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바람>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고(故) 박종필 감독이 2003년에 만들었고, 2004년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올해의 인권영화상'을 받았습니다. 상을 받던 날, 쑥스러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순도 100퍼센트의 기쁨과 자랑스러움만을 보이는 박종필 감독에게 너무 교만한 거 아니냐고 놀리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노들야학'이 받는 상이잖아."
노들야학은 20, 30년 동안 집 안에서만 생활할 수밖에 없어서 제도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들이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다니는 학교입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활발해지면서 야학 내부에서는 수업이 부실해지는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는 수업과 투쟁,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학생들과 교사들의 깊은 고민을 충실히 담아냅니다. 영화가 담은 풍경들은 너무나 내밀하고 생생해서 <노들바람>은 2시간이 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저라면 그렇게 못 만들었을 것 같은데 박 감독은 모든 명예를 노들야학에게 돌렸고,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에게 상영되지 않았습니다.
2년 전 어느 밤, 노들야학의 박경석 교장과의 술자리에서 술에 취한 제가 "<노들바람>을 다시 불러내자. 그 영화가 너무 아깝다"는 말을 반복하자, 박 교장의 옆자리에서 빙글빙글 웃으며 재미있어하던 박 감독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너무 기니까 재편집하자', '인문학 열풍과 함께 <노들바람> 열풍이 불 것이다' 이런 호언장담을 해 놓고, 저는 그 고민을 이어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작은책>에 소개하기 위해 이제야 <노들바람>을 다시 봅니다. 주인공들의 목소리보다 그 답을 얻기 위해 던지는 박 감독의 질문들에 귀 기울이다가 주인공들의 깊은 속내를 끌어내는 그이의 차분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고 박종필 감독은 2017년 7월 28일, 만 49세의 이른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투병 사실이 알려진 지 일주일이 채 안 된 때였습니다. 박종필 감독이 마지막까지 활동했던 독립다큐멘터리제작집단 다큐인과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가들은 4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기간 내내 빈소 한구석에서 추모 영상을 만들고 추모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다들 나사가 하나쯤 빠진 듯한 상태로 묵묵히 일을 해 나갔습니다(4.16연대 미디어위원회의 일원인 저 또한 동료들과 박종필 감독이 남긴 말들과 영화들을 함께 정리했고, 그 시간이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박종필 감독의 첫 번째 영화는 1997년에 만든
박종필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평택 에바다학교 시설 비리를 다룬 <끝없는 싸움-에바다>입니다. 뭔가 '다른' 노동을 이야기하고 싶어 장애인을 떠올렸고, 그렇게 찾아다니다 '에바다 투쟁' 현장에 갔는데, 주류 미디어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에 함께 분노하며 거기에 머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 감독이 평생의 스승이라 부르는 박경석 교장을 만나게 됩니다.
2002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버스를 타자!>, 2003년 <노들바람>, 2006~2008년 RTV 격주 장애인 정규 프로그램 <나는 장애인이다>, 2010년 <시설 장애인의 역습> 등. 그 후의 박종필 감독의 영화에는 장애인 이동권, 시설 비리와 자립생활, 부양의무제까지 장애인권운동의 현장이, 그 땀 냄새와 숨소리가 고스란히 담깁니다.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습니다. 첫 영화의 성공과 동시에 박종필 감독은 노숙인 형들에 대한 부채감을 평생 등짐처럼 지고 다녔습니다. 2001년에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약칭 '노실사'? 지금의 '홈리스행동')을 알게 된 박 감독은 감독으로서보다는 야학을 함께 열고 후원을 조직하는 활동가로서 더 열심히 일합니다.
그즈음에 저는 박 감독의 부탁을 받고, <꿈의 공장> 김성균 감독과 함께 홈리스 주말 배움터에서 미디어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박종필 감독은 늘 교실에 함께 있으면서도 보조교사 역할만 하더라구요. 왜 직접 안 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의문이 이번에야 풀렸습니다. 노실사 시절부터 함께 활동해 왔던 이동현 홈리스행동 대표가 장례 기간에 열렸던 추모 행사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더라구요.
"나는 박종필 감독이 영화감독인 줄 몰랐어요. 처음엔 이름이 '박감독'인 줄 알았어요. 요리를 하고, 후원인을 조직하고, 늘 카메라 없이 일만 했어요."
노숙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카메라를 멀리하고 싶었나 봐요. 이렇게 일찍 떠날 줄 알았으면 궁금한 것들을 그때그때 물어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혼자 섭외하고 인터뷰하고 촬영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는데, 박종필 감독이 지나가니 너무 반갑더라구요. 저는 섭외와 인터뷰를, 박 감독은 촬영을 하면서 신나게 시민들의 말을 모았고, 어두워진 후에는 박 감독에게 제 카메라를 맡겼습니다. 캡사이신과 물대포가 난무하는 전쟁터 같은 현장에 저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을 시작한 후 박 감독은 많은 영상을 만들었는데, 고(故) 김관홍 잠수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 작업도 진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바로 전날 헤어진 김관홍 잠수사의 부고(訃告)를 듣습니다. 펑펑 울면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 영상을 만들던 박종필 감독. 반복되는 깊은 슬픔이 박 감독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박종필 감독의 투병과 죽음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2015년 4월에 우리가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박 감독이 이렇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런데 장례 기간에 저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지성 아빠 문종택 님은 "세월호의 마지막 싸움은 세월호를 기록하는 일"이라며 박종필 감독을 설득했고, 그래서 탄핵이 성사된 바로 다음 날 박 감독이 목포신항으로 내려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미안해하는 우리들에게 다큐인의 동료인 송윤혁 감독이 박종필 감독의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글을 들려주었습니다.
"세월호를 만났다. 세월호는 나에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이 글을 씁니다. 고 김관홍 잠수사와 이별한 후 박종필 감독이 그랬듯이 남은 우리들은 울면서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고 글을 씁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을 받아도 감사의 말을 들어도 "그저 나의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말했던 박종필 감독. 9월 14일부터 17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는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박종필 감독 추모영화제'가 열립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박종필 감독의 영화들을 꼭 만나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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