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몫은 '옥바라지'? 지금은 2017년!"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④] 정연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청계인가 종로 3가인가. 아마 청계였을 거예요. 거기에서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났어요. 최루탄 연기가 날리는 그 넓은 거리에서요. 그 친구는 대학에 가지 않았거든요. 80년대만 해도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굉장히 낮았어요. 중학교 때 공부를 조금 잘한다는 친구들은 전부 상고를 갔어요. 그 친구도 여상을 갔었는데, 그 뒤에 한 번도 못 만난 거예요, 7년 동안. 그런데 87년에 그때, 6월에 딱 만났어요. 얘가 파이프를 들고 있었던가, 각목을 들고 있었던가(웃음)."

그게 6월 10일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연순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는 아마 그 친구를 만나고 꽤 오래 뛰어다닌 걸로 봐서는 맞을 거라며 그날의 기억을 전했다. 지금이야 대단한 시위였던 것 같지만 20-30명 모여서 구호를 외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였기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뛰어다녔다면 분명 6월 10일이었을 거라고. 우연도 참 기막힌 우연이다. 7년 만에 만난 친구를, 그것도 데모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며 서로를 알아봤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듣자니 웃음이 절로 났다.
▲ 정연순 회장. ⓒ바꿈

"이게 세상의 진실이다, 하는 깨달음"

"대학교 입학 전의 세상과 입학하던 그 해 봄에 만난 세상은 정말 흑과 백처럼 달랐어요. 백이었던 세상이 흑으로 돌변하는 듯한 충격을 대학교 1학년 때 받았죠.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를까 하는 것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서슬 퍼런' 독재체제였다. 서민 중의 서민이었던 부모님은 사회문제에 대해 입 한 번 뻥긋 하지 않으셨고, 어떤 데모가 있든 신문에 실려 있는 정보는 '서울대생 200명이 거리로 나가려고 했다'는 짧은 문장이 전부였다. 고등학생이 세상을 알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지극히도 평범했던 그의 삶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마주한 세상의 진실로 인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하고 그런 것 말고도 우리가 언제든 잡혀갈 수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항상 있었죠.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그 전에도 죽은 선배, 할복한 선배들 이야기라든지 그런 게 있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비장했는지, 뭐 비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상의 생활이라는 게 항상 선택의 문제였어요. 학교에 가면 시위가 있었고, 그러면 수업을 들어갈까, 시위를 함께 해야 할까부터 누군가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학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수업거부, 시험거부였는데 그러면 강의실에 앉아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하나하나 선택을 해야 하는 거죠."

말 그대로 선택인데, 다른 삶을 살 여지는 없었냐는 물음에 그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오히려 ‘박정희의 아이들’로 훈육되어 자라났기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아침마다 외웠어요. 새벽종이 울리니 새 아침을 만들자고요. 그 어린 시절에 스스로를 세뇌를 시켰던 아이가, '백'의 세상에 살다가 갑자기 '흑'의 세상으로 넘어가서 세상을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사명감이 도탄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야 하는 엄청난 역사적 사명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물론 죄책감도 있었죠. 저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요. 비록 학생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던 학생들도 그 감정을 피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런 것들을 느꼈던 사람이 80년대에 다른 삶을 산다고 하는 건… 글쎄, 지금 돌아가도 다른 삶을 살 수 있겠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박정희의 아이들'이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니. 묘한 기분과 함께 참, 역사란 뭘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뭐 그렇게 비장한 듯해도 다들 매일 술 먹고, 연애도 하고…그 와중에(웃음)."

"성숙한 민주주의, 법률가의 역할"

목숨을 건 선택은 아니었지만 23차까지 진행된 이번 촛불집회 역시도 선택의 연속이었다. 서있는 것도, 앉아있는 것도 힘든 추운 겨울날, 그것도 꿀 같은 주말에 나는 안방을 지킬 것인가 광장에 나갈 것인가. 100만 명이나 모였다는데 이때야 말로 '나 하나쯤은'을 실천할 때가 아닌가.

유혹이야 있었겠지만 30년 전이든 지금이든 여전히 광장을 택한 사람은 많았다. 정 변호사는 이번 촛불을 보며 모노톤의 6월항쟁에 다양한 색깔을 입힌,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발견했다.

"87년의 항쟁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단선적인 거잖아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고 해서 소위 통치구조라고 하는 측면에서 전두환 정권의 정권연장 야욕에 대한 저항. 그걸 통해 (독재를) 뚫어보려는 그 의지라고 하는 것이 ‘민주화’ 이렇게 세 글자 하나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단일한 색깔이라고 할까. 단일한 전선의 단일한 목소리였던 거죠.

이번에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양한 목소리, 다양한 요구가 촛불광장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권의 연장 야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헌법상의 책임과 권한을 가진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주권자로서의 물음과 답변’이 있었던 것이죠. 이건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 중의 하나거든요."

시민들이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걸을 동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역시 함께 했다. 회장으로서의 평가를 물으니 ‘저는 잘했다고 생각을 하고(웃음)’라며 말을 이어갔다. 민변은 국정농단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70여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신설했고, 넉 달 동안 꾸준히 성명과 논평을 냈다. 초기에 스캔들처럼 소비되었던 거대한 사건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법률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JTBC 최초 보도가 나간 후 3일 만에 50쪽 정도 분량의 의견서를 냈어요. ‘핵심은 뇌물죄다.’ 그게 무려 2시간 만에 조회 수가 1만 회를 달성했어요. 민변 홈페이지는 남들이 잘 안 찾아오는 섬과 같거든요(웃음). 회원들도 잘 안 읽어서 조회 수가 고작해야 2, 30회 정도에요. 그런데 그게 순식간에 1만 회가 넘더라고요. 2만7000회를 달성했어요, 거의 하루 만에."

치열한 프레임 싸움 속에서 본질은 무엇인지, 범죄행위, 헌정질서 위반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법률가로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번 탄핵 정국은 여러 주체들이 이끌어 갔죠. 100만 촛불 시민이 있었고, 국회, 특검, 헌법재판소도 있었지만, 민변도 그 창립 정신을 살려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부분에서 적어도 못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민변의 '창립정신 지키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단체가 아니라 정치조직 아니냐는 숱한 오해도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와 가까이 하다 보니 상당수 회원이 정치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민변은 87년 민주화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 힘으로 88년에 창립되었거든요. 지금까지 30년 동안 회원들이 민변이 지켜야 하는 가치를 지켜오는데 머뭇거리지 않았고, 가치에 대한 훼절이라고 할까, 말을 바꾸거나 한 적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민변이 가장 두드러지게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반민주적, 권위적 통치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예를 들면 참여정부 시기에도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제주강정해군기지 등 인권이나 평화, 어느 쪽으로든지 옳지 않다고 판단이 되는 부분에서는 비판을 하였던 태도가 있었기에 30년을 유지했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그렇지 않고 그때마다 편의에 따라서 활동을 해왔다면 국민들이 버렸겠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게 30년을 유지한 힘이기도 하고요."

▲ 정연순 회장. ⓒ바꿈

"여성, 변호사"

민변이 지난 30년 동안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워온 역사만큼 정 변호사 역시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다. 1994년에 변호사가 된 후 가정법률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위안부 문제, 여성단체연합, 여성영화인 모임 등 부르는 곳을 마다하지 않고 다닌 대가(?)는 컸다.

열심히 활동해온 대가 중 가장 컸던 것이 '민변 최초의 여성 회장'이 아닐까. 정연순 변호사를 검색하면 최초의 여성 회장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빼곡하게 나온다.

"변호사 단체에서 여성이 회장이 된 것은 처음이거든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이런 것이 아니라 혹은 제가 잘나서 회장이 됐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법조계의 진출이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변호사들의 진출과 헌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거예요.

여성 법조인들 중에 최초 법무부 장관이신 강금실 변호사, 최초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판사가 있어요. 다 훌륭하신 분들이죠. 그러나 그건 그 개인의 노력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걸 밀어준 많은 여성들의, 여성변호사든 여성운동단체든 그런 여성들의 헌신과 노력이 쌓여서 한 사람을 수면 위로 밀어 올려 준 거거든요."

지금까지의 업적이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설명되는 것이 서운하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선 말을 전했다. 이것은 결코 자신의 업적,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일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 해 온 여성 변호사들과 여성운동가들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진출과 헌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상징을 가지고 있는 정 변호사도 돌이켜 보면 80년대가 항상 좋았고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지금의 영(young)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라고 할 거예요. 80년대는 그만큼 엄중하기도 했고, 또 아직 여성인권의 문제까지 눈을 돌리지는 못할 때였으니까…."

선배들이 보여줬던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문화조차 거스르기 어려웠던, 가두시위를 나갈 때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남성동지의 애인 역할을 수행하는 위장책을 맡거나 감옥에 있는 선배들이 '찍어서' 옥바라지를 맡기면 묵묵히 해내야 했던, 그런 일들이 여성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때는 민주화라고 하는 대의에서, 그 대의의 전선에서 이야기 되는 것 말고 내부의 어떤 문제제기라고 하는 것은 허용이 안 되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뭘 하나라도, 그게 사소한 것이든, 다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문제를 느낄 수가 없었죠.

민주화가 되고 90년대로 넘어와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위 X세대라고 하는 세대가 등장하면서 사회의 지형이 흔들리죠. 이렇게 살았던 게 맞나? 민주화의 대의에 눌려져 있었던 성차별, 성폭력 문제가 결국 여성들 스스로의 성찰 속에서 터져 나왔죠. 그게 소위 '100인위원회 사건', 진보운동권내의 성폭력 성차별 폭로사건으로 터졌어요. 저는 그때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100인위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었어요. 그 과정 속에서 80년대 민주화가 갖고 있는 한계를 목도하게 되었죠.

80년대를 살아남은 여성들은 그 속에서 완전한 남성화를 이루던지, 아니면 페미니즘의 정신을 가지고 주류에 들어가기를 거부해야 하는 삶을 선택해야 했어요. 결혼이 '적과의 동침'인데, 일상의 하나하나를 문제제기하자면 도저히 그 사람과는 같이 살 수는 없는(웃음), 그 속에서 조금씩 타협해 가며 무언가를 이뤄내야 하는 쉽지 않은 삶을 살아 왔던 것 같아요."

▲ 정연순 회장. ⓒ바꿈

"다시 민주주의"

희망적이게도 역사는 정 변호사가 목도한 80년대의 한계에 멈춰 있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00인위원회 활동을 비롯해 당시의 문제를 지금이라도 해결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인식은 분명 나아지고 있다.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더 많은 구호가 나오고, 더욱 다양해지는 것. 그가 이번 촛불에서 발견한 '성숙한 민주주의'의 일부가 아닐까.

"우리는 민주주의를 87년에 형식적으로 거쳤지만 사실 그것은 소위 87년 헌법이라고 하는, 기존의 헌법에서 통치구조만 조금 바꿨을 뿐이지 헌법에 적힌 ‘민주공화국’이라는 의미가 정말 뭔지, 기본권, 경제 질서, 지방자치, 교육자치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도 못했어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누구나 평등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것을 사실은 그 전에 다 알고 쟁취한 게 아니었어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87년 헌법을 쟁취하고서 그 헌법에 세세하게 적힌 구절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30년 간 깨달아 온 거죠, 조금씩 전진 후퇴를 반복하면서. 87년에 우리가 무엇을 쟁취했지? 하는 인식이 저는 이번 촛불에서 분명하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우리가 87년도에 쟁취한 것은 이거구나, 민주주의."

오랜 기간이 걸린 깨달음이었다. 헌법에 그저 적혀진 문구를 외우는 것이 아닌, 몸으로 부딪혀 깨달음으로 얻은 민주주의. 그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소수자와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87년 헌법은 이제야 국민들에게 헌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이제는 헌법에 있는 규정 하나하나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새로운 정부의 역할일 것이라고 전했다.

"87년과 2017년의 간극. 그 사이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30년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다음 30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시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이렇게 (과거처럼) 퇴행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그런 비가역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청사진. 이런 것을 새로운 대통령이 제시해주면 좋겠다, 사실은 (그것이) 국민들을 굉장히 위로해주는 일이거든요."

정 변호사는 작년 봄, 2017년을 앞두고 마음이 비참했다고 한다. 이제 곧 6월 항쟁 30주년인데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은 87년이 아닌 77년인 것 같은 기분에 너무 후퇴했다는 공포가 압도했었다고. 그러나 이번 겨울을 지내면서 다시금 역사의 흐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어서 '그게 아니다, 우리는 한 단계가 나아갔다'라고 평가할 수 있어서 기뻤다는 그의 말을 통해 이미 그 청사진은 충분히 그려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음 정권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중에'가 아니라, 비록 하나하나의 촛불로만 기억되고 불리어질 것이나, 그 도도한 물결을 끝내 이루어낸 수많은 시민들에 의해 반드시 그려질 것이라고. 그것이 87년과 2017년을 잇는 힘이자 앞선 세대와 뒷 세대의 연대의 정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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