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통치 35년에도 '한국문제'는 존재했다"

[좌담] ①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영문판 출간한 구대열 교수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 병합조약으로 시작된 일제 식민통치는 1945년까지 무려 35년동안 이어졌다. 해외 국제정치사는 이 시기 '식민지 한국'과 '한국인'을 공백처럼 지우고 대수롭지 않게 건너뛰었다.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학술서 <Korea 1905-1945>(르네상스 북스)를 지난 4월 영국에서 출간했다. 제목처럼, 서양 학계에선 여전히 '관심 밖 주제'인 식민통치 기간 '한국문제'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지난 1995년 국내에 출간했던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1, 2>가 26년 만에 영문판으로 나온 셈이다.

우리에겐 '해방과 독립'이 곧 한국문제였다. 일제의 착취와 억압, 한민족의 저항이 독립운동사의 줄기다. 그러나 열강들의 외교사는 '한국의 독립은 현실정치 밖에 존재한다'고 피력할 정도로 냉담했다. 외교적 사료도 드물다.

이 간극에서 구 교수의 연구는 '국가는 사라졌지만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한국문제에 대한 열강들의 시각은 촘촘한 1차 자료 수집과 분석으로 실증했다.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이라도 외면해선 안 된다"는 학자적 관점에서다.

한일 병합조약부터 해방과 분단까지 40여 년을 10년 단위로 분류해 한반도 내외부 정세와 국제관계를 살폈다. 일제의 한반도 통치정책과 대륙정책을 비롯해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한국 정책을 망라했다. 영문판을 준비하며 한글판 출간 이후 공개된 외교문서들도 수집해 반영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베네데토 크로체의 명제를 강조하는 구 교수와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를 펴냈던 한승동 씨가 만났다. 도쿄 특파원을 지냈던 한 씨는 오랫동안 동아시아와 민족문제를 고민해온 언론인이다.

두 사람의 대담을 1, 2편으로 나누어 싣는다. 1편에선 구 교수 저서의 영문판 출간이 갖는 의미와 내용을, 2편에선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도 참여해 당면한 최대 관건인 한일관계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두루 짚어봤다. 편집자.

▲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영문판 출간한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한국 역사의 공백기, 그대로 남겨둬선 안 된다"

한승동 : 1995년에 냈던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1, 2>(역사비평사)를 올해 영문판 <Korea 1905~1945>(Renaissance Books)으로 냈다. 26년 만에 새로 낸 것인데, 어떤 취지에서 저술을 하게 된 것인지?

구대열 : 한국사에서 구한말 시대는 우리의 역사인지, 열강들의 한국 침탈사인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그래도 잘했건 못했건 조선과 대한제국이란 정부가 있었다. 그런데 1910년이 되면 일본 총독부가 이를 대신한다. 한국민과 한반도라는 영역은 그대로인데, 일본이 이를 다스리고 지배했으며 대외적으로도 대변했다.

역사적 서술을 봐도 총독부 정책 위주이고 한국인들의 항일운동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 시기는 한국 역사의 공백기이며 특히 국제적으로 한국문제는 '잊어버린 사안, 잊어버린 이슈(forgotten matter, issue)' 등으로 나온다. 국제정치학, 외교사학자로서 이 문제를 한번 정리하고 싶었다. 이 잊힌 시기를 결코 그대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신경을 썼다.

국내사적으로는 한국사회의 변화, 지도계층의 재편, 일본에 의한 경제개발에 대한 자율성과 타율성,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 등의 관점에서 많은 논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한국문제를 부각시키고 그 의미를 부여하려면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춰야 하나? 나는 역사의 연속성을 중요시 했다.

한국사, 특히 대외관계사가 마치 1910년에 끝났다가 1945년에 갑자기 다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문제는 국제적으로 항상 존재했다. 한국 이슈는 국제적으로 1910년 이후에도 35년 간 면면히 이어져 왔고 1945년의 한국은 바로 이 바탕 위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려면 한국문제의 구체적 내용으로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1970년대 영국 런던 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유학하던 시절에는 영국이나 미국의 외교문서 등 1차 자료에 기초한 일제시대 한국에 관한 연구 서적이 빈약해 어려움을 겪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치와 외교사에서 일제시대 '한국'은 연구대상이 아니었다. 이 시기 역사에 관해 정확하지 못한 해석도 난무했다. 해방 이후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자들의 발언들에는 자기들 주장과 업적만을 과대포장한 것이 많다. 외교문서나 일본 경찰조서, 재판기록 등을 살펴보면 바로 드러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한승동 :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기밀문서나, 미국의 기밀해제 문서들, 한국이나 일본, 중국에서 새로 공개되거나 유출된 새로운 사실들 가운데 이번 영문판에 반영된 것들도 있는지?

구대열 :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것들을 추가하기도 하고 수정한 부분들이 있다. 소련이나 중국은 수시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외교문서를 공개하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수집된 문서들은 영문판에 충분히 반영했다. 다만 미국은 20년, 영국은 25년 이후에 외교문서를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고, 내 연구주제와 관련해 새로이 공개된 문서들은 없었다.

학자는 단순히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환호작약하는 골동품 수집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발굴을 기초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역사적, 정신사적 맥락에서 사건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는 연구자가 학자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는 고독하게 한 문제에 천착해 의미를 찾는 창조의 직업인이다.

한승동 : 26년이라는 시차에 따른, 관점이나 문제의식에 변화가 있었나?

구대열 : 2003년경부터 나의 관심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구한말 외교사에서 '조선은 중국에 대해 왜 지나칠 정도로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한국인의 국제정치적 행위의 원형'이란 주제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정년을 맞은 해에 낸 <삼국통일의 정치학>으로 2011년 정치학회 학술상을 받았다. 정년 후에는 동북아재단으로부터 한국외교사 집필을 제안 받았다. 삼국시대를 포함한 고대, 고려, 조선, 근대 등 4권을 3년에 걸쳐 출간하는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가 이번 영문판을 내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기 됐다. 한국 역사에서 대외관계는 고조선 시대부터 놀라운 유사성이 반복된다는 점을 느꼈다. 그래서 원고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잘못 썼던 부분을 고치고 해석상의 문제들을 다시 생각했다. 1995년도 한글판에서 완전히 정리했다고 생각한 외교사와 독립운동사의 관계를 재검토하고, 지난 10여 년 간 이 시기에 관련해 새로 나온 성과도 체크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 역사,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도 외면해선 안 돼"

한승동 : '모든 역사는 현대사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의 말에 의하면,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는 현재적 관점, 현재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국제관계사와 열강들, 특히 미국·영국의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인식, 즉 '한국문제'에 천착한 이유는 무엇인지?

구대열 : 크로체의 말은 참 어려운 명제다. 사회현상이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사회 문제만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에서 소환하는 문제의식을 모두 포함한다. '통일'이나 '민주화', 최근 논란이 된 '백제' 등이 모두 그런 사례다. 많은 시간을 잊은 채로 살아가다가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오늘날 사회에 특수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를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편협한 시대정신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세대가 당면한 문제만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세대도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항상 가장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과거의 세대도 우리와 동일한 문제의식과 도덕적 딜레마를 가지고 자신들의 문제에 대응했다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지도록 정신의 자유를 일깨워야 한다.

일제시대 문제도 이런 태도로 접근해야 할 때가 됐다고 믿는다. 신채호 시대의 시대정신은 독립이었으며, 그는 한국사를 '독립'의 관점에서 민족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 그의 해석은 왕조시대에 볼 수 없었던 신선한 것이었지만, 이제 세계적으로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날의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만은 없다.

일제시대의 역사, 특히 대외관계에서 우리가 애써 잊고자 하는 부정적인 부분들이 많다. '한국인은 등뼈 없는 민족', '엉덩이를 차 봐라, 돌아서서 싸우면 일본인이고 슬슬 도망가면 한국인이다', '한국에서 개혁이란 각료들을 도축하는 것이다'(1884년 김옥균이 민씨 일파 등 척신들을 살해한 갑신정변에 대해 나온 말 : 편집자), '일본이 가져다준 문명의 고마움을 모른다'는 언급들이 서방국가들을 통해서 수없이 나왔다. 국제정치를 강대국들이 지배하고, 이들의 시각이 곧 한반도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기준이 되었다면,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이라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승동 : 이 책은 미국과 영국 등의 외교문서를 토대로 한 문헌연구 방식이다. 1차 자료의 방대한 수집, 번역, 정리, 해석이 매우 인상적이다. 독자로서, 열강들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독립)기에 한국과 한국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처리했는지에 관한 가장 풍부한 자료를 접했다. 교수님도 1차 자료 수집, 정리, 연구가 한국에선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하셨는데, 1995년에 이 책이 처음 출간된 뒤부터 영문판이 나올 때까지 26년 간 한국 외교사학 분야에 변화나 발전이 있었나?

구대열 :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한국의 관료적 풍토, 지적 풍토와 관련된다고 하겠다. 외국문서를 보면 연속성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1885년 경 영국의 한 외교관이 서울에서 함흥방향으로 여행한 기록을 남겼다. 그 후 다른 외교관이 1888년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면서 '1885년 OOO서기관의 여행기에 이어 이 글을 쓴다'는 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한국에 대한 지식이 이런 방식으로 축적된 것이다. 만주 정세에 관한 미국 보고서나 1920년대 한반도 정세에 관한 미국과 영국 보고서들에선 모두 이런 연속성이 느껴진다. 한국 외교관들의 보고서가 어떤지 자세히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선임자의 보고서들은 거의 무시될 것이다.

외교문서로 국한해 보자. 많은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대한민국에 관련된 문서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있다. 내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위탁으로 잠시 일하며 영국의 한국관계문서 중 기밀문서(Confidential Papers)와 1905~1910년 기간 일반문서를 수집했다. 한국의 다른 학자들도 개인으로 수집하거나 국회도서관 등 여러 기관에서 같은 문서를 복사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유학 후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에 근무하면서 외교문서 등 해외소재 한국관련 문서를 수집하는 기관들이 협의해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한승동 : 일본의 한국 병탄과 식민지배, 그리고 일본 패전 뒤 신탁통치 논란과 분단으로 가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주로 국내사정에 초점을 맞춰지다보니 외부환경이나 국제관계를 소홀히 해 온 연구풍토와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당대의 한국문제를 국제관계, 국제정치의 역학구조 속에서 좀 더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쪽으로 변화해야 할 텐데, 이런 경향이 일반화됐다고 보나?

구대열 : 한국문제 연구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 국가의 국제정치는 국내정치의 연장이다. 많은 학자들이 사회현상을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한다. 그러나 국내문제나 국제문제를 유기적으로 종합하려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연구자의 관심이 한쪽에 치우치면 다른 쪽은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향은 여전하다. 1905년~1945년 사이 한국문제를 국제적 시각에서 다룬 연구는 아직도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5년 이후의 해방정국이라 부르는 시기도 마찬가지이다. 국내문제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미국의 국내정치, 미국과 소련관계를 한반도에 투영하는 정도만 언급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서방의 외교사 전문 학자들도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소련이 루마니아 문제에서 양보하면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양보한다는 식으로, 우리와는 관련 없는 문제와 연계해 논의했다. 세계를 장으로 두고 흥정하는데, 한국의 위상이 무엇인가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 한승동 전 언론인 ⓒ프레시안(최형락)

"미소 양국은 해방군이자 점령군이었다"

한승동 : 한글판 서문에 1945년 당시 미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Edward Stettinius)가 국무부 관리들과 회의하면서 한국이 지도상에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다는 일화가 소개됐다. 스테티니어스는 1943년에 국무부 차관, 1944년에 국무장관이 됐고, 1945년 얄타회담에도 참석했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던 때조차 주무부서의 장이 한국, 한반도, 한국민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얘기로 들린다.

구대열 : 스테티니어스 장관이 한국에 대해 몰랐다기보다는 국무부 관리들이 몰랐을 것이다. 미 국무부가 한국문제에 무지했다는 건, 내 생각으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자기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강조했던 것이 지금 정설로 굳어진 탓이 아닌가 한다. 국제정치적으로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한국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944년에 접어들어 영국이 토인비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위원회(Korea Committee)를 만들자 영미 양국은 한국의 국내정세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논의를 지속한다. 한국인의 문맹률, 교육열, 일본어 가능 인구, 근대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갖춘 인물의 수, 한일 간의 역사적 관계,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상 등에 관한 보고서가 그 결과물 중 일부다.

다만 점령지 통치에는 일반 사병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야전군보다 전문지식을 갖춘 장교들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으로 진입한 미군은 야전군이었으며 이들은 철저하게 서방국가들의 군사전통에 따라 점령군으로 행동했다. 소련군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정치적 군대이기 때문에 주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미군보다 나았다고 하겠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약탈이 엄청났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마디 추가하자면, 요즘 '해방군, 점령군' 논쟁은 쓸데없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패배한 지역을 점령하면 모두 점령군이다. 미소 양국은 모두 일본을 패배시켜 한국을 해방시킨 해방군인 동시에 한국을 분단해 점령한 점령군이다. 당시 미국의 점령 방식과 행위는 한국문제에 대한 미 행정부의 인식 부족 탓이라기보다, 그들의 군사전통이 갖는 내재적인 한계성에 기인한 것이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이 소련에 대응해 정치적으로 대처하기보다, 그들의 군사전통에 따라 적지를 점령한 점령군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또 범세계적 차원의 문제를 소련과 논의해 해결하는 차원에서 한국문제에 접근한 것이 남쪽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한승동 : 미국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구실로 38도선 분할점령을 결정하고, 소련의 동의를 받아낸 것이 신탁통치다. 이것이 사실상 남북 분단선이 됐다. 그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4대국의 5년간 신탁통치가 결정될 때까지도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구체안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구대열 : 1945년 8월 38선 분할부터 이해 12월 모스크바 회담까지의 결정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다. 당시 미 국무부 기록은 한국에 관해 소련과 합의를 찾으려고 허둥댄 것을 보여준다. 결국 찾은 최선의 합의가 구두양해(Oral understanding)였다. 미국은 전후 문제를 계획했으나 종전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고, '빅3(미국, 영국, 소련)' 간에 종전 후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여유는 없었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구상하지만, 이는 서구의 식민지 통치사에서 발전되어 나온 개념이다. 식민지의 해방과 독립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1차 세계대전 후 위임통치를 한단계 발전시킨 이상주의적 전후처리 방식에 불과했다.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에 대해 미국의 아이디어를 실천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러나 강대국들의 이해가 상충하고 '한국은 독립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근거에서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에만 쉽게 합의했을 뿐이다. 신탁통치 기간 문제도 루스벨트조차 5년, 40년, 50년 등 오락가락할 정도로 일관성이 없었다.

한반도의 4대국 분할통치안도 몇 가지가 존재했다. 중요한 것은 독일의 분할안이 지역분할(zonal division)로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한국의 분할안은 중앙통제(central control)를 기본으로 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회담은 신탁통치 문제를 이후 미소공동위원회로 넘긴 것이며 냉전과 함께 분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해방=독립? 연합국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승동 : 그렇다면 루스벨트, 즉 미국에게 한국 신탁통치안은 전후 세력재편을 자국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 장치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한국에 대한 무지 역시 한반도에 단순히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 중국, 일본 등 주요문제의 종속적 하부 구성요소로 인식했기 때문 아닌가?

구대열 : 그건 미국의 신탁통치안을 자국 위주의 해결 방안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인데, 물론 미국이 국가이익을 배재하고 순전히 이타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은 국제정치에서 있을 수 없다. 다만 미국은 다른 열강들이 자국 이익을 챙기는 데 열중한 것과는 다르게 전쟁승리를 위한 연합국의 협조, 전후 세계질서, 평화정착, 식민지 처리 등 광범위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국제정치적으로 신탁통치는 관련국들이 협조해야 가능한 협조체제(concert system)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전쟁 때 협조하던 관련국들이 전후에는 서로 많은 이익을 챙기려 들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해 협조체제가 장기화되기 어려워진다. 미국은 자국 이익에 한국이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태평양의 평화를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국제정치에서 '절대적'이란 말은 필수적(vital)이라는 의미다. 일본이 미국의 국익에 필수적인 지역이라면, 이를 지키는 데에 한국의 지정학적 존재는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1945년 미국에 한국의 위상은 '단독으로' 힘을 쏟아 지킬만한 가치는 없어도 소련에게 넘겨주자니 일본과 태평양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다. 소련도 한반도를 완전히 석권할 수 있었음에도 38선에서 멈춘 것은 미국을 도발해봐야 전후처리에서 얻을 것이 없다는 계산과 함께 한반도보다 중요한 일본의 일부(홋카이도)를 점령하고 전후 통치에 참여하려는 의도였다고 할 것이다.

한승동 :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 스탈린은 "한국인들이 그들 스스로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면, 왜 구태여 신탁통치가 필요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스탈린이 그렇게 얘기한 이유를 소련에 유리한 말을 한 것으로 해석하셨다. 일본 패전과 함께 한국민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의 자유를 준다면, 당시 소련이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훈련시킨 한인독립운동가들(2~5만으로 추산)의 존재 등으로 볼 때 공산정권이 수립될 가능성을 높게 봤다는 것이다.

설사 스탈린의 의도가 그랬더라도 당시 탈식민과 민족자결을 내세운 미국 논리대로라면,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할 이유는 없었던 것 아닌가? 결국 신탁통치 방안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과 주권국가화를 막아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장치였고, 미소 냉전적 대결 강화와 함께 분단 고착화와 전쟁으로 귀착된 것이 아닌가?

구대열 : 얄타회담에서 한국문제는 지나가는 말 정도로만 언급됐다. 그럼에도 얄타회담은 동아시아를 포함해 전후 문제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회담이며 이런 의미에서 전후의 냉전체제를 얄타체제라고 칭한다. 해방만 되면 구워먹든 삶아먹든 우리가 결정하겠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다. 연합국들은 그럴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미국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아야했고, 중국 역시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을 비롯해 소련과 중국에서도 한국정부의 무능과 부패라는 문제가 강력히 대두되면서 '한국민에게 맡길 수 없다'는 데에 너무 쉽게 동의한 것이 신탁통치다.

'만약'을 전제로 말해보자면, 모든 것을 한국인이 결정했다면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본다. 그랬다면 중국이나 소련식으로 수립된 한국의 독제체제가 이후 소련식으로 진행됐을 것이냐, 북한식으로 진행됐을 것이냐에 대해서는 추측도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지 않았다면 한국인 스스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과 동일하다.

한승동 : 당시 장제스의 중국도 임시정부 승인을 방해했고,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고 부각시켜 미국 등 서방 열강이 임시정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장제스가 임시정부 후견인 노릇을 하고 카이로 회담 등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 것도 실은 청일전쟁 이전처럼 중국이 장차 종주권적 권리를 갖는 또 다른 형태의 조공체제를 염두에 둔 구시대적 세계관 내지 야심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랬던 대만이 1979년 대만과의 단교 때 '독립을 도와준 의리를 저버렸다'고 한국을 비난한 것은 사실관계가 맞지 않다고 지적한 점도 흥미롭다.

만약, 당시 장제스 쪽이 임시정부를 승인했다면, 임정이 독립운동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거나, 미국 등 서양 열강들의 전후 구상에서도 임시정부와 만주‧시베리아 쪽 항일무장세력이 제 몫을 인정받아 이후 한국 현대사가 분단과 전쟁이 아닌 다른 경로로 흘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구대열 : 1942년 초기 임정 승인을 둘러싼 미국-중국-영국 간의 대화를 세밀히 검토한 바로는, 중국이 임정 승인을 강력히 밀고 갔으면 미국과 영국이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주장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게 내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은 연합국 협조문제, 즉 영국의 식민지 문제와 소련과의 관계 때문에 미국의 승인보류에 동의함으로써 임정 승인의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임정과 광복군이 일부나마 자치권을 확보해 만주에서 대일전을 수행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한인부대와 협력했다면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주는 이미 공산세력이 지배하고 있어 임정이 주도권을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공산 팔로군에 골치가 썩던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임정과 광복군의 팽창과 독자적 행동을 억압한 상태에서 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임정이 국민당 정부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도를 통해 미국으로 본거지를 옮기려고 시도했으나, 이조차 국민당이 저지했다. 독자적인 힘이나 발언권이 없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좌파건 우파건 미국과 소련의 압도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이것이 내부 분열을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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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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