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항쟁, 북간도 용정의 학살을 넘어 항일 무장 투쟁의 씨앗이 되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광복 80주년 특별 기고 ①한국 근대 민중운동의 기원 3.1 항쟁

80년 전, 마침내 해방이 왔고 식민지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내달렸다.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을 질주하던 일본제국은 동력이 끊긴 기계장치처럼 주저앉았다. 폐허가 된 반도와 그 반도를 꿈에도 잊지 않았던 사람들은 새 조국을 만들겠다는 열정에 휩싸였다. 이 거대한 에너지의 기원은 1919년에서 시작된다.

민중은 무한한 잠재력으로 역사적 전환을 여러 차례 이루어냈다. 1960년 4.19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렸고 80년 5월 광주 항쟁은 피로써 민주주의 불씨를 지켜냈으며 마침내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 문을 열었다. 민주주의를 지켜낸 민중들은 21세기를 관통하며 위기 때마다 촛불을 들었고 마침내 내란의 거대한 음모도 분쇄시켰다.

한국 근대사 속 민중 항쟁은 그 중요성과 우열을 가릴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항쟁의 뿌리에는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있다. 단순히 기미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3월 항쟁이 우리 역사와 한반도, 그 주변 민초들의 삶에 끼쳤던 엄청난 영향을 다 조명할 수 없다.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미래 없는 암흑 속 식민지 조선 민중들에게 반도 땅의 독립 정신은 죽지 않았음을, 일제를 몰아내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강렬하게 새겨넣은 것이 3월 항쟁이었다.

3월 키드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고 이들은 반도와 중국, 러시아, 아메리카,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독립운동의 전사로 성장했다. 3월 항쟁은 연해주와 북간도, 상해 곳곳의 조선인들 가슴을 뜨겁게 데워 앞다투어 독립운동조직을 만들게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3월 항쟁의 결과물이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시내에 울려퍼졌던 조선독립만세의 함성과 이를 진압하는 일제의 만행은 경성역에서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에 의해 전국 각지로 퍼져 만세운동 확산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북간도 용정은 조선과 다를 바 없는 땅이었다. 1860년대 함경도 일대의 대기근 속 이주해 자리 잡은 이들은 1차 대 이주 때 조선 땅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1910년 조선이 망하자 2차 대 이주가 시작되었고 용정, 연길, 훈춘 등 간도의 많은 도시들에 조선 사람들이 자리 잡았다.

용정의 조선 사람들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만으로도 힘에 부쳤지만 너나 할 것 없이 학교를 세웠다. 이상설과 그 동료들은 신학문 교육기관 서전서숙을 세웠다. 일본 총영사관의 방해와 압박에 폐교된 서전서숙을 이은 학교가 명동촌 명동학교였다. 근대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신학문을 커리큘럼으로 했던 명동학교는 독립정신을 키우는 전당이 되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항일의 각오를 키웠고 마침내 경성에서의 3.1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행동에 나섰다.

▲민족교육 1번지 용정 명동촌에 복원된 명동학교. ⓒ박흥수

1919년 3월 10일 용정의 영신, 명동, 정동 학교와 국자가 도립중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은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거리 곳곳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3.1 무력 진압을 규탄하는 선전물을 뿌렸다. 3월 13일 아침 명동 학교 교정에는 용정의 학생과 교사들이 모였고 깃발과 플래카드를 앞세워 용정 시내를 향해 행진했다.

2025년 여름, 복원된 명동학교 건물과 앞마당은 제비들의 한가한 날개 짓 만이 수를 놓고 있었다. 윤동주의 집에서 천천히 3분 정도 걸어 민족교육 1번지로 자부하는 교정을 만났다. 옛 함성이 시간의 터널을 건너와 들리는 듯 했다.

학생들의 행진 대열은 함께하는 동포들이 모여듦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어났다. 대회장인 서전벌은 서전서숙이 있던 자리였다. 3만여 명이나 되는 인파가 집회장을 발디딜 틈 없이 메웠다. 조선사람들은 감격했다. 위축되고 눈치보던 일상에서 처음으로 목놓아 조선독립을 외치니 어찌 후련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대회를 마치고 행진이 시작됐다. 학생들이 앞장서 대열을 이끌고 일본 영사관을 향해 당당하게 걸었다.

일본 영사관 앞에는 조선인들의 기세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중국 군경이 영사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일본 영사는 진즉부터 중국 당국에 압력을 넣고 있었다. 대열의 선두가 일본 영사관 정문에 당도하자 영사관을 수비하는 중국 경비병들과 일본 헌병들은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곳곳에서 피가 튀고 동포들이 쓰러졌다.

▲용정 3.13 만세시위 중 학살당한 동포들의 묘지. ⓒ박흥수

조선 독립의 열망으로 뜨거웠던 사람들의 가슴은 분노로 가득찼다. 용정 일본 영사관 앞 3.13 학살 사건은 항일투쟁의 진로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맨 손으로는 안 된다! 무기를 들자!! 항일무장투쟁의 필요성이 간도 일대를 휩쓸었고 너도나도 조직과 단체를 구성해 일본에 대한 복수를 별렀다.

3.13 학살 다음 해인 1920년의 북간도 일대에는 묘한 분위기가 돌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무심한 듯 하면서도 이를 갈고 있었고 일본군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경신년 새해가 밝아온 며칠 뒤인 4일 대형 사건이 터졌다.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지점으로 전달되던 15만 원이 사라진 것이다. 이 돈은 길회(길림-회령)철도 부설자금으로 현재 가치로 따지면 150억 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조선 땅 회령에서 두만강을 넘어 강을 따라 좌측으로 가다가 북으로 방향을 틀어 계곡 사이 길로 들어서면 용정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긴 계곡이 끝나는 동량촌 입구에서 밤새 기다리던 항일무장조직 철혈광복단 6명의 전사들은 은행의 돈을 수송하는 기마대를 습격했다. 조선은행 용정지점 사무원 김홍섭이 알려준 정보는 정확했다. 현장을 떠난 뒤 확인 한 가방 안에는 15만 원이라는 거액이 들어있었다. 최신 무기로 수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큰돈이었다. 일본군과의 일전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변변한 무기가 없어 한이 맺혔던 항일무장대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돈이었다.

▲조선 회령에서 용정으로 이어지는 길. 길가와 언덕위에 15만 원 탈취사건 현장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있다. ⓒ박흥수

프라하 거리의 은비녀

철광 단원 최봉설은 동지들과 함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에 은거지를 마련하고 무기구매에 나섰다. 1920년 러시아는 내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끈 혁명은 반혁명이란 거센 역류를 만났다. 혁명세력에 반대하는 구체제의 군대가 백위군으로 저항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는 군대를 파병해 혁명군과 싸우거나 백위군을 지원했다.

이런 연유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일본군이 진주해 있었고 일본영사관과 군은 한인촌을 눈에 가시로 여겼다. 블라디보스톡에는 또 다른 군대도 있었다. 바로 체코 군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 – 헝거리 제국은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체코의 젊은이들을 징집해 러시아 전선에 투입했다. 체코 병사들은 같은 슬라브 민족과 싸울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체코 병사들은 러시아 군에 투항한 뒤 체코 군단을 결성해 독일-오스트리아-헝거리와 전투를 벌인다.

이런 가운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레닌은 브루주아지들간의 전쟁에 민중이 총알받이가 될 순 없다며 독일과 강화를 맺고 1차 대전에서 빠져나온다. 체코 군단은 자신들을 식민지로 삼았던 적과 평화조약을 맺은 혁명세력을 규탄하며 계속 독일과 싸울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독일의 전선을 사라졌다. 체코군이 독일과 싸우려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과 함께 해야했지만 독일이 가로막고 있는 육로로는 갈 수 없었다.

체코 군단은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이 같은 대이동 과정에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붉은 군대에 무장해제 당한 체코군과 고향으로 가려는 군인들 역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여들었다. 체코군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백위파와 연합하여 혁명군과 싸웠지만 블라디보스톡의 조선인들에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식민지의 고통을 공유했기에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응원한 것이었다.

항일무장조직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들을 무기 구매 자금으로 내놨다. 돈이 될 것 같으면 무엇이든 팔았다.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소를 팔았고 여성들은 은비녀와 가락지들을 모아냈다. 가난한 만주의 이주민들이었지만 독립운동에 나선이들을 위해 민초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물건들을 바쳤다. 1920년부터 프라하 골동품 시장에는 은비녀와 가락지, 놋쇠 그릇 등 먼 동방에서 온 조선의 물건들이 선을 보였다. 모두 체코군과의 무기 거래 결과였다.

체코군이 주력 보병 소총으로 사용하는 모신나강 1정과 탄약 일천 발은 35원에 살 수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태리가 사용했으며 봉오동 전투의 독립군이 사용한 소총이 바로 이 모신나강이었다. 당시 노동자의 1년 임금은 35원 정도였으므로 1년치 노동의 대가를 모아야 겨우 총 한정과 탄약을 살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5만 원은 항일무장부대의 군사력을 일거에 혁신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은 독립운동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 한인촌 언덕 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이동휘가 살고 있었고 그 언덕 아래 한민학교가 있어 학생들이 신학문을 배웠다. 한민학교에서 내리막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쎄울스카야(서울거리)가 나온다. 이역만리 조국의 수도 이름을 거리로 내걸 만큼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너나없이 이 신한촌에 몸을 숨기거나 회의를 하거나 동지를 규합했다.

▲신한촌 서울거리 주소판을 달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옛 건물 ⓒ박흥수

15만 원을 탈취한 최봉설 일행은 이 한인촌 비밀 안가에 모여 체코군과의 무기 거래를 기다렸다. 무기 거래는 신한촌에서 명망이 높은 엄인섭이 나섰다. 최봉설 일행이 무기 거래가 잘 되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전달받고 안가에서 머물던 새벽녘에 갑자기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안중근과 이토 처단을 결의하고 홍범도와 친분을 자랑했던 엄인섭은 밀정이었다.

잠결에 습격당한 철혈광복단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체포되고 최봉설만이 어깨에 총상을 입은 채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최봉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동지들의 원한을 갚겠다며 최계립으로 이름을 바꾸고 항일무장투쟁에 평생을 헌신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