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당취
"손 교수, 당취가 뭔지 아세요?"
"아니요. 스님, 그게 뭐지요?"
"그럼 땡추는 아시지요."
"그럼요. 그건 땡중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헌데 땡추는 원래 당취를 조롱해서 부른 것이지요."
"아 그런가요?"
1990년대 초, 신륵사를 찾은 나에게 스님은 당취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취는 한자로 黨聚라고 쓰는데 일종의 스님들의 비밀결사입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침을 삼키며 들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조직인가요?"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일부에서는 고려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했던 신돈도 당취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예. 헌데 대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생겼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손 교수, 성계육이라는 말은 들어보셨나요?"
"아니요. 제가 상식이 별로 없어서요."
"성계육은 돼지고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 그래요? 헌데 왜 돼지고기를 성계육이라고 불렀지요."
"성계육이 이성계의 고기라는 의미에서 성계육(成桂肉)입니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은 뒤 주자학을 섬기면서 불교를 억압했지요. 이에 일부 급진적인 승려들이 이성계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것이 성계육입니다. 당취는 이 같은 조선조의 억불정책에 저항한 비밀조직인데 돼지고기를 성계육이라고 부르고 이를 먹었어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조선과 이성계 왕국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의식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를 본 일반인들이 '어~ 중이 돼지고기를 먹네. 저것들 땡중이네'라고 비하해서 부르게 된 것이지요."
"땡추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당취가 단순히 이성계 왕국에 대한 복수를 넘어서 미륵사상에 기초한 민중해방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요?"
"예. 이들이 사명대사 등 임진왜란 때 승병의 뿌리가 됐고요. 동학에도 불교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들이 당취였습니다. 손 교수, 서장옥이라고 들어봤어요?"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릅니다."
"서장옥은 일해대사라는 분인데 30년 불도를 닦은 승려에요. 헌데 동학에 관여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가르쳤고 동학 내에서 제일 먼저 봉기를 주장했습니다. 그가 당취로 그가 이끄는 당취부대가 따로 있어 김개남 장군 밑에서 싸웠습니다."
"흥미진진한 얘기네요."
"일제시대에도 '붉은 승려'라고 불리던 태허스님 김성숙 같은 분이 있었습니다. 금강산 유정사의 승려로 계셨는데 일제하에서 민족해방과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승려들과 의기투합해 북경으로 가서 사회주의운동을 했어요. 손 교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알지요?"
"당연히 알지요. 미국 유학시절 우연히 <아리랑>을 구해 읽었습니다."
"김산을 공산주의자로 만든 사람도 김성숙입니다. 책에는 김충창으로 나오는데 충창은 김성숙 선생이 독립운동하면서 사용한 여러 가명 중 하나예요."
"김충창은 기억나네요. 김충창이 김성숙이군요."
"맞습니다. 헌데 그도 당취였지요. 스님이었지만 조선공산당을 위해 일했던 한산스님도 당취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를 넘어서, 저는 이정 선생님, 이현상 등 조선공산당의 전위세력도 그 시대의 당취였다고 봅니다. 한국전쟁 뒤에도 당취는 사라지지 않았고요. 조선공산당이 처음 생긴 4월 17일에 매년 모이는 소수모임이 있는데, 이들이 일종의 당취지요."(스님과 이 같은 대화가 있은 지 몇 년 뒤 <토정비결>의 작가 이재운이 <당취>라는 대하소설을 발표했다.)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속으로 물었다.
"원경스님도 당취인가?"
55. 만기사
"제가 부르는 대로 새겨 넣어 주세요."
1995년 원경은 신륵사를 떠나 평택 만기사 주지가 됐다. 주지가 되자마자 원경은 가까운 석재상에서 석공을 불러 작업지시를 했다.
"뭐라고 새길까요?"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원경이 만기사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 것은 새로 돌기둥을 세우며 거기에 이 같은 문구를 새겨 넣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절 입구의 돌기둥 오른쪽에 '원수는 갚지 말고', 왼쪽에 '은혜는 갚아라'라고 새겨 넣었다. 30여 년 전 음독자살 시도 후 한산스님과 떠난 울릉도 여행에서 한산스님의 감동어린 역사 강의를 들은 뒤 김일성을 용서하며 복수심을 접었던 마음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나아가 절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그 같은 마음가짐을 갖도록 설복하기 위해서였다.
만기사는 신륵사와 마찬가지로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화성 용주사의 말사지만, 원경이 그동안 주지로 있었던 신륵사에 비해 역사, 규모, 신도, 예산 등 여러 면에서 비교가 안 되게 작은 절이다. 신륵사가 여주 남한강에 위치해 신도 이외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라면, 만기사는 평택 북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인 무봉산 산중에 위치한 작은 절로 관광객은 전혀 없고 신도수도 매우 적었다.
그래도 신라시대 창건한 신륵사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역사가 있었다. 고려 태조시대인 942년 창건하여 조선 세조 때 왕명으로 증수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대웅전에는 보물 제 467호로 지정된 철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스님, 신륵사처럼 큰 절에서 이리 초라한 절로 오셔서 마음이 좀 그러시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오히려 조용한 절로 들어와 수련도 하고 필생의 사업인 <이정박헌영 전집>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어 다행이지요."
이는 인사말이 아니라 원경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자신이 이곳에서 26년간이나 지내고 이곳에서 입적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경은 이곳에서 자기수련과 이정 기념사업에 많은 시간을 쓰기로 했지만, 타고난 추진력은 그를 가만히 있게 만들지 않았다. 특히 그가 오랫동안 쌓아온 인맥이 힘을 발휘했다. 손학규가 경기도지사가 되고 문화연구가인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문화재청장에 오르면서, 여러 지원을 해줬다.
원경은 절 입구에 엄청난 규모의 일주문을 짓고 절을 증축했다. 신도수가 많지 않은 만큼 장기적인 재정적 안정을 위해 절 뒤쪽에 납골당 비슷한 시설을 만들었다. 특히 <이정박헌영 전집> 등 이정 기념사업을 해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
신륵사와 달리 절이 아담하고 조용한 만큼, 7월 19일에 여는 박헌영 추모모임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잘 이루어졌다. 아침 10시 만기사에서 제사를 지낸 뒤 관광버스로 충남 예산의 박헌영 생가를 돌아보고 오는 것은 매년 이날의 일상이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경은 이곳을 아버지와 스승인 송담스님, 그리고 자신이 안식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문화재를 뒤져서 설계를 했다. 가운데에 이정 해원탑을 세우고 스승인 송담스님과 자신의 부도(승려의 사리를 넣는 사리탑)를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만들기로 했다.
아버지의 해원탑은 국보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101호) 모양으로 만들기로 했다. 앞에는 '이정박헌영지탑'이라고, 오른쪽 옆에는 '세계평화', 왼쪽 옆에는 '남북통일'이라고 써넣기로 했다. 스승님과 자신의 사리탑은 예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부도인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4호)을 따서 만들기로 했다. 이 탑들은 오랜 준비와 공사를 거쳐 2017년 완공됐다.
"스님, 절에 불이 났다면서요? 사람은 안 다쳤습니까?"
2020년 3월 만기사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님에게 전화를 했다.
"예, 요사채(승려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고 생활하는 집)에서 불이 났습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천만다행이네요."
"헌데 수십 년 간 모은 수 백 점의 그림들이 다 탔습니다."
"아이고, 그런 일이!"
"장욱진 등 꽤 돈이 되는 그림들인데…. 얼마 전 김세균 교수가 그림을 팔아 이정 선생님을 비롯한 한국 진보운동가들을 기념하고 진보정치의 미래를 구상하는 연구소를 만들자고 해서 좀 있다가 하자고 했는데…."
"그리 귀중한 것들을 왜 요사채에 보관하셨어요?"
"제가 절을 자주 비우니 도둑이 들까봐서이지요. 요사채에는 사람이 항상 있으니."
"너무 안타깝네요."
"'공수래, 공수거'인데요 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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