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분야에서의 복지에 대한 염원은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노동당이 들고 나왔던 "무상의료"라는 슬로건이 가장 잘 보여준다. 당시에는 파격적었으나 '그게 되겠어?'라는 회의 속에 한 물 가버린 이 슬로건이 다시 화제다. "건강보험 1만1000원 더 내기"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건강보험료를 지금보다 1만1000원 수준만 더 내면 현재 60% 수준인 건강보험 보장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많은 국민들이 암이나 뇌졸증 등 고액의 치료비가 드는 질병에 걸릴 때를 대비해 민간보험에 가입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1만1000원은 그리 큰돈은 아니라는 논리다. 이 주장은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라는 단체가 처음 제기해 화제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같은 보건의료운동 진영 내에서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반 국민이 부담하는 보험료를 더 올리기보다, 현재 50%에 불과한 기업의 보험료 부담율을 높이거나 국고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건강보험의 보장성 하나에 집중하기 보다는 더 포괄적인 의료서비스의 공공성 확대가 필요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진보신당과 함께 '병원비 걱정 없는 사회'라는 공동 기획을 했던 <프레시안>은 '건강보험 하나로'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는 기획 좌담을 마련했다. 오건호 시민회의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창보 의료민영화저지 범국민본부 정책기획위원장이 치열하게 맞붙었다. 임준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도 토론에 참여했다. 사회는 최은희 진보신당 건강보험특위 집행위원장이 맡았다.
다음은 지난 1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진보신당 당사에서 진행된 좌담의 전문이다.
▲진보신당과 함께 '병원비 걱정 없는 사회'라는 공동 기획을 했던 <프레시안>은 '건강보험 하나로'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는 기획 좌담을 마련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삼성硏 보고서, 영리병원 도입 막힌 정부의 의료민영화 우회로"
최은희 : 먼저 현안이자 정세인 의료민영화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 보고서가 논란이 됐다. 시민사회에서는 이를 근거로 '정부의 의료 민영화 정책이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김창보 : 지난해 말 보건복지부가 삼성경제연구소(SERI)에 5억 원짜리 연구를 수의 계약으로 맡겼다. 올해 11월까지 진행되는 연구였다. 지난 8월에 SERI가 복지부에 중간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중간 보고서가 최근 공개되면서 논란이 된 것이다.
예전에는 의료기기, 의료 데이터베이스, 원격 의료 장비와 관련된 통신장비 분야가 IT 산업 분야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바이오 제약 등이 BT(Bio Technology)로 분류됐다. 이 두 가지를 다 양쪽에서 끌어오고 여기에 건강관리 서비스 등 원격의료를 붙여 'HT(Health Technology)'로 다시 포장한 것이 보고서의 핵심이다. 그런데 왜 이런 포괄 작업을 SERI가 진행했을까?
2009년까지 의료민영화의 핵심은 영리병원과 의료채권이었다. 2009년 하반기부터 조금씩 방향이 달라졌다. 올해는 의료채권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지 않나. 영리병원도 마찬가지다. 경제부처에서는 여전히 영리병원을 밀어붙이려고 하지만 그래봐야 경제특구 내 한 두 개 정도다. 영리병원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지 않기 때문에 정부도 더 추진하기는 무리다. 그런데 이 정도로는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분위기 전환은 그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올해 들어서부터는 원격의료와 건강관리 서비스가 서서히 부각됐다. 여기에는 HT를 띄우고 싶은 복지부의 의도가 있다. 영리병원 도입의 길이 막히면서 의료민영화 추진의 우회로가 필요했다는 인상이다. 지난 5월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복귀하면서 의료기기, 제약 분야에 23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종합해보면 의료민영화의 핵심적인 내용과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은희 : 영리병원이나 의료채권은 의료민영화를 추진하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있어 핵심이다.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HT가 부각되는 것이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의료민영화 저지 싸움의 성과라고 볼 수 있을까?
▲김창보 의료민영화저지 범국민본부 정책기획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다만 추진 방향이 조금 달라진 것이다. 보건의료 기술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시장 형성에 관심이 많다. 정부는 의료 시장을 통해 2조8000억 원 규모의 시장이 형성된다고 계산한다. 원격의료 시장도 1조5000억 원 규모로 예측하고 있다.
"영리병원은 현재 의료시장의 민영화고, HT는 미래 시장의 민영화다"
임준 : 사실 둘은 연결되는 문제다. 이명박 정부와 참여정부를 비교하면 참여정부 때 '성장 동력'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의료산업 민영화가 더 많이 진행됐다. 참여정부 때는 BT와 결합해 의료서비스가 산업화 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론 당시에도 의료서비스의 공적 성격은 약했지만 이를 다시 시장을 통해 풀겠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해법이었다. 정부주도형 접근방식을 통해 새 발전전략을 주도한 셈이다.
그렇다면 참여정부의 정책은 실패한 것일까? 당시 정책입안자들이 영리병원 도입이 진짜 성장 동력이 된다고 생각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접근을 통해 얻은 효과는 상당했다. 국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가지도 않았고 보건의료분야에 대한 자본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물론 과거에도 전통적인 병원자본이 있었고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병원에 투자하는 일부 재벌은 있었지만, 병원 자체가 자본의 투자처로 인지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간 의료보험도 확대됐다. 2008년 실손형 보험 시장을 정부가 열어주면서 실손형 보험은 정액형 보험보다 3배 정도 빠르게 성장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경제 위기가 부각되면서 미래 비전을 위한 성장 담론으로의 접근이 어려워졌다. 당장 보여줄 수 있는 '고용창출'이 필요했다. 다소 다른 전략이 형성되는 배경이 된 것이다. 과거에는 정부 주도였다면, 이제는 여기에 민간 자본까지 결합되는 양상이다. SERI 보고서는 이런 측면에서 봐야 한다. 정부 당국자는 SERI 보고서에 대해 "연구개발(R&D)을 하려는 것일 뿐인데 억울하다"고 얘기하지만, 영리병원과 의료채권이 이슈에서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영리병원 반대 뿐 아니라 의료민영화의 범위가 어떻게 확장되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오건호 : 노무현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의료민영화의 큰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그 대상이 현재의 의료시장이냐 미래의 의료시장이냐가 차이점이다.
영리병원은 비영리를 영리로 하겠다, 즉 현재 의료시장에서 이윤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의료채권도 외부로부터 안정적으로 자본을 조달하겠다는 의미다. 결국 두 가지 모두 현재의 의료시장과 관련된 목표다.
반면 HT, 건강관리 서비스, 원격진료는 미래 시장이다. 현재 시장에서는 모든 국민이 지금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국민들이 "영리병원은 재벌에게 좋고 서민에게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 시장은 과학기술과 연결돼 있어 계급 관계를 분명하게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기술은 중립적인 것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 역시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의료기술은 공공화될 수도 있고 시장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재 의료시장에서는 국민들의 저항이 크다. 2008년 촛불이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는 두 시장을 다 장악하려고 하지만 현재 시장에서 주춤한 것은 사회적 저항 때문이다. 미래 시장은 상대적으로 저항이 아직은 잠재적이다. 즉, 이명박 정부가 미래 시장을 선점하려는 것으로 봐야 한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새로운 의료서비스가 나타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진보진영은 어떻게 이를 공공의료 체계 내로 흡수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 오건호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공동운영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김창보 : 현재 시장과 미래 시장으로 나눠서 분석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의료민영화의 두 축은 재정적인 측면의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공급 측면의 영리병원과 의료채권이었다. 그러나 SERI 보고서는 이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의료기기와 제약을 의료서비스를 중심으로 접목했다. 의료서비스가 60%, 기기와 제약이 40% 정도 된다. 여기서 기기와 바이오제약을 더 확대하기 위한 매개로 의료서비스를 활용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민간보험과 병원 그 자체에 맞춰서 바라봤다면 이제는 넓어지고 확장된 것이다.
"공공의료의 실례를 국민에게 보여주는 일, 지자체가 할 수 있다"
최은희 : 결국 최근 흐름은 의료민영화를 저지하려는 시민사회의 성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의료 자본의 합리적 조정 및 현실화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변화에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의 대응은 준비가 조금 덜 된 것 같다. 여러 갈래의 의료민영화 정책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최은희 진보신당 건강보험특위 집행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오건호 : 지난 촛불을 보더라도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은 다른 분야에 비해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진수희 복지부 장관 체제가 특별히 예전과 다를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기존 대응 체제를 조금 더 풍부하게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된다.
임준 :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간의 반대 투쟁에서 '그럼 어떻게?'는 사람들에게 물음표였다. 공공의료기관 확대를 대안으로 내놓았지만 사람들은 의료가 정말 '공공'일 수 있는지 불신이 있다. 공공의료기관의 공공적이지 않은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중층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자본은 병원보다는 보험에 기대려 할 것이다. 민간 의료보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민간보험의 탐욕을 막고 그런 가운데 재원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재원 마련이나 서비스 제공에 대한 공공적인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추상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운 것 말고, 현실 가능하면서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정책과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오건호 : 기존 축을 유지하되 풍부하게 해야 한다. 그간은 말로는 '저지와 대안'이었지만 충분히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건강보험의 보장성 문제는 공세적 의제다. 이 의제가 떠오르면 그 순간 민간보험회사가 밀릴 수밖에 없다. 올해 들어 보장성 문제가 논쟁이 되는 것은 이제까지 성과를 기반으로 보건의료운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건강관리 서비스도 비판을 넘어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보다 적은 비용으로 효과적이고 접근성이 높은 시스템을 보여줘야 한다. 지자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의료산업의 시장화를 얘기하는 사람들의 수준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반 국민들이 볼 때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이런 방식으로 하면 공공서비스가 만들어지는 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김창보 : 민간보험은 서비스 제공 체계와 맞아 떨어질 때 이해관계가 실현된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담론 역시 중요하긴 하나, 건강보험 보장성 의제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공의료 기관인 서울대병원조차 상업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상업화를 막을 준비를 해야 한다.
두 가지 고민이 든다. 하나는 보건지소 확대다. 정부가 국민의 건강관리를 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공의료 확대다. 그런데 이 부분은 시민사회의 자신감은 떨어지고 주장에 힘도 잘 안 실린다. 요즘 접근 방식은 의료법인이다. 그냥 민간병원으로 치부했던 의료법인의 사회적, 공공적 역할 강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민영화론자들의 움직임과 비교해서 시민사회 진영은 전체적으로 의료서비스 공급체계에 대한 대안이 부족하다.
임준 : 대안이 없었다기보다는 어떤 대안을 더 강조할 것인지에 대해 시민사회의 합의가 낮다. 주치의 제도만 하더라도 그렇다. 시민사회에서는 주치의 제도의 목적은 비용을 줄이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의료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주치의 제도는 일반 국민이 제대로 된 1차 의료서비스를 받도록 하자, 즉 건강관리의 측면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합의 수준이 없다.
오건호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우리의 대안 '모델' 만들어야"
최은희 : 국민들의 보건소에 대한 만족도가 크다. 공공의료강화의 대중적 요구로서 보건소, 보건지소 확대 싸움을 적극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자. 보건의료운동의 여러 요구들 가운데 건강보험보장성강화가 주요 고리라는데 이견이 있는 것인가?
오건호 : 보건의료운동은 사회운동이다. 운동방식에서 전략적 기획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재 50 : 50의 사용자, 노동자 부담율을 60 : 40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은 정책적 요구에 가깝다. 나는 정책적 효과보다는 정치적 효과가 지금 운동에 있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노사 보험료 부담률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공급체계 개편 문제도 마찬가지다. 의료민영화론자들에게는 삼성병원이라는 모델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서울대병원이나 건강보험공단이 직영하는 일산병원 같은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바꿔내야 한다. 다르게 운영되는 병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제주도에서 영리병원 도입 문제는 정부가 주도권을 지닌 의제이다. 하지만 역으로, 우리가 제주도에서부터 주치의 제도를 시행하자고 공세적으로 제안할 수 있다.
▲ 임준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오건호 : 맞는 말이다. 이제 진보정당이 지방자치단체 행정 권력 일부를 얻었다. 반드시 의료 뿐만 아니라 교육, 주거, 장애인, 복지 등 각 분야의 모범적인 모델을 이 지역공간에서 만들어내야 한다. 눈으로 보여줄 경우 전국적인 의제로 확장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난 지방선거를 휩쓴 무상급식을 보라. 경기도에서 금새 전국으로 전국으로 펴졌고 도시락 하나가 '보편 복지'라는 담론을 한국에 상륙시켰다.
사실 '건강보험 하나로'를 기획하면서의 생각은 그랬다. 보건의료는 현재 중층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중 서민들이 일상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바로 '병원비'라고 봤다. 그래서 병원비에 주목했고, 병원비 해결을 위해서는 건강보험 재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기존 사회운동에서 감히 꺼내지 않았던 '보험료 인상' 주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반 국민이 1만1000원을 더 내면 기업과 국가도 더 낼 수밖에 없다. 그를 통해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제일 걱정됐던 것은 인상된 보험료를 내야 할 당사자, 시민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시민들이 이 방식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회적 반향이 일어난 것이다. 운동 내부에서만 맴돌았던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의제가 사회적으로 확장됐다. 나아가 2010년에 무상급식이 '우리 편'을 모아 냈던 역할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12년에 '건강보험 하나로'라는 의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김창보 "건강보험재정 확대는 불가피, 보험료에 과도한 의미 부여 곤란하다"
김창보 : 비록 지금은 '범국본'과 '시민회의'가 갈라서 있지만 공유됐던 내용이 더 크다. 서로 공유하는 내용의 핵심은 사실 건강보험 재정을 빨리, 크게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의료보험에 대한 의존성을 낮출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그러나 시민회의는 밖에서 보기에는 지나치게 보험료에 무게를 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강보험의 지금 재정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는 생략된 측면이 있다.
2003~2009년까지 적용인구 1인당 의료보험료가 딱 1만1000원 뛰었다. 이 사이에 급여비 지출은 2003년 15조 원에서 2009년에 30조 원으로 두 배 늘어났다. 보장율은 같은 기간 57%에서 62%가 됐다. 재정은 매년 늘어났다. 그런데 보장율은 증가한 해도 있고 멈춘 해도 있다. 재정을 아무리 늘리더라도 보장성을 어떻게 높일지가 분명해야만 보장율이 올라간다는 얘기다.
심지어 2007~2008년에는 재정이 2조 원이나 늘었는데 보장성은 오히려 2% 떨어졌다. 재정지출이 늘어도 보장성은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2006~2009년까지 최근 4년간 건강보험 급여비 증가율이 평균 11%였다. 작년에 31조 원이 됐는데 10년간 11%로 올라간다고 치면, 건강보험 재정만 98조 원이 된다. 지금의 3배다. 같은 기간 국민소득이 3배나 높아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하지만 보험료 인상은 불가피하다. 노인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료는 훨씬 더 많이 늘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보험료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본질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면, 민간보험은 힘을 더 얻게 될 것이다. 다른 대안의 원칙은 사회연대성과 부담의 형평성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회의는 보험료에 너무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 ⓒ프레시안(최형락) |
오건호 : 미래 의료비 증가에 대한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앞으로도 의료비 낭비 요인이 여전히 존재하고, 인구 구성 변화로 인해 의료비는 가파르게 오를 것이다. 올해는 보험료 필요인상액이 1만1000원이지만 앞으로 해가 갈수록 금액은 커질 것이다. 당연히 이후 재원에서는 국고든 사회복지재원이든 모든 대안을 논의해야 한다. 당장 국고지원율이 상향된다면 대환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요구가 대중의 힘을 얻지 못해 왔다. 지금은 일단 1만1000원으로 가능하다.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병원비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 방식을 우선 추진하자. 이후 미래 필요재정에 대해선 여러 재원방안들을 열어 놓고 논의하면 된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보험료 인상만 이야기한다는 일부의 비판은 우리가 지닌 전략적 기획을 지나치게 정책적으로 평가한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더 내야 한다" vs. "풀뿌리운동으로 소외된 시민을 주체로"
임준 : 당장 올릴 수 있는 재원 조달처는 보험료일 수 있다. 그러나 보험료 인상폭을 1만1000원이라고 명확히 제시하면 역효과도 있을 수 있다. 인상 그 자체에는 동의하되, 그 폭을 정하지 않고 제안하는 것이 더 좋다.
오건호 : 어떻게 요구금액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실제 '1만1000원'이라는 숫자를 밝혔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설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임준 : 정확히는 슬로건의 문제다. 1만1000원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 실제로 돈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 자칫 1만1000원으로 모든 것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오해할 여지가 있다.
김창보 : 보험료 인상 자체에 대한 반대는 아니다. 다만, 국민이 더 내면 기업도 더 내고 정부도 더 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그것이 과연 형평성이 있나? 기업들은 비정규직 실업자를 대량 양산하면서 자기 이득을 챙기는데, 50%만 부담한다면 사회연대인가? 대기업에서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
임준 : 그러나 지금 시기에 사회연대보험이 정말 가능한 방법인가? 조세부담, 직접세, 사회복지세 등 보험료 이외의 방법은 정부 조세체계라는 큰 그림까지 다 바꿔야 한다. 더 본질적으로는 정부 성격 자체를 바꿔야 한다. 한나라당 보고 바꾸라고 요구한다고 바뀌나? 물론 조세 개편은 필요하지만, 담론적으로 가능한 것일 뿐 전술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오건호 : 보험료를 지렛대 삼으면 사용자, 국가 몫이 늘어나고, 보험료도 소득에 따라 내는 것이기에 재분배 효과가 크다고 주장하고 사회연대라는 표현도 쓴 것이다. 우리도 당연히 사용자의 몫, 국고 몫을 더 올려야 한다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창보 : 정치 기획만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당장 이대로 가면 2015년에는 50조 원의 건강보험 재정에서 절반, 25조 원을 노인 계층이 쓴다. 차기 정부에서 손을 안 댈 수가 없다. 다른 대안 재원을 찾는 일에 시간이 별로 없다는 얘기기도 하다.
오건호 :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에 대한 부당한 지적이 또 있다. "보장성 강화 운동만 하고 영리병원 반대 투쟁은 안 하냐"는 비판이 그것이다. "이 사람들은 보건의료 문제 중에 병원비 해결에 특별히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구나" 생각하면 되는데 "왜 이 문제에만 초점을 두느냐"고 비판한다.
김창보 : 소모적인 논쟁이 된 측면이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이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세련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오건호 : 안타깝게도 민주노동당의 안과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의 안에는 큰 차이가 있다. 민주노동당은 재원 확충을 위해 사용자와 노동자 부담률을 현행 5:5에서 6:4로 바꾸고, 국고지원율도 20%에서 30%로 올리는 방안을 채택했다. 지금까지 사회운동진영이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다. 무상의료 봉우리를 올라가는 기존 A코스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A코스를 오르지 않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잡초가 무성해진 A코스 대신 새로이 보험료를 지렛대로 삼는 B코스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이다. 목표로 삼은 정상은 똑같을지 모르나 방법은 전혀 다르다.
임준 : 각 조직들 간 차이는 있지만 같이 못 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실제적인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세력이 조직적인 연대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무엇을 위한 진보대연합을 할 것인지, 가치와 정책을 얘기해야 한다. 건강보험보장성강화와 관련해서도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 사회당, 민주노총 등과 공동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제안할 계획이다. 그간 의료공공성과 무상의료를 주장해온 진보정치세력이 현 단계 건강보험보장성강화를 위한 정책적, 대중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김창보 : 건강보험 보장성 문제를 의제화시킨 '시민회의'와 건강보험법 및 의료법 개정안을 통해 의료 개혁 방안에 집중하고 있는 '범국본'의 고민을 묶어 건강보험 대개혁 방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2012년 공동 행동을 논의해야 한다. 특히 지금 민주당이 '좌클릭'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정당의 역할과 자리매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
▲ ⓒ프레시안(최형락) |
또 하나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는 지금 발전 중에 있다는 점이다. 시민회의에게 1단계 시험은 시민회의 출범이었다. 다행히 이 관문은 통과했다. 2단계는 전국적으로 풀뿌리 조직을 만드는 일이다. 10월 말까지 광역지역을 포함해 약 10개 지역에서 시민회의가 발족할 예정이고, 연말까지 조직화가 계속될 것이다. 3단계는 이러한 조직토대를 기반으로 직접 시민을 만나는 일이다. 오는 10월 30일에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는 전국적으로 지역 홍보 선포식을 가진다. 이렇게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은 기존의 보건의료운동의 잠재적 주체였던 일반 시민을 주체로 만드는 일이다. 기존 보건의료 운동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확장하는 것이다.
임준 : 사용자와의 빅딜은 안 된다. 지금까지 늘 문제가 되는 집단은 공급자였다. 수가 문제, 비용 문제를 계속 얘기하고 낭비적 진료를 줄여야 보장성이 강화된다는 식이었다. 시민회의는 민간보험 문제를 전 국민적으로 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이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 네트워크에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사안을 가지고 운동을 펼쳐가야 한다. 지역에서의 변화는 눈에 띄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은희 : 의료민영화 정세 및 건강보험보장성강화를 둘러싼 쟁점을 짚어봤다. 건강보험보장성강화, 특히 재원마련 방식과 관련해서는 시민사회 내에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이고, 오늘 좌담만으로 접점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상호 이해와 협력의 필요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긴 시간 얘기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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