 그렇게 차별을 피해 조종실에 도착한 게 28년 전, 1995년이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하늘 위에 마련한 자신만의 일터에도 여전히 불평등은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박 씨는 일을 시작한 처음 10년의 세월을 "도무지 사람 구실도 못하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성별을 떠난 노동의 문제였다. 비용절감의 굴레 속에서 기업은 조종사들에게 한 평의 여유도 허락지 않았다. 꼬박 20시간을 하늘 위 닭장 속에서 보낸 적도 있지만, 그에 대한 임금은 "형편없이 후려쳐"지곤 했다.

동시에 성별의 문제이기도 했다. 항상, 기업의 비용절감 기조는 같은 노동자 중에서도 소수자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왔다. 노동자 중에서도 "한줌밖에 안 되는" 여성노동자들을 위해선 그 어떤 기업도 돈을 쓰려하지 않았다.

박 씨는 "조종사들에게 가장 민감한 화장실 문제만 해도 신체 구조상 여성들은 더 불리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라며 "결국 누군가는 커튼을 치고, 누군가는 병이 될 때까지 참고, 누군가는 물 자체를 먹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여성 건설노동자의 화장실 문제는 땅 밑의 모든 현장에서도 악명 높은 이야기다.

"그래서 노조를 하기로 했다."

2006년 노동조합 조합원 활동을 시작한 그는 현재 전국건설노조의 부위원장이자 여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종사 현직과 노동·여성 투쟁을 병행하고 있다. 박 씨는 "노조는 사람대접 못 받고 살던 내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틀을 만들어 준 곳"이라며 "내가 경험했듯, 다음 세대의 노동자와 여성에게도 노조가 큰 울타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버스기사로 일하고 싶어 면허 학원을 알아보던 당시에도 박 씨에겐 울타리가 간절했다. "여자는 대형면허 안 된다"라며 박 씨의 학원등록 자체를 거부하던 남성중심적 현장에서 박 씨는 신문 한 면에 작게 실린 여성 버스운전수의 인터뷰 기사를 옷장 벽에 붙이고 꿈을 꿨다.

어느새 정년을 코앞에 뒀다. 노조 부위원장의 남은 임기는 2년, 현직으로서도 "아마도 다음 현장이 마지막일 것"이다. 박 씨는 이제 자신이 그 '신문 속 여성'이 되어주고 싶다. 자신을 보고 "또 다른 이들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먹을 수 있도록" 하나의 롤모델이 되고자 한다.

용기를 내고 싶은 모든 여성·노동자들에게 "내가 함께 하겠다"고 말하는 박미성 씨를 지난 7일 서울 대림동 건설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아래는 그와의 주요 인터뷰 내용이다.

▲근무 중 타워크레인에 오르고 있는 박미성 씨.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서울 대림동 건설노조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박미성

"차별 없는 곳을 찾다보니" 도착한 직업, 타워크레인 조종사

프레시안 : 먼저 본인과 본인의 일에 대해 소개해 달라.

박미성 : 민주노총 건설노조에서 타워크레인 조종사로 일하고 있는 박미성이다. 노조에서 부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상근직은 아니다. 지금도 현직에서 일한다.

프레시안 : 오랜 경력이다.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했나.

박미성 : 92년도에 기중기 면허를 따고 95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엔 타워크레인 면허가 따로 있지 않았다. 기중기 면허를 딴 이들이 알음알음 도제식으로 일을 배워 크레인에 올랐다. 그러다보니 일을 맡는 것은 결국 인맥싸움이 되곤 했다. 여성은 원체 소수기도 했지만, 이런 인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보니 기회를 잡기 힘들다고 들었다. 나는 주유소에서 일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분들이 당시 타워크레인 일을 하고 있어 비교적 수월하게 현장에 진입했다. 운이 좋았다.

프레시안 : 타워크레인 조종사가 된 계기가 있을까.

박미성 : 차별이 없는 곳을 찾다보니까 타워크레인을 하게 됐다. 80년도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린 나이에 사회에 불만이 컸다. 군사정권 시절 노동자들의 환경은 말도 안 되게 열악했다. 거기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추가적인 차별이 너무 심했다.

특히 임금차별이 굉장히 심했다. 개인 주유소에서 탱크로리를 몰 땐 '남성들하고 똑같이 임금을 맞춰 달라'고 수도 없이 말해봤지만 거의 들어주질 않았다. 임금차별을 피해 버스기사로 취직했다. 거기선 임금차별이 없었지만, 회사의 부당대우에 항의하자 회사는 여성노동자들을 먼저 잘라버렸다. 노동조합이 있긴 했지만 말뿐인 어용노조였다.

프레시안 : 조종사 일은 무엇이 달랐나.

박미성 : 타워크레인 조종사는 누구한테 간섭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나는 딱 그런 일을 찾고 있었고 말이다. 사실 건설현장에서 작업 지시가 굉장히 거칠다. 지게차 현장의 경우 아직도 '야!' '김씨!' 하는 식으로 고성과 호통이 빈번히 오간다. 이때 여성들은 간섭과 지시를 더 심하게 받는 편이다. 아무래도 남성이 중심인 현장에선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얕보이는 경향이 있고, '불편한 존재'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런데 타워크레인 기사들의 경우 기본적으로 위에서 혼자 일하기도 하고, 직업의 특성상 약간의 '예우'를 받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도 그렇다. 가령 건설현장에서 여성들은 보통 '아줌마'로 불리지만, 그래도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겐 '박 기사님' 이렇게 부른다. 안 그래도 높은 곳에서 일하는데 심적으로 안 좋게 하면 위험하지 않나. 조종사에게 영향이 생기면 혼자만 위험한 것도 아니고 현장이 다 위험해진다.

▲타워크레인에 오르고 있는 박미성 씨 ⓒ박미성

프레시안 :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위험하고 힘든 직업이라는 뜻도 될 것 같은데.

박미성 : 맞다. 조종실의 높이만 해도 보통 60m에서 높게는 150m까지 올라간다. 그 높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 수밖에 없다. 자격증을 따놓고도, 막상 몇 번 올라가 보면 공포를 못 이기고 일을 그만두는 분들도 있다.

프레시안 : 조종사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 불편함은 없는가.

박미성 : 노조의 영향으로 노동시간이 많이 단축됐다. 요즘 같은 경우 특별한 일이 없는 현장은 아침 7시에 출근한다. 조회를 마치고 마지막 화장실을 갔다 온다. 그대로 올라가서 이후로는 단조로운 하늘 위 노동이다. 오후 12시까지 일하고 내려와 점심시간 1시간 정도를 보낸다. 그리고서 다시 저녁까지 쭉 올라가서 일한다. 물론 바쁠 땐 점심시간에도 못 내려온다.

불편함은 당연히 크다. 운전석이 굉장히 좁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에 운전석만 달랑 있다. 좁은 것만으로도 불편하지만 일단 마음대로 소변을 볼 수 없지 않나. 여성들은 더욱 그렇다. 물 같은 건 먹지도 못한다. 조종실의 4면 중 3면이 유리인데, 옷을 갈아입으려 하든 볼일을 보려하든 여성기사들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부러 커튼을 쳐 놓는 기사들도 있다.

프레시안 : 불편도 불편이지만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개선되지 않는 건가.

박미성 : 그렇다. 현장엔 장비가 굉장히 많고, 현장에서 안전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다 검사받게 돼 있다. 그런데 운전석에 대해서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의자에 펑크가 나 있든 운전석이 얼마나 좁든 기업은 상관하지 않는다.

결국은 비용의 문제다. 노조 차원에선 단체협약을 통해 운전 공간을 키워보려 하지만 기업체들은 돈이 들어가니까 기사들의 처우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경우 수가 적으니 돈을 더 쓰기 싫어한다. 제도적인 보완 없이는 기업을 움직이기 힘들다.

프레시안 : 현장의 성비는 어떻게 되나.

박미성 : 건설노조 조합원 수가 지금 7만 명을 넘었다. 타워크레인 조종사는 2300명 정도 된다. 그중에서 따지면 여성의 수는 성비라고 표현할 정도도 못 되는 것 같다. 5% 미만으로 본다.

▲조종실 안에서 기기를 조작하고 있는 박미성 씨 ⓒ박미성

"사람 구실 못했던 10년 … 땅 밑에도 하늘 위에도, 노조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 노동조합 이야기가 나왔다. 현재는 건설노조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계신데, 노조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

박미성 : 95년에 일을 시작해서 10년은 비조합원으로 일했다. 2006년도에 노조에 가입했는데, 비조합원으로 보낸 10년은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던 때라고 생각한다. 기업이 비조합원을 그렇게 대했다. 남자든 여자든 똑같았다. 노동시간이 많이 단축됐다고 했지 않나. 당시엔 새벽 5시부터 조종실에 올라 밤 9시 10시가 다 돼서 내려오는 게 일상이었다. 어떤 때는 다음날 새벽 1시까지 하늘에서 일했다. 장시간 노동에도 임금은 형편없었다.

그런 형편임에도, 비조합원은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는 존재가 비조합원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상여금을 아끼기 위해 비조합원이 잘려나갔고, 경력이 1년이 다 되어 가면 또 잘렸다. 나는 보호 받기 위해서 노조로 갔다. 현장에서 조합원들이 얼마나 힘들게 싸우고 있는지 아니까, 그게 미안해서 나도 (노조 활동을) 하겠다고 동참한 부분도 있다. 말하자면 노조는 내 일터의 '울타리'였다.

프레시안 : 노조 내에서 여성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여성노동자에게 노조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도 있을까.

박미성 : 당연히 있다. 여러 일터, 여전히 성차별이 심하지 않나. 기업의 부당처우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건설현장에는 60대 이상의 고연령 남성들이 많다. 그분들에겐 기존의 남녀 관념이 굉장히 심하게 고정돼 있다. 노조가 그 생각을 조금씩이나마 바꿔주는 일을 하고 있다. 가령 민주노총 내부에선 성평등 강사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조합원이 성평등 강사 자격을 이수해 내부에서 성평등 교육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또 성차별이나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건을 조사하고 징계절차를 밟는 것도 노조의 일이다.

프레시안 : 타워크레인 조종사는 성별을 떠나 예우를 받는 편이라고 하셨다. 땅 밑의 사정은 다른가.

박미성 : 다르다. 얼마 전만 해도 노조 여성 수련회를 갔다 왔는데 깜짝 놀랐다. 원청 직원들이 현장 가까이에 화장실을 지어놓고는 여자화장실 문을 잠가버렸다는 거다. 직원 전용이라고, 현장 작업자들은 저 밖에 멀리 있는 지저분한 화장실을 가라고 했다고 한다. 현장에선, 특히 여성노동자들에겐 화장실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화장실에 물 좀 넣어달라고 하는데 그 몇 푼이 아까워 거부당한 사례도 있다. 코로나 사태 당시였다. 위생과 직결된 문제다. '한줌밖에 안 되는 여성노동자를 위해 돈 쓰긴 싫다',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다.

휴게소 문제도 크다. 현장엔 여성휴게소가 따로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름엔 힘들고 하니 쉬어야 하지 않나. 한 여성노동자가 휴게실이 없으니 현장 바닥에서 잠깐 쉬다가, 그대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위로 지게차가 지나갔다.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그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현장에선 옷 갈아입을 공간도 없기 때문에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속옷 바람으로 환복을 한다든지, 더운 날씨에 아예 이중으로 옷을 입고 출근을 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서울 대림동 건설노조 사무실에 붙어있는 '여성 건설노동자를 위한 건설현장 개선' 포스터 ⓒ프레시안(한예섭)

프레시안 : 노동자 내부 분위기는 어떤가, 동료 간에 벌어지는 직장 내 성차별은 없나.

박미성 : 밑에서 일하는 토목·건축분과에선 여전히 많다고 들었다. 가령 해당 분과 같은 경우는 20~25명 정도가 한 팀으로 일하는데, 남성들만 있는 데서는 말도 거칠고 편하게 생활하시다가 여성 하나 끼면 '불편해진다', 이렇게 보는 거다. 말도 조심해야하고 옷 갈아입는 것도 조심해야하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여성이 불편한 존재로 취급된다. 또, 아까도 말했듯 현장 여성노동자들은 이름이 아닌 '아줌마', '이모'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노조 내부에선 최근 '이름 부르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작업모에 이름을 크게 붙여서 '아줌마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는 거다. 타워크레인의 경우 사정이 좀 다른 편이고, 특히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 일에 진입해 같이 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그런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 편이다.

프레시안 : 평등한 일터가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박미성 : 평등은 원칙이다. 내가 여성이건 남성이건 상관이 없는 문제다. 남성들 중에도 힘이 없고 약한 분들이 있다. 건설현장에 유리한 분들, 그러니까 힘이 센 분들만 평등을 누릴 자격이 있다면, 아닌 사람들은 다 없어져야 하는 거다.

힘 약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여자인 사람... 모든 걸 떠나서 인간으로서의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말'을 해야 한다. 흔히 '파장'이 인다고 하지 않나. 내가 말함으로써 물가에 돌을 던지는 거다. 이건 불합리해, 이건 불평등해, 그러니 평등하게 고치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게 중요하다. 당사자가 말하기가 여의치 않다면? 옆에서라도 말해줘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나아진다.

프레시안 : 대신 말해주는 존재, 그게 노조일까.

박미성 : 맞다. 노조가 하는 일이 그것이다. 평등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자고 하는 것. 그게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7일 서울 대림동 건설노조 사무실에서 <프레시안>과 만난 박미성 씨 ⓒ프레시안(한예섭)

"당신이 도전할 수 있게, 내가 당신의 기사가 되겠다."

프레시안 : 노조가 버팀목이자 울타리라고 했다. 일터 내 소수인 여성노동자로서, 여성동료들의 존재 또한 그럴 것 같은데.

박미성 : 당연하다. 서로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는 효과가 크다. 경기남부 여성기사 31명이 있는데 우리끼리 자주 모이고 논다. 이제 막 들어오는 여성들에겐 선배로서, 언니로서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전국 타워크레인 기사들도 가끔 모이는데, 수련회라도 하면 서로 끌어 안고 난리다. 대화도 하고, 안 좋은 점을 토로하기도 하고. 그런 모임은 중요하다.

프레시안 : 올해도 세계 여성의 날이 왔다. 동료와 후배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박미성 :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생각하는 게 있다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자.'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물어보라.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도와줄 수 있다. 미리 도전한 언니들이 있다. 나도 여기에 있다.

프레시안 : 본인에게도 그런 '언니'가 있었나.

박미성 : 버스기사 일을 하려고 대형 운전면허를 딸 때, 운전면허 학원에 전화해보니 "여성은 안 된다"더라. 그래서 전화기를 놓아버린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아침마다 신문을 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우연히 서울 시내버스 여성 운전기사님을 인터뷰한 작은 기사를 발견했다. 크지 않은 기사였다. 그 기사를 오려서 옷장 속에 붙였다. 그 기사님을 보면서 '할 수 있구나' 했다. 그리고 실제로 했다. 기사님이 누군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분을 보면서 여태껏 이런 일에 도전해왔고, 이제 정년을 앞뒀다. 그 분은 내 은퇴 후의 목표가 됐다.

프레시안 : 다른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 은퇴 후 목표인가.

박미성 :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렇다. 누군가 나를 보고 '나도 저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거 좋아보인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현직으로서도 노조원으로서도 그렇다. 하겠다는 분들이 있으면, 혹은 하고 있는데 어려운 분들이 있으면, 언제나 내가 함께 도와주고 싶다. 그게 노동자로서의 내 마지막 목표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의 일은 즐거웠나.

박미성 : 하늘 위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전경을 보며 멋지게 일했다. 평택 미군부대 관사를 지을 때 본 풍경이 생각난다. 끝없이 펼쳐진 논에 봄바람이 불더라. 봄에, 파란 벼들이 춤추는 모습은 황홀했다. 그런 광경을 보며 계절을 몇 번이고 보내왔다. 이 위에서 힘들었고, 화도 났고, 저항도 해봤다. 그저 먹고 사는 일로만 생각했다면 이렇게 오래 못했을 것이다. 즐거웠느냐 묻는다면,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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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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