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미완의 시대를 살고 있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③] 정대화 상지대학교 교수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6.10 국민규탄대회는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봉쇄됐으나 …(중략)… 하오 9시쯤 퇴계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1천여 명이 명동성당 안에 집결, 철야시위 농성에 들어갔다. …(중략)… (11일) 낮 12시40분쯤에는 신부와 수녀들이 학생들에게 줄 빵과 음료수를 사가지고 후문으로 들어가다가 음료수 병은 화염병으로 이용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병 음료수는 모두 경찰에 압수당했다."(6.10 집회 무산…3000여명 연행’/ <경향신문> 1987년 6월 11일자)

그날, 그곳에 정대화 교수(상지대 교양학부, 정치학)도 있었다. 화염병을 잘 던지고 데모 가서 구경하는 게 '주업무'였던 그는 서울시청 앞 행사가 무산되고 학생들이 명동으로 갔는데 그걸 멋모르고 따라들어 갔다가 명동성당에 며칠 있었다. 정 교수가 기억하는 30년 전은 당시 보도된 신문 기사 그대로였다.

6월항쟁 당시 정 교수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석사논문을 쓸 생각도 없이 이리저리 놀러 다니던 30대 초반의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다. 하필이면 명동성당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는 정치학도였다.

"명동성당 바로 맞은편에 로얄호텔이라고 있어요. 거기(나이트클럽)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르바이트 할 때 우리 부서 부장이라는 사람이 가자고 해서 몇 번 갔다가 우연히 어떤 사람을 알게 됐는데, 친한 건 아니었고요. 거기서 아는 사람 명함을 하나 빌렸어요. (아르바이트 그만 두고) 이미 한 3년 지나버렸는데 순전히 경찰 저지선 뚫으려고 가서 부탁을 했어요. 경찰이 포위하고 있는 구역 안에 로얄호텔이 있었거든요. 경찰들도 업무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거니까… 그리고 제가 일반 학생처럼은 안 보이게 굴었죠. 거기 갈 때는 직장인인 것처럼 흉내를 냈어요.

경찰하고 얘기를 하고 (성당에) 들어가니까 처음에는 학생들이 탁 막더라고요. (대학원) 학생증을 보여줬죠. 사수대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자기들끼리 조직이 돼 있기 때문에 한 두세 번 정도 하니까 '저분은 학번이 엄청 높은 선배님이시다. 저 분이 오시면 막지 마라' 그래서 왔다 갔다 했어요. 그렇게 끝날 때 까지 있었어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명동성당을 들락날락하는 게 가능했던 정 교수는, 경찰 포위망 안팎을 드나들며 인근에서 열리는 모든 집회에 다 갔다. 50%는 구경, 30%는 연구 목적의 참여 관찰을 위해서였다. 나머지 20%는? "형편이 되면 (뭐든) 던지기 위해서"라며 웃었다.

▲ 정대화 교수. ⓒ바꿈

"명동성당이 6월항쟁의 기폭제였다"

정 교수는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이 "6월항쟁을 일으키는 원동력, 기폭제였다"고 설명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재야·운동권 수준에서 머물던 분노가, 명동성당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4.13호헌조치 직후에 야당은 당의 전열을 정비했어요(4/21 김영삼과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창당). 그런데도 동력이 잘 안 붙었어요. 동력을 붙인 게 국가가 국민을 속였다는 것(5월 18일,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되었다는 내용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이었어요. 이렇게 되니까 파장이 커졌죠. 그 파장이 최초로 나타난 게 6.10 대회였는데, 이게 원천 봉쇄돼 버린 거예요.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명동성당에 농성을 탁 튼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로 모였어요. 각 대학 총학생회는 모든 전략을 거기에 다 걸었어요. 성당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포위된 명동 주변, 예를 들어 을지로나 퇴계로, 종로에서 집회를 했죠. 그 거리들은 항상 화염병으로, 최루탄으로 가득 찼는데, 학생들이 몰려들고 거기서 취재가 진행됐죠. 외신기자들은 성당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안에서 취재하고 그게 해외로 보도되고, 해외로 보도된 건 다시 명동성당까지 들어오고…."

10일 밤부터 15일까지 엿새 간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은 그렇게 일회적인 행사로 끝나서 좌절돼 버릴 듯 했던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6월항쟁으로 키웠다. 야당 정치인들이 움직였고, 국본은 다음 투쟁을 준비‧진행했다. 성당 농성 해제 사흘 뒤인 18일 열린 ‘최루탄 추방대회’에 전국 150만 명이 참여했고, 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때에는 무려 180만여 명(전국)이 거리로 나섰다. 결국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다.

지난 이야기를 하는 정 교수는 조금 신이 난 듯 보였다. 화염병 던지는 요령을 설명할 때의 표정에서는 '놀기 위해 데모에 나갔다'는 말이 그저 농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정대화 교수의 연구실은 지금도 투쟁 현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송 관련 서류들과 검찰청에서 온 우편물 뭉텅이, 그리고 여러 장의 담요와 야전 침대가 연구실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구실 문에는 '김문기를 반대한다!'는 문구가 적힌 새빨간 피켓이 부적처럼 붙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연구실에 놓인 건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 탓이다. 지난 2014년 8월 김문기는 상지대 총장으로 복귀했고, 같은 해 12월 정 교수를 파면했다. 정 교수는 이에 대응해 연구실을 점거(?)했다.

"제가 여기서 안 나가고 6개월을 살았어요. 제가 여기서 사니까 총학생회장은 여기서 자고, 교수들은 이쪽에서 자고. 졸업생도 와서 잤어요. 야전침대까지 들어왔죠. 늘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학교 측에서 방 빼기를) 포기했어요."

▲ 각종 소송 자료. ⓒ바꿈

"김문기를 반대한다!"

상지대에서 김문기 퇴진 운동이 다시 시작된 건 지난 2010년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김문기 측 구재단의 복귀를 결정했다. 그 후 상지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87년 체제의 불완전성과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역행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단면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모양새였다. 블랙리스트라도 있는 양 김문기에 반대하는 교수와 직원들이 파면됐고, 김문기는 새로운 교수와 직원들을 뽑아 그를 옹호하는 ‘족벌체제’(어용 단체)’를 구축했다. 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국정 역사교과서' 류의 김문기 우상화 교재가 수업에 사용되기도 했다.

"2005년부터 13년 동안 해온 인성교육이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교수와 학생이 아주 자연스럽고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서 연애며, 집안일이며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소통이 목적인 수업이에요. 1학점짜리인데 반드시 이수를 해야 해요.

그런데 김문기가 총장이 다시 되고 나서 이걸 예비군 교육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500명, 1000 명씩 묶어놓고 자신이 뽑은 교수들한테 가르치라고 한 거예요. '김문기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어릴 때부터 신동의 끼가 있으셔서, 그 분은 항상 옳으셨다. 일찍이 가구 산업의 발전을 예측하셔서 40대에 거부를 이루시고, 사회봉사를 위해서 상지대를 설립하시고…' 이런 내용으로요."

그 수업에 사용됐다는 책이 정 교수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김문기의 저서 <상지정신>.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성 결여로 인한 도덕적 경시가 사회적 문제로 크게 대두되는 현시대, 젊은이들의 인성교육의 바탕으로 삼아야할 필독서'. 실소가 터졌다.

"학생들 반응을 좀 받아봤는데, 이런 거예요. '우씨, 이게 대학이야? 나 안 다녀.'"

구재단이 복귀한 다른 사학들에 비해 상지대에서의 투쟁이 더 치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처럼 학생들에게 직접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을까. 정 교수는 "상지대가 왜 열심히 싸웠는지는 잘 모르겠다"면서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1986년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이라는 게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상지대에서 김문기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은 유신시대인 지난 1975년 시작됐다. 학생들은 1985년 총학생회를 만들어 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1986년 10월 14일 상지대 캠퍼스에서 '가자, 북의 낙원으로' 등 북한을 찬양하는 문구가 적힌 유인물이 발견됐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학생 150명가량이 간첩으로 몰렸다.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정 교수는 "총학생회의 농성을 깨트리기 위해 김문기가 한 것"이라고 말했다. 군부 독재 정권이 비판 세력의 입을 막기 위해 조작 간첩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상지대에서도 '용공'이 같은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3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서 또다시 데칼코마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그 사건이 "학생들에게는 그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지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상지대에 설치된 천막농성장. ⓒ바꿈

"재벌·언론·종교·사학·토호…진보를 가로막는 5대 적"

하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김문기가 돌아온 2010년 이래, 정 교수는 4차례의 단식과 삭발을 단행할 정도로 최전선에서 싸웠다. 대체 그에게 상지대는, 사학 민주화는 무슨 의미일까.

"제가 짧게 취직도 해보고 국회 공무원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봤어요. 하지만 내 평생 직업은 상지대 교수에요. 나는 상지대에 오자마자 1년도 안 돼서 법인 사무국장 맡아서 5년 동안 잘났다고 뛰어다니고, 그래서 상지대 민주화 초기에 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를 했어요. 2000년도 낙선운동도 그렇고, 국회를 가도 그렇고 상지대 교수로 갔어요. 상지대 교수가 본의 아니게 내 직업이 됐는데, 내 삶의 터전인 상지대가 무너지면 내가 무너지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무리한 일반화를 해버렸어요. 상지대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진다. 그렇게 정리해버렸죠."

상지대와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렸다는 정 교수. 단지 그런 개인적인 이유뿐이라기에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사학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묻자 다른 차원에서의 설명이 쏟아졌다.

"정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지배구조. 예를 들어 재벌, 보수 기독교, 보수 언론, 사학, 그리고 지역 토호. 이게 한국 사
회의 진보를 가로 막는 역사적 5적이에요. 이 힘이 거대해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기반이죠.

사학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학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커요. 특히 우리나라 대학의 85% 이상이 사학이에요. 이 대학들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정치에 굉장히 중요한 힘을 행사했어요. 돈도 많아요. 잘 뭉쳐져 있고요."

5적 가운데서도 정 교수는 특히 사학과 재벌을 강조했다. 단지 그가 사학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벌도 반쪽, 사학도 반쪽이에요. 크기는 재벌이 크죠. 왜냐하면 이게 물질적 토대니까요. 그런데 민주화된 사학이 공룡 재벌과 같이 공존한다면 누가 바
뀔까요? 재벌이 바뀔 수밖에 없어요. 교육이 잘 되면 사람이 바뀌니까요. 반대로 재벌 구조가 해체됐다고 하더라도, 교육이 무너지면 해체됐던 재벌 구조가 다시 만들어질 거예요. 그러면 재벌도 안 무너지는 거죠.

그리고 지금 재벌도 우리의 인적 동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잖아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힘? 그게 원동력이 아니잖아요. 그러려면 사실은 교육이 살아야 하고, 교육이 살려면 사학이 우선 바뀌어야 해요."

단 한 번도 청산된 적 없던 기득권의 끈을 끊기 위해 사학을 비롯한 5적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었다. 그것과 6월항쟁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6월항쟁이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그 미완성의 상태가 지금의 상지대 사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상지대가 민주화되었는데 6월항쟁의 흐름이 끊기는 시점에서 다시 김문기 비리재단이 복귀하는 역사의 반동이 나타난 것이죠.

이 상황을 보면서 저로서는 우리 사회의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역사적 반동의 시기에 개인적으로 상지대 민주화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는 것이 6월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올인한 셈입니다. 내가 작은 힘이지만 상지대를 지키면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장소에서 자기 분야를 지키지 않겠냐,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하나의 방법론 아니겠냐.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꿈

"선거에 문제가 생겨도 완전히 좌절하지 않아"
상지대에서는 과연 사학비리의 질긴 끈을 끊어낼 수 있을까. 상지대 구성원들의 끈질긴 투쟁 결과, 김문기는 지난 2015년 7월 총장직에서 해임됐다. 2016년 10월에는 김문기가 선임한 구재단 이사들이 모두 물러나고 임시이사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된 4월 초까지 상지대 구성원들은 김문기가 또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걱정을 놓지 못한 상태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이후에도 불안을 놓지 못하는 마음과 닮아 보였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대선 이후에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번 쫓아낸 김문기가 연어처럼 다시 상지대로 돌아왔듯, 또다시 과거가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좋아하는 책의 구절과 역사 속 장면들을 꺼내 들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작품의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있어요.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나는 그걸 인생관으로 받아들였어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절대 없다. 안정과 변화가 동시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변화에는 세월이 필요하다.

프랑스혁명은 100년 간 지속됐어요. 100년 동안 프랑스혁명이 지속되면서 프랑스를 바꾼 거예요. 혁명의 목표도 없고, 혁명의 결과도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대동법의 사례가 있어요. 모든 세금을 쌀로 바치자는 건데, 그렇게 세금을 걷으면 쉽잖아요. 그걸 도입하자고 율곡, 이황, 김육이 주장을 했어요. 당시 영의정들이 주장을 했는데도 완전히 도입하는 데까지 100년이 걸렸어요. 왜? 기득권의 저항 때문에요.

프랑스혁명과 대동법 도입 과정을 보면서,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변화를 바라는 자세로 계속해야 겠다. 또 여기는 사람 사는 곳이잖아요. 사람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긴 세월을 보면서 긴 호흡으로. 나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사회와 역사의 힘으로 이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게 필요하겠구나 싶어요."

정 교수의 말을 듣고 있자니 2017년 촛불집회가 프랑스혁명이나 대동법 도입 과정처럼 6월항쟁의 연장선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긍정하며 말을 이어갔다.

"6월항쟁이 그때는 완성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미완성이에요. 6월항쟁의 미완된 부분이 그 이후에 낙선 운동으로, 효순이·미선이 촛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그리고 이번 촛불로 나타난 것이죠. 시기가 다르고 양식이 다르지만, 촛불은 사실은 똑같이 독재정권을 타도한 거예요.

6월항쟁 직후 양김이 분열하는 바람에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그런 상황이 과거에 있었기 때문에 촛불 직후 대선에서 그런 게 또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걱정할 건 없어요. 사회는 딱 있는 만큼만 해요. 지도자를 능가하는 국민도 없고, 국민을 능가하는 나라도 없어요. 촛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기 때문에 혹 선거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완전히 좌절하지 않아요. 항쟁과 혁명의 기억은 안 지워져요."

1975년부터 지속된 저항을 기억하며 길게 지켜봐왔기 때문일까. 상지대 구성원들도 드디어 한 조각 시름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지난달 24일, 정권 교체 이전 열린 마지막 사학분쟁조정위원회 회의에서 상지대 관련 사안은 단 하나도 결정되지 않았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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