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박근혜 선배입니다. 구속 선배"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⑥]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골목 깊숙이 들어있는 건물, ‘지난겨울, 그 광장의 촛불을 헛되이 말라!’라는 글귀가 써져있는 커다란 현수막.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전태일재단의 건물을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짐작도 못할 시대의 청년이었던 전태일은 무슨 심경으로 스스로에게 불을 지폈을까. 여전히 저 건물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또 누구일까.
"이런 사진은 어디서(웃음)…민자당 분쇄!(웃음) 이게 89년에 지금 박근혜 있는 곳에, 내가 박근혜 선배잖아요(웃음). 구속 선배."

이수호 이사장(전태일재단)에게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찾은 예전 사진을 건네니 박근혜의 '구속 선배'라며 미소를 지었다. 민주화운동부터 전교조 결성,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의 활동을 이어온 스스로를 '좌파운동의 정통'이라고 표현하며 농담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이수호 이사장. ⓒ바꿈

"이중적인 아픔의 87년"

"(6월 10일 당시)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죠. 신일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그 때 고3을 맡아서 가르치고 있었어요. 그 때 민주화가 이제 막 진척되던 그럴 때여서 87년에 전두환이 호헌발표를 하고 그 뒤에 계속해서 저항이 벌어지고 그래서 매일 매일이 뒤숭숭하기도 하고 힘들고 했는데.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하고 명동이나 그 당시에 신세계 앞, 그 쪽에서 주로 시위를 많이 했어요.

학생들을 그렇게 데리고 나갈 형편이 안됐죠. 교사가 나가는 것도 굉장히 힘들게, 몰래. 마음 맞는 선생님들이랑 했지. 그렇게 나서면 바로 학교에서 징계를 당하거나 교장한테 불려가서 혼이 나거나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웃음)."

신일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이수호 이사장은 학교 이야기로 6월 항쟁의 기억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비단 남북만의 책임이 아닌 외세의 개입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해직된 교사. '커밍아웃'하듯 시위에 참여했다는 교사. 오늘 날의 촛불처럼 대중화되어있던 시위가 아니었던 만큼 각자의 위치,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특히 수업을 지루해 하는 학생들은 '쌤 얘기해주세요', '시사적인 문제, 요즘 뭐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하면 또 못 이기는 척 세상 돌아가는 얘기하고 그랬죠.(웃음) 그 당시에 주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그랬잖아요. 신일고등학교도 그런 전통이 또 있었어요. ‘전고협’, 전국고등학교협회 이런 식으로. 거기에 신일고등학교도 이제 관련이 있고. 그래서 고등학교 학생운동에 상당히 앞장서는 학생들도 있었고. 그래서 그런 학생들 보면 안타깝잖아요, 대학은 가야 되지 않겠니?(웃음) 하면 (학생들이) 지금 대학이 문제예요? 나라가 이런데?"

정작 본인은 학교에서 징계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위에 참여했지만 앞장서는 학생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니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하셨잖아요' 라는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에 '이중적인 아픔'이라는 말로 답을 이어갔다.

"(앞장섰던 학생 중에) 한 학생은 바로 노동현장으로 갔어요. 그냥 공장에 취직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 노동운동, 운동의 삶으로, 운동의 정신으로 갔는데. 그 뒤에 다 헤어지고 나는 교육운동하느라 정신없고, 해직당하고 감옥 가고, 그 학생들은 나름대로 그랬는데 어느 날 자살을 했어요. 고등학교 제자죠. 그런 아픔도 있고.

그때 같이 하던 다른 친구는 몇 년 그러다가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공부해서 대학 가고. 그러면서도 뭔가 좀 사회를 위해서 노동자를 위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노무사 공부를 해서 힘든 노동자들 도와줘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지금도 노무사로서 노동자들을 도우면서 아주 잘 하고 있는 제자도 있죠. 그때는 같이 고등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결과가 그렇게 되더라고요. 우리 삶이 다 그런 거죠.

그런 개인, 개인의 삶이 전체적으로 합쳐지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한다거나 그 시대를 반영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삶은 또 각각 자기 삶에 있어서 힘들기도 하고 그런 거죠. 교사로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막 해서 정말, 뭐 (사회운동을) 할 수 있지만 그랬을 때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다 귀한 자식이고 자기 삶을 해야 하는데 그걸 일치시키는 게 힘들잖아요. 참 힘들더라고 솔직히. 그래서 사실 비겁하게 아주 적극적으로 학생들한테 얘기를 못하는 그런 게 있죠. 그 당시도 이제 87년 그 무렵에 그런 이중적인 아픔이 있어요."

학생들을 보다 민주적인 환경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결코 학생들과 같이 시위에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시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 삶이 다 그런 거죠"라고 담담히 말했지만 제자의 죽음, 운동가로서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제자를 지켜보는 선생의 마음을 안타깝지 않게 표현할 길은 없어보였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

수업과 시위를 병행하며 87년 6월을 보낸 이수호 이사장은 이후 교사들과 함께 본격적인 교육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이하 전교협)를 창립한 후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창립까지 6월항쟁 이후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육계의 열망은 뜨거웠다.

"우리가 처음 나서고 할 때는 교육문제, 학교의 심각한 문제. 학생들이 비교육적인 상황 속에서 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 이런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면서 한계에 부딪힌 거예요. 이런 것(교육적인 내용)만 가지고는 힘들다. 운동을 하는 주체, 운동을 하는 사람, 교사면 교사, 그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고민을 하고 그게 확실해야 운동이 지속되고 힘이 있다. 이러면서 교사의 문제로 자기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거죠.

세상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은데 교육 문제만 달랑 해결이 안 되잖아요, 개혁이라는 것이 사회 전체가 각 분야가 동시에 움직여지는 거지, 다 썩어빠지는데 교육 하나만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회 전체를 바꾸는데 어떤 관점이 필요한가 하는 토론이 벌어진 거죠. 그리고 그때(전교협)는 회원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암만해도 교육법 하나를 못 고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아니구나, 이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는 조직, 단체가 필요하구나. 그리고 교섭이나 이런 것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단체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노동조합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그러면 노동조합을 하자."

전교조 결성 이후 1527명의 교사가 파면, 해임되는 등의 외부에 의한 억압도 있었지만 내부의 분쟁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당시 노동조합, 노동자, 그리고 좌파라는 말에 대한 반감은 ‘빨갱이’에 대한 반감만큼이나 강력했다. 교사협의회에서 교직원노동조합으로 탈바꿈하자 탈퇴한 회원들도 많았다고.

"요즘 좌파라는 말을 홍 뭐시기 대선후보가, 당신 우파요 좌파요, 하는데(웃음), 아 그걸 나한테 물어봐요, 나 좌파요! 뭐가 잘못 됐소?(웃음)"

노동자로서 교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그는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후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활동할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노조생활을 한 그의 역사를 보니 조금 의아한 지점도 있었다. 교육운동과 노동운동. 그 사이의 연결지점을 어디서 발견한 걸까.

"나는 항상 전교조 위원장이든 민주노총 위원장이든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든 내 교사로서의 한 역할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 교사는 스무 평 교실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고 본업이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역할을 폭도 넓혀야 된다는 거예요.

스무 평 교실에서 열심히 수업하고 있는데 뒷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어떤 술 취한 남자가 들어와서 애들 수업을 방해한다고 하면 교사가 앞에서 수업하면서 '야 그거 신경쓰지말고 이거나 열심히 해 내 할 일은 가르치는 일이야' 하는 게 교사의 역할은 아니잖아요. 저것도 처리해야 되잖아. 그러면 잠시 분필을 놓고 당신 여기 왜 들어왔어, 하고 끌어내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고 그것도 교육이다, 라고 느끼고. 나는 천상 교사잖아요. 그리고 한 번 교사는 영원한 교사고.

지금 나이가 (정년을) 넘어서 학교에 근무는 못하지만(웃음) 뭐 특강이다, 교사 연수다 부르면 '아이 내가 뭐' 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서(웃음), 얼른 가서 애들 만나보기도 하고. 이런 식이죠."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수호 이사장. ⓒ전교조 홍보영상 캡쳐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교사 이수호는 참 여러 군데서 ‘수업을 방해하는 술 취한 사람’을 끌어냈다. 교육, 청소년, 장애,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갈등해결 등 하는 일도 소속 단체도 다양하고 꾸준했다.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사셨던 건가 싶을 만큼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이 많았는데 그는 자신의 공사다망한 삶의 원인을 의외의 것에서 찾았다.
"웬 늙은 선생이(웃음), 운동권도 아닌 사람이(웃음)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굉장히 성실하고 주변에 선망도 있는 사람이 같이 해주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내 역할은 항상 나이 많은 그런 것 때문에(웃음), 부위원장, 무슨 위원장, 나이 때문에(웃음) 그래가지고 맨 그런 역할만(웃음), 온갖 그런 위원장 다 했다니까요(웃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일찍이 교사생활을 시작한 이수호 이사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온 동료 교사들보다 10살 정도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나이를 먹는 속도는 참으로 공평하여 처음부터 10살 많게 시작한 나이차는 결코 좁혀질 생각을 하지 않고, 결국 어딜 가도 나이 많은 사람, 이것저것 책임지는 사람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민주노총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억압과 내부의 계파갈등으로 위기를 맞이한 노동운동을 살리기 위해 어떤 역할을 계속 맡아왔던 자신이 결국 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노총 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희망과 실망이 섞인 임기를 보냈다. 함께 운동했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동운동이 귀족화 ‧ 권력화 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우리나라 대표적 제조업이 조선업 이런 거잖아요. 조선업 대부분이 그 어마어마한 철판, 용접하는, 정교하고도 힘든 일이에요. 그걸 20~30년 한 사람이 연봉 6000~7000만 원 받는다고 그걸 무슨 귀족이고 어떻고 도둑놈처럼 (취급하는 건)그렇잖아요. 금융업이라든지 연구전문직이라든지 소위 말하는 전문직이라는 쪽은 연봉 1~2억 원 받아도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거는 이제 뭔가 이게 기준과 기본이 잘못된 거잖아요."

1987년은 6월항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2016년 겨울은 100만 명의 시민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광장에는 언제나 노동자들이 있었다. 지난 30년 간 노동자들은 귀족노조, 종북, 빨갱이 등 여러 부당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시위를 이어갔다.

"사실은 작년 촛불의 어떻게 보면 강력한 밑받침이 되고 그렇게 됐던 에너지 중의 하나는 1년 전에 있었던 백남기 농민 돌아가신 민중총궐기, 그때는 얼마나 탄압을 받았어요. 경찰이고 뭐고. 물대포로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러면서도 저항을 했잖아요. 모든 욕을 먹어가면서도. 그런 것들이 깔려 있는 거거든요.

세월호, 백남기 등등의 사건들이 밑에 응축되어서 막 언젠가는 기회만 있으면 폭발하는 거잖아요. 그런 하나의 과정 밑에는 운동의 정신과 흐름, 희생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에너지는 욕 얻어먹어가면서 운동하고 있는 농민이나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작년 겨울의 광장을 우리가 다 같이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5월 10일을 문재인 대통령의 날로 기억하겠지만 누군가에게 5월 10일은 광화문에서 고공농성과 단식을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6일 만에 땅으로 내려온 날로 기억될 테니 말이다.

거대한 파도가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잔해들은 억압에 가장 깊숙이 박혀있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푸념하는 나에게 이수호 이사장은 여기까지 온 것도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만큼(정권이 교체된 만큼) 달라지겠죠. 난 그것도 대단하다고 봐요. 어쨌든 (정권)교체 자체도 의미가 있고. 헌법재판소 이정미 재판관이 그 차분하면서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파면선고를 했지만 사실 촛불이, 촛불 시민들이 파면선고를 내린 거죠. 그 얼마나 대단해요. 그 자체도 정말 역사에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고.

촛불, 민중, 국민의 큰 승리로 기록되고 또 그만큼 지금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졌잖아요. 다당제가 돼서 제일 위에서부터 안철수, 문재인, 심상정 그 옆에까지 가면 좌로 또 길어지고, 민중연합당도 있고. 이번에 출마를 못했지만 또 있고. 우로도 쭉 있고.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어진 거예요. 우리가 그걸 인정해야 해요. 그걸 선악으로 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것도 대단하다고 봐야죠."

▲ 이수호 이사장. ⓒ바꿈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 의식"

"사실 그 무렵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에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이 막 일어난 그 사이에, 내가 그런(사회운동) 고민을 하면서 만났던 책이 <전태일 평전>이에요. 전태일하고 나하고 나이가 동갑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절실히, 부채의식도 있고. 그 평전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겁거나 울컥하거나 이런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교육운동으로 이끄는 하나의 계기가 됐던 그런 거였는데. 그러면서 이제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죠. 같이 있는 거죠, 같이."

영원한 젊은이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인 전태일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본인도 얼마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차비를 모아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줬던 이야기, 국회도 찾아가고 시청도 찾아가고, 근로감독관도 찾아가고 심지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 실패의 실패를 겪다 어렵사리 데모를 준비했지만 사전에 경찰에게 정보가 새어나가 결국 스스로를 불태우는 최후의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

당시 중간관리쯤이었던 미싱사로 일했던 전태일은 자기 밑에서 일하고 있던 13살, 14살의 어린 여공들의 삶을 보며 정말 마음 아파했었다고.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수호 이사장의 목소리에도 절절한 마음이 묻어있었다.

"얘(전태일)가 마음이 아파가지고. 일기에도 쓰여 있지만 그걸 보면 마음이 아파서…그게 인간이잖아요. 뭔가 좀 힘든 일 보고 하면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

전태일은 자기 의식, 자기를 바라보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던 친구 같아요. 그러면서 나는 이 사회에서 어디 위치해야 하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기에 대한 책임이죠. 그리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자기를 바라보면 바로 남들이 보이잖아요. 관계 속에서의 자기. 그리고 연대의식,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이런 것들이 이제 발전을 하게 되잖아요. 자기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게 잘 안 돼요. 남들이 보이지도 않고. 그리고 항상 나보다 더 고통 받고 소외당하고 힘든 그런 약자를 생각하고, 이들과 끊임없는 소통과 연대. 이게 전태일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누구이고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나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관계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전태일의 정신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수호 이사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전태일이 여공들에게 풀빵을 건넸던 것처럼 아주 작은 일도 분명 의미가 있고 또 그 작은 일을 통해 사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람은 결코 혼자 잘 살 수 없고, 또 혼자만 희생해 세상을 구할 수도 없다고. 나와 사회 간의 균형 잡기를 ‘전태일 정신’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을 통해 참신한 교훈을 얻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30년 전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이 삶을 사시겠냐 물으니 후회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대에 맞는 교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내가 교사로서 그 시대 상황에 맞게 나는 판단했다고 봐요. 물론 갈등도 했죠. 그 현장, 현실, 아이들. 그 삶과 내 삶을 어떻게든지 좀 알차게,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 되는데 그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인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를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이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지금 3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고.

또 내가 이 무지렁이가, 엄청 복을 받아가지고 아까 얘기한대로 내가 역할이 항상 무슨 회장, 사무처장, 위원장(웃음). 이런 게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명 밖에 없는데(웃음). 그러니까 내가 그런 식으로 보면 참 복이 많은 거죠. 나는 지금 입이 100개가 있어도 할 말 없고, 다만 내가 잘난 척 하면서 그런 역할을 했는데 세상이 뭐가 달라졌나. 그렇게 내가 해서 잘 해놓은 게 뭐냐 할 때 부끄럽고 그냥 그럴 따름이죠.

이제는 책임지는 일이나 이런 거(대표) 안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굉장히 어렵게 싸우는 친구들이 밑에서 남을 도와주는 일을 '같이 좀 합시다, 도와주세요' 하면 외면할 수가 없어요. 와서 하자는데 어떻게, 해야지. 나는 빚이 있는데. 빚을 갚아야지(웃음). 전태일재단도 그렇고. 그래서 뭐 남은 기간, 남은 힘이 있으면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좀 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아주 뭐 자랑스럽고 그럴 것도 없지만 크게 뭐 자신이 부끄럽거나 그럴 것도 없고. 아, 한 교사가 그 시대가 주는 그런 역할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면서 살았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거죠."

새로운 정권의 등장으로 매일 매일이 화제인 요즘. 촛불대선으로 세운 대통령의 행보가 많은 이들의 칭찬을 사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한 구석 어딘가에는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법 밖으로 밀려난 전교조는 여전하고, 땅으로 내려온 노동자들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이수호 이사장이 전 삶을 통틀어 지키고자 했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의 역할만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시민의 역할도 선명해져 간다. 87년의 역사와 2017년의 역사로 쟁취한 힘에는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고, 그러기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꼭 나눠야 한다는 것. 이제 우리는 지난겨울 광장에서 외쳐왔던 ‘이게 나라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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