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14명 사망…올림픽으로 사람 잡은 나라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49> 6월항쟁, 서른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농민들, 6월항쟁 후 전농 결성하고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프레시안 : 지난번에 1987년 6월항쟁에 이어 터져 나온 7·8·9월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 살펴봤다. 노동자 대투쟁이 그 시기에 일어나는 데에는 6월항쟁으로 권력의 통제가 느슨해진 시점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이번에는 노동 부문 이외의 사회 운동에서 6월항쟁 전후 어떠한 변화가 발생했는지 간략히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먼저 농민 운동을 보자. 1970년대에 일부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농민 운동은 1986년부터 대중 노선에 입각한 대중 조직 운동으로 변모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1987년 2월 26일 전국농민협회가 창립된다.

그 후에도 농민들의 통일, 단결 노력은 계속됐다. 1988년 11월에는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전국농민협회 등이 농민 운동 단체 대표자 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1989년 3월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연) 창립 대회가 열렸는데, 전국농민협회는 전농연에 불참했다. 그렇지만 전농연과 전국농민협회는 전국 단일 조직을 건설하자는 논의를 이어갔다. 그 결과물로 1990년 4월 24일 전농연, 전국농민협회, 그리고 독자적인 대중적 군 단위 농민회와 YMCA농민회 등 72개 군 조직의 대의원들이 참석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을 결성했다. 또한 1989년부터 가톨릭여성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여성위원회를 중심으로 여성 농민 조직 통합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전개돼 1992년 1월 20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가 탄생했다.

전농 창립 후 농민 운동은 전농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런데 전농이 결성된 시기는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던 때였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에 대항하는 것이 전농의 주요 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농은 우리 농업 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해 가트(GATT)-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 대처했다. 1993년 이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전농은 계속 투쟁을 전개했다. 그 후에는 또다시 농업의 희생을 강제하는 형태로 진행된 여러 FTA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전농은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전개돼온 우리 밀·콩 살리기 운동,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확대하고 한살림을 비롯한 소비자 생협 운동과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먹을거리 안전성에 대한 계몽 운동 등을 펼쳤다.

"86, 88이 사람 죽인다"…강제 철거에 맞선 빈민들의 생존권 투쟁

프레시안 : 빈민 운동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해방 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달동네, 판자촌 등으로 불린 빈민촌이 많이 있었다. 1950년대 이래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사회적으로 큰 과제가 됐다. 그런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재개발 문제가 등장했고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났다.

1980년대에는 강제 철거 문제가 사회 문제로 빈번히 등장했다. 재개발이 건설업체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중에서도 서울 목동과 상계동 같은 곳에서 큰 규모의 철거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목동의 경우 1983년 서울시가 목동 지역에 공영 개발 방식으로 신시가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토지와 건물을 서울시가 수용한 다음 아파트를 짓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그곳에 살던 주민 중 상당수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5200세대 정도가 그곳에 거주했는데, 그중 약 절반에 이르는 집주인들의 경우 무허가 판자촌을 수용당하면 아파트 분양권을 받더라도 입주할 능력이 없었다. 판자촌은 싼값에 수용당하는 반면 새로 지은 아파트는 가격이 폭등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세입자들은 그것보다도 더 형편이 어려웠다.

이 때문에 무허가 주택 주인들은 임대 주택을 짓고 입주권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세입자들도 임대 주택 건설을 주장했다. 목동 철거 반대 투쟁은 100차례가 넘는 집회와 시위를 거치면서 2년 정도 계속됐는데, 이전에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투쟁에 비해 조직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다는 게 특징이다. 가두 점거 농성, 구청 진입, 경찰서 앞 시위 등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주민들은 1984년 8월 양화대교를 점거했고, 그해 12월에는 경인고속도로를 차단했다. 이처럼 목동 철거 반대 투쟁이 큰 규모로 장기간 계속되는 데 빈민 운동가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고, 운동권 학생들도 지역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프레시안 : 상계동 쪽도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폭력적인 철거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나.

서중석 : 목동에 이어 규모가 큰 재개발 구역이 된 사당 3동과 상계 5동에서도 지역 주민들의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상계 5동의 경우 1986년 3월에 구성된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시위와 집회 투쟁을 벌였다. 이것을 천주교 단체들이 적극 지원했다. 철거는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해 6월 26일에는 철거 과정에서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공방전이 벌어졌고 철거반원들의 위협과 폭력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다시피 했다.

주민들이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1987년 4월 남아 있던 가옥들이 모두 강제로 철거되고 말았다. 그 후 주민들은 명동성당에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이 사람들은 6월항쟁이 한창이던 시기를 명동성당에서 보냈다. 전에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다룰 때 얘기한 것처럼, 상계동 철거민들은 명동성당에 쫓겨 들어온 시위대에게 솥을 걸어 라면도 끓여주고 빨래도 해주고 잠자리도 제공했다.

빈민촌 철거 문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때문에 여러 차례 사회 문제가 됐다. 강제 철거는 대단히 폭력적이어서 1986년 한 해 동안 철거 현장에서 숨진 사람이 5명이나 됐고, 1986년에서 1988년 2월까지 놓고 보면 14명이 강제 철거 때문에 사망했다. 재개발 과정에서 주요하게 내세운 명분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어서 "86, 88이 사람 죽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노점상 단속도 이때 아주 심했다.

이렇게 계속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각 지역 철거민들은 6월항쟁 직후인 1987년 7월 17일 서울시철거민협의회를 만들었다. 노점상들은 그해 10월 전국노점상연합회를 만들었다. 1989년 11월에는 서울시철거민협의회, 천주교도시빈민협의회, 기독교빈민협의회 등 여러 단체가 모여 전국빈민연합을 결성했다.

▲ 1987년 5월 4일, 상계동 강제 철거 당시 방치된 담벼락이 무너져 어린이 4명이 그 밑에 깔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3명은 크게 다쳤고, 1명(상계국민학교 2학년 오동근)은 결국 숨졌다. 사진은 명동성당에서 열린 시위에 '동근이를 살려내라'는 피켓을 들고 동참한 어린이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 민주화 위한 가시밭길, <민중 교육>지 사건부터 전교조 대량 해직까지

프레시안 : 교육 부문은 어떠했나.

서중석 : 교육 민주화로 가자.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의 파시즘적 권력 유지에서 최대의 피해자들은 1000만 학생들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현실을 바로잡고 교육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확산하기 위한 운동이 1985년 <민중 교육>지 사건 이후 치열하게 전개됐다.

<민중 교육>은 1985년에 부정기 간행물로 나온 잡지였다. 이런 걸 무크지라고 하는데, 그러한 <민중 교육>에 대해 그해 8월 문교부는 용공 계급투쟁 시각에 의한 교육 분석과 서술, 반미 감정 선동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몰아세웠다. KBS는 '민중 교육, 당신의 자녀들을 노린다'는 특집을 만들어 방영했다. 이렇게 몰아치는 속에서 <민중 교육>을 발간한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 그리고 기획에 적극 참여한 교사 윤재철과 김진경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 사건 관련자는 20명 정도인데, 이들은 단지 시나 소설을 <민중 교육>에 실었다는 등의 이유로 교단을 떠나야 했다. <민중 교육>지 사건으로 실천문학은 등록이 취소됐다.

1986년 5월 10일에는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산하 서울, 부산, 광주, 춘천 지역 회원 800여 명이 교육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하며 자주적인 교원 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도 전면 보장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언 직후 교사들은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창립총회를 열고 지역별로 민주 교육 실천 결의 대회를 열었다. 7월 15일 전두환 정권은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사무국장 유상덕을 구속했고 9월에는 윤영규 등을 구속했다.

프레시안 : 6월항쟁 이후에는 상황이 어떠했나.

서중석 : 6월항쟁 이후인 1987년 9월 27일 교사들은 민주 교육 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윤영규를 선출했다. 전교협은 교사의 노동 3권 보장, 교사의 정치적 권리와 사회 경제적 지위 보장, 진정한 교육 자치제 실시, 입시 과열 경쟁 교육 지양 및 학교 교육 정상화 등을 촉구했다.

전교협 조직은 급속히 커져 1989년 상반기에는 회원이 약 3만 명에 이르렀다. 전교협이 이처럼 급성장한 데에는 6월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을 탄 측면도 있지만, 부패로 얼룩진 사학의 비리 등을 적극적으로 폭로한 것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는 교육법을 민주 사회에 걸맞게 개정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도 벌어졌다. 1988년 11월 1만 3000여 명이나 되는 교수, 강사, 교사, 예비 교사가 여의도광장에 모여 민주 교육법 쟁취 전국 교사 대회를 열면서 교육법 개정 투쟁 열기는 한껏 고조됐다.

그런 속에서 전교협은 교사 노조를 조직해, 이게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되는 것인데, 교육 민주화 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의했다. 1989년 5월 28일, 경찰과 교육 관료들은 전교조 결성 대회가 예정된 한양대 주변에서 삼엄한 경계를 폈다. 이에 맞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전교조 결성 대회를 엄호하는 가운데, 전교조는 연세대로 장소를 바꿔 결성 대회를 열었다.

전교조는 6월 1일 노동부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이를 반려했다.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교사가 구속과 징계를 당했다. 1989년 4월에서 1990년 4월까지 84명이 전교조와 관련해 구속(수배)됐고, 전교조를 지키기 위해 해직의 길을 택한 조합원이 1990년 1월 8일까지 1519명(파면 164명, 해임 939명, 직권 면직 416명)에 달했다. 1519명 중 초등 교사가 135명, 중등 교사는 1384명이었다.

(전교조 탈퇴 압박을 거부해 해직된 교사는 최종적으로 1527명에 이른다. 김대중 정권 때인 1999년 7월, 전교조는 결성 10년 만에 합법 노조가 됐다. 전교조 합법화의 분수령은 IMF 위기 직후인 1998년 2월에 이뤄진 이른바 노사정 대타협이었다. 노동계는 이때 전교조 합법화와 노조의 정치 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정리 해고와 파견제 도입에 동의해줬다. 이에 앞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은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6년 12월 정리 해고제 등이 날치기 통과되자 1996~1997년 총파업으로 이를 저지한 바 있다. 그렇게 막아내고자 했던 정리 해고제 등이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이래 노동자들은 오늘날까지 뼈아픈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한편 전교조는 합법화 15년 만인 2014년 박근혜 정권에 의해 법외 노조로 내몰렸다. '편집자')

6월항쟁 후 언론, 문화 예술, 시민운동에 불어온 새바람

ⓒ오월의봄
프레시안 : 언론을 비롯한 다른 부문은 어떠했나.

서중석 : 6월항쟁 후 언론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했다. 그 첫걸음으로 언론인들은 노조를 만들었다. 1987년 10월 29일 한국일보사에서 노조가 결성된 것에 이어 동아일보, 중앙일보, 서울 MBC 등에서도 잇따라 노조가 조직됐다. KBS에서는 PD협회가 결성된 데 이어 아나운서협회 등이 만들어졌고, 1988년 5월에는 노조도 결성됐다. 각 언론사의 많은 기자 또는 PD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편집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성 언론사 내부의 노조 결성 투쟁 등과 별개로 자본과 권력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문을 창간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그 일환으로 1987년 10월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1988년 5월 15일, 국민주 방식의 모금을 통해 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6월항쟁 후 문화 예술계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판금 도서도 일부 해제되고 공연의 사전 심의제도 철폐돼 합법적인 활동 공간이 넓어진 가운데 1988년 11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문학, 미술, 민족극, 영화, 음악, 춤, 건축, 사진 부문의 문화 예술인들이 참여했다. 민예총은 1988년 12월 23일 "참된 민중적 민족 문화 예술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창립총회를 열었다.

또한 6월항쟁은 시민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됐다. 환경 부문을 살펴보면, 환경 시민운동은 1980년대에 들어와 다른 부문의 시민운동보다 먼저 일어났다. 한국에서 진행된 공업화는 특히 환경 문제를 등한시하지 않았나.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1982년 최열 등이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9월에는 환경 관련 세 단체가 공해추방운동연합으로 통합 발족했고, 1993년에는 환경운동연합이 출범했다. 환경 이외 부문의 경우 1989년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등장했고 그 후에도 여러 시민운동 단체가 조직됐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쉰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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