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감세' 트러스 역대 최단 영국 총리 불명예…차기 총리는 '또 존슨'?

감세안 파문 수습 못하고 45일만에 사임…유럽 언론 "영국 정치 혼란 뿌리는 브렉시트"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재임 45일만에 사임 의사를 밝히며 역대 최단 기간 재임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야당에선 조기 총선 요구가 나오지만 지지율이 낮은 집권 보수당은 당내 경선을 통한 새 총리 선출 방침을 고수 중이다. 차기 총리로는 불과 지난 달 퇴임한 보리스 존슨 전 총리까지 거론되는 등 영국 정치가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다. 유럽 언론들은 영국 정치 혼란의 근원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라고 지적했다.

영국 BBC 방송 등 현지 매체는 20일(현지시각) 트러스 총리가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6일 총리직에 오른 뒤 불과 45일만이다. 트러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치솟는 에너지 비용을 언급하며 "나는 경제적, 그리고 국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에 취임했다"며 "이 상황을 바꿀 사명을 갖고 보수당에 의해 선출"됐지만 "사명을 이행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며 사임 이유를 밝혔다. 트러스 총리는 이날 앞서 보수당 경선을 담당하고 있는 평의원 모임 '1922 위원회' 의장 그레이엄 브래디를 만나 새 당대표 선출에 대해 의논했고 다음 주 안에 보수당 내 경선을 통해 새 총리가 선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러스 총리는 새 총리가 결정될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겠다고 덧붙였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 7월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중 모임을 가졌다는 이른바 '파티 게이트' 및 성추행 전력을 가진 인사를 요직에 앉힌 것이 밝혀져 퇴임한 뒤 진행된 한 달 여 간의 보수당 경선을 통해 선출됐다.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은 집권당의 대표가 총리가 된다. 취임 직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해 거의 2주일 간 애도 정국이 이어졌고 이후 사실상 첫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던 지난달 23일 감세안 발표가 총리직 사임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소득세 최고 세율을 인하하고 전 정부가 공약한 법인세 인상 계획을 철회하는 내용이 포함돼 '부자감세'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킨 감세안은 에너지 비용 보조를 비롯해 정부 지출이 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땅한 자금조달책 없이 발표돼 시장 혼란을 야기했다. 투자자들이 영국 경제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며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했고 채권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영국중앙은행(BOE)의 시장 개입까지 야기했다. 국제금융시장에도 파장이 미치며 국제통화기금(IMF)이 이례적으로 영국 정부의 감세안에 대한 우려를 표명해 체면을 구기기도 했다. 이후 트러스 총리는 한 발 물러서 대부분의 소득세 감세안을 철회하고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해임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지지율은 10%로 곤두박질쳤고 보수당 내에서 사임 여론이 빗발쳤다. 이어 19일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 사임은 지난 7월 존슨 전 총리 사퇴를 촉발한 내각 장관들의 줄사퇴를 연상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하루 뒤인 20일 트러스 총리는 결국 사임 의사를 밝혔다. 트러스 총리의 재임 기간은 사실상 45일에 불과해 1927년 취임 119만에 사망한 조지 캐닝 총리 이후 역대 최단 기간 재임한 영국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야당은 즉시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노동당 대표 키어 스티머는 "국민의 동의 없이 돌려 막기 방식으로" 재차 총리가 선출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21일 게재한 긴급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63%가 조기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기 총선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이 총리에게 있고 하원에서 조기 총선이 투표에 부쳐지더라도 의석 과반 이상을 보수당이 점유하고 있어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더구나 노동당에 비해 지지율이 뒤처진 보수당이 정권을 상실할 수 있는 조기 총선에 응할 유인은 거의 없어 보인다. 지난 10~11일 실시한 유고브 여론조사를 보면 노동당 지지율은 51%, 보수당 지지율은 23%로 노동당이 보수당에 비해 2배 이상 높은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다음 총선은 2025년 1월에 예정돼 있다. 

차기 총리로는 트러스 총리를 선출한 지난 보수당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한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과 3위를 한 페니 모던트 하원 원내대표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수낙 전 장관은 지난 7월 내각 줄사퇴의 시발점이 되며 존슨 전 총리의 사임을 이끌어 냈지만 이 때문에 존슨 전 총리 지지자들에게 미움을 사며 지난 경선에서 고전했다. 트러스 총리의 퇴임을 촉발한 감세 정책에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는 점은 재정 부문에서 그의 신뢰를 높이는 요인이다. 다만 인도 재벌가 출신 배우자가 해외소득 관련 세금을 내지 않아 논란이 된 점 등은 걸림돌이다. 모던트 원내대표는 이번주 초 의회에서 트러스 총리를 대신해 긴급질의에 응하며 단숨에 당 내 지지를 끌어 모았다. 모던트 원내대표는 2019년 영국의 첫 여성 국방장관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존슨 전 총리의 복귀에도 관심이 모인다. 존슨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나딘 도리스 의원은 트러스 총리 퇴임이 발표되자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영국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단 한 사람"인 "보리스 존슨의 복귀를 하원 의원들이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BC는 일주일 안에 새 총리를 선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인물이 부상하기는 어려우며 존슨 전 총리가 여전히 당 내부 및 일반 당원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뉴욕타임스>(NYT)는 파티 게이트 등 일련의 문제 뒤 퇴임한 존슨 전 총리의 복귀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소셜미디어에서 일부 지지자들이 '존슨을 돌려내라(#BringBackBoris)'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에선 1951년에 윈스턴 처칠 전 총리, 1974년 해롤드 윌슨 전 총리가 총리직에 재차 오른 바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존슨 전 총리의 측근들이 그가 재출마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이번 사태를 지켜 본 유럽 언론들은 영국의 정치적 혼란이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에서 비롯됐다고 평가했다. <가디언>을 보면 독일 공영방송 ARD의 런던 특파원인 아네트 디털트는 영국 정치의 "광기"가 브렉시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를 지속적으로 혼란시켜 추가적인 시장 혼란을 감당할 여력을 빼앗았다고 봤다. 프랑스 언론 <르몽드>도 "어떤 다른 EU 회원국도 이 지경에 놓여 있지 않다"며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영국 정부는 브렉시트가 주권 회복과 제약 없는 자유라는 약속의 땅에서 영국을 더 멀어지게 할 뿐이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재능으로 보여줬다"고 냉소했다.

▲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20일(현지시각) 런던 총리 관저 앞에서 사임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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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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